- 골든 글로브 여우 주연상 수상작
‘무슨 얘기를 하면 별것도 아닌걸 중요하게 생각하잖아’
가진 자는 자유로운 자를 부러워하고, 자유로운 자는 가진 자를 부러워한다.’ 여기에서 ‘가졌다’라는 표현의 범위는 무척 넓게 적용될 수 있다. 무릇 무언가를 소유한 사람은 거기서부터 욕심과 집착이 생기고 고통이 오는 것 아닌가. 그래서 불교에선 사성제(四聖諦), 즉 고집멸도(苦集滅道)를 이야기 하지 않았는가. 반면 집착할 만한 가진 게 없는 자들은 오로지 가진 자들을 부러워한다. 그 어느 쪽도 고뇌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중에서 오늘 이야기 하고 싶은 주제는 바로 연인이다. 물론 파트너를 소유의 개념으로 표현하기엔 좀 무리가 있지만, 현실에 존재하는 수많은 사랑의 모습은 집착의 변형된 형태라고 생각하니 이해하고 넘어 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불쌍한 프랑수와, 그의 영화 속 모습을 보며 난 얼마나 그를 동정하고 두둔했는지. 다섯 살 많은 연상의 여인 안느의 마음에 들기 위해 새벽같이 그녀에게 메모를 남기고자 왔더니 보게 된 건 그녀와 옛 연인과의 만남. 그것도 그녀의 집에서 함께 나오는 모습이라니.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당장 대판 싸우며 추궁할 텐데, 오히려 그를 계속 피하는 안느 때문에 제대로 말하지도 못하고 어렵사리 그녀를 찾아서 좀 따지려고 하니(그 직전까지 안느는 프랑수와 뒷담화를 친구와 하고 있었다) 오히려 그녀는 제대로 된 설명도 없이 적반하장이다. 갈 곳 없는 그는 우연히 마주친 안느의 옛 연인이 다른 여자와 함께 있는걸 보고 줄곧 미행하는데 갑자기 한 여학생이 혹으로 달라붙는다. 답답한 마음, 그녀와 이야기 하며 탐정놀이를 하고나니 좀 풀리는 것을 느끼며 약간은 마음에 담아두는데.. 결국 그날 오후, 다시 안느의 집을 찾았더니 좀 쉬겠다며 그를 쫒아내려는 안느. 하지만 이내 곧 자신의 온갖 짜증을 프랑수와에게 늘어놓는 그녀. 그리곤 자신은 마음이 좀 풀렸는지 또 다른 남자와 만나기 위해 외출준비를 하고 프랑수와에겐 낮에 만났던 여학생과 연락이나 해 보라며 부추긴다. 대충 분위기 보니 안느와는 이제 정리해야 할 것 같고.. 아까 자신에게 마음이 있는 것 같던 여학생, 루시의 집으로 간다. 그녀가 부탁한 후일담을 편지로 전해주기 위해서 가는데 희한하게도 우편으로 부치면 될 것을 직접 집으로 배달해 달라는데.. 그녀의 집 앞으로 가니 그녀 역시 없다던 연인과 함께 애정행각을 벌이고 있었다. 게다가 그 상대는 자신의 우체국 직장 동료. 왜 굳이 직접 편지를 전해달라고 했는지 순간 깨닫게 된 프랑수와. 루시 입장에선 자신의 남자친구가 자기 집 구역을 담당하고 있으니, 만약 다른 남자가 우편으로 자신에게 편지를 보내면 남자친구가 먼저 알아버릴 테니깐 그랬던 것이다. 그래서 프랑수와는 우편으로 그녀에게 후일담을 전한다. 그리고 쓸쓸히 역을 걸어 나가는 프랑수와 뒷모습으로 깔리는 이 노래 가사, `파리에 반했어요. 파리가 날 꼼짝 못하게 해요. 모든 희망을 불안으로 바꿔 놨어요. 초라한 방에서 쓸쓸히 살아가죠. 홀로 친구와 낯선 사람들에게서 떨어져서.. 하지만 평화로워요. 혼자인 게 자랑스러워요. 인생의 어려움이라 생각되는 것 속에서..`. 드디어 차라리 혼자인 것이 편하다는 것을 깨닫고야 만 그의 앞날에 더 이상 안느나 루시는 없을 것이다.
일단, 이 영화가 굉장히 흥미로웠던 점은 등장인물들이 바라보는 시점의 방향이 모두 어긋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일단 프랑수와의 시선은 분명 안느를 향해 있지만 안느의 시선은 처음엔 크리스티앙을, 그리고 나중엔 등장하지는 않지만 저녁 약속을 잡은 제 3의 남성으로 향해 있다. 또 그 시선이 틀어지자 프랑수와는 시선을 루시에게 잠시 돌리지만, 루시의 시선 역시 프랑수와의 직장 동료에게 향해 있다. 그렇다면 안느의 경우는 어떤가? 줄곧 향했던 크리스티앙을 향한 시점이 종언을 고한 날이 바로 영화에서의 하루였다. 그럼 크리스티앙은? 아내가 있지만 그는 하루 종일 여동생이라고 단서는 주어지지만 확실하지는 않은(사실 여동생이란 사실조차 의심스럽다.) 금발의 여인과 돌아다닌다. 내가 볼 때엔 그들은 남매가 아니고, 실은 이혼하기 위해서 변호사 사무실에 함께 찾았다고 보는 게 옳을 것 같다. 그럼 크리스티앙이 아침에 안느에게 와서 한 말이 거짓말이 되는 것이다. 아무래도 정부를 떼어놓기에 가장 좋은 핑계는 본처의 임신만한 게 없을 테니까. 마지막으로 루시의 경우엔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시선이 마주치는 인물과 사랑을 하고 있는 걸로 추측된다. 하지만 그녀 역시 마지막 장면에 프랑수와가 일부러 우표를 붙여 그녀에게 엽서를 부치는걸 봐서 이미 사랑의 균열을 암시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결국 이렇게 그들은 누구도 시선이 마주치지 않는 하루였던 것이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시선의 어긋남은 질서를 찾게 될 것이고 서로의 짝을 찾게 될 것이다. 하지만 크리스티앙이 아침 일찍 안느를 찾아오며 균열이 생기게 된 단 하루, 그 하루가 등장인물 모두에게 특별한 하루이기에 우리는 흥미진진하게 영화를 감상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다음으로 흥미로웠던 장치는 바로 사진이다. 사진에 대해서 공통적인 이미지로는 일단 움직이는 영상인 영화 속에선 정적인 이미지로 그려지고 아무래도 좀 부정적인 장치로 많이 이용된다. 세 사진 모두 공통점이 있다면 사진 속 등장인물들의 표정이 모두 일그러져 있다. 마치 사진에 찍히면 영혼이 빠져나간다고 믿던 원시인들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 속에서 총 세 번 등장하는 사진의 의미는 무엇일까? 첫 번째 사진은 루시 매력의 발산 도중 나온 부산물 이었다. 여고생답게 재잘거리며 아무것도 아닌 일에 관심을 보이는 그 모습이란! 사실 이제껏 본 로메르 영화의 여배우들 가운데 크게 매력을 느낄만한 인물은 없었는데 루시만큼은 정말 매력 만점이었다. 아무튼 루시는 기지를 발휘해 사진을 찍었는데 사진에서의 표정은 억지로 누가 시켜서 찍은 듯한 억울한 표정이었다. 이는 왜 그랬을까?
두 번째 사진은 프랑수와가 루시에게 보여준 애인, 안느의 사진이다. 안느 역시 차가운 표정으로 사진을 찍었는데 이는 안느의 영화 속 모습과 어느 정도 일치해 어색함을 느낄 수 없었다. 물론 사진을 찍는데 왜 웃지 않고 찡그렸는지는 로메르 마음이지만.
마지막 사진은 안느가 프랑수와에게 보여준 크리스티앙의 사진이다. 이 단체 사진에서 다른 세 인물은 활짝 웃고 있으나 오직 크리스티앙만은 웃지 않고 있다. 안느의 설명에 따르면 아내와 여동생, 그리고 누군지 알 수 없는 한 남성과 찍은 사진인데 홀로 찌푸리고 있는 것이 어색하다. 하지만 여동생이라 알려진 그 여인이 실은 내연의 여인이라면? 아내와 내연녀가 함께 사진을 찍는다는 사실이 무척 부담스러웠을 수도 있다. 그래서 표정이 그런 게 아닐까? 이 세 번째 사진에서 크리스티앙이 좋지 않은 표정으로 있는 것은 어느 정도 설명이 가능하지만 앞의 두 사진은 굳이 찌푸릴 필요가 없는 사진이다. 특히 루시의 경우엔 말이다. 내 생각에 여기에서 로메르의 사진에 대한 평소의 인식을 살짝 엿볼 수 있지 않을까. 아무래도 동적인 영화 속에서 정적인 사진은 부정적 역할을 담당할 수밖에 없기에 그는 부정적 인식을 담아 사진 속 인물들이 행복해 보이지 않게 만든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은 것은 안느의 집이다. 모든 인물들 가운데 유일하게 집이 등장하고 실제로 영화속 중요한 장면 역시 집 안에서 촬영되었다. 그리고 그녀 역시 그녀의 집에 대한 강한 애착을 영화 속에서 보여준다. 또 프랑수아와 안느의 긴 대화신에서 집안의 적절한 소도구 이용은 로메르의 치밀한 계산을 엿볼 수 있었다.
우선 다른 인물들과 다르게 안느는 자신의 집에 집착한다. 그리고 집안에서 과도하게 겉옷을 벗고 있다. 보통 아무리 혼자 집에 있는다 해도 얇은 상의에 작은 팬티 하나로 집에 있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녀는 프랑수아가 와도 줄곧 그 차림이다. 그 모습이 마치 자궁 속에서 헤엄치는 태아 같았다. 바깥이 아닌 편히 쉴 곳인 집을 좋아하고 또 그 집에 집착을 보인다. 그리고 태아의 모습으로 돌아가려는 듯이 집에 들어오면 옷을 과도하게 벗는 모습 등에서도 그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서일까? 그녀는 스물 다섯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개인적으로 힘든 일을 다섯 살이나 어린 프랑수아에게 화풀이하는 모습을 보이는 등 정신 연령으로 보자면 가장 어린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안느의 방 안에는 여러 소품이 있었는데, 특히 눈에 띈 것은 어항, 큰 쿠션, 그리고 스노우볼이다. 로메르는 소도구를 잘 이용하여 당시 등장인물의 심리를 잘 표현했는데 프랑수아와 대화 도중 어항에 먹이를 주는 장면은 안느의 집중하지 못하는 정신적인 상태를 나타냈고 큰 쿠션 역시 그녀의 불안한 정서를 잘 보여줬다. 그리고 영화를 보는 내내 가장 날 괴롭혔던 소도구, 바로 스노우볼이다. 프랑수아는 그 스노우볼을 줄곧 흔들어 댄다. 다른 소도구는 인물의 전체 행동을 보여주며 그 가운데 다뤄지는 도구인 반면 스노우볼은 프랑수아가 처음 집는 순간부터 가까이 클로즈업해서 보여준다. 그리고 줄곧 흔들어 댄다. 내 생각에 스노우볼은 프랑수아의 특성을 말해 주는게 아닐까 한다. 스노우볼, 가만히 두면 한없이 고요한 세상이다. 하지만 약간만 자극을 주면 온통 흰 눈이 쏟아져 내린다. 프랑수아가 그 스노우볼을 줄곧 흔들어대는 내내 이렇게 내게 말하는 듯 했다. ‘나, 그냥 가만히 두면 한없이 조용하고 착한 사람이야. 난 정말 조용히 지내고 싶다고. 하지만 안느 너, 너가 날 이렇게 흔들어 놓으니 나도 평소답지 않게 집착하고 흔들리는 거 아니겠어? 부디 날 가만히 좀 내버려 두면 안될까?’
결국 프랑수아는 스노우볼을 놓아 버린다. 이제 그를 괴롭힐 것은 없다. 잠시나마 루시를 생각했지만, 루시마저 그의 기대를 저버린다. 드디어 이제 프랑수아는 자유롭다. 이유는 더 이상 그를 흔들어댈, 그래서 그의 마음속에 온통 눈을 흩뿌릴 사람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