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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sc 1: 알렉산더 대왕의 가우가멜라 전투
때는 기원전 332년. 수 세대 전, 침략국 페르시아 제국은 소 아시아를 거쳐 그리스 식민지를 점령하고 있었다. 젊은 알렉산더와 그가 이끄는 무적 동맹군인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부대는 그리스를 식민지 상태에서 ‘해방’시키고 페르시아 제국을 원래 자신들의 땅으로 되돌려 보내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몇 차례의 승리 후 23세의 전투왕은 그저 해방을 목적으로 한 전쟁이 아닌 정복을 위한 전쟁을 선포하기로 한다. 그의 부대는 당시 전 세계 역사상 가장 거대하고 막강한 군사력을 자랑하고 있던 다리우스 3세의 부대들을 무찌르기 위해 페르시아 국경을 넘게 된다. 다리우스는 그리스 부대의 전투력에 이미 놀란 상태였다.
두 번의 짧은 전투 후, 다리우스와 그의 부대는 가우가멜라의 작은 마을에 있는 티그리스 강 주변의 넓은 평야를 전투 장소로 고른다. 바로 여기에서 알렉산더와 그 침략자들을 소탕하기로 마음 먹은 것이었다. 전 세계에서 최정예 부대로 인정받던 다리우스 3세의 페르시아 부대는 사십만여 병력에 사만여 명의 기마부대 외에 사람을 반으로 가를 수 있는 무시무시한 큰 낫이 달린 수백 여 대의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다. 알렉산더는 겨우 4만5천명의 기마병과 보병뿐이어서 10대 1의 전투를 해야 할 판이었다. 하지만 알렉산더는 탁월한 전투 전략을 수 차례 구사하여 페르시아군을 놀래키고, 미래의 전투 방식 자체를 변화시키게 된다. 알렉산더가 구사했던 전투 전략의 중심은 방패를 무기삼아 모든 방향의 공격에서 심지어 공중 공격까지 포함하여- 자신을 보호하는 촘촘히 결집된 기갑 보병 부대인 마케도니아 집대형(Macedonian phalanx)으로 압축된다. 이들은 또한 ‘사리사스(sarissas)’라고 불리던 18 피트 길이의 무거운 창을 들고 다녔는데, 이 창은 적군이 이보다 길이가 짧은 무기로 자신들의 털끝마저도 건드리기 전에 이미 적군을 무찌를 수 있도록 하였다.
알렉산더의 전투 접근 방식은 고대 세계를 정복할 수 있도록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청동기 시대의 전투 기법의 종말을 전하고, 철기 시대 전투 기법인 보다 새롭고 치명적인 전투 방식을 예고한 것이었다. 여기에는 위험 요소도 물론 있었다. 만약 알렉산더가 패배했었더라면, 페르시아군이 지중해를 점령하여 서양 문명 발전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끼친 문화국가 중 하나로 그리스를 대신하여 역사에 이름을 남겼을 것이다.
Disc 2: 나폴레옹의 몰락 - 워털루 전투
때는 바야흐로1815년. 한때 프랑스의 위대한 황제였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영국 군함에 둘러싸인 망명자 신세가 되었다. 러시아를 정복하려던 원정 시도가 재앙적인 패배를 겪은 뒤, 유럽 연합국에 의해 다시금 짓밟힌 그는 엘바의 한 작은 지중해 섬에 갇힌 말 그대로 죄수 신세에 다름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의 충성스러운 측근들의 도움으로, 나폴레옹은 유배지에서 탈출하여 프랑스 땅을 다시금 밟게 된다. 나폴레옹이 탈출해 프랑스 수도를 향해 진군하고 있다는 소식이 파리에 전해지자, 나폴레옹과 그의 작은 부대를 생포 또는 처치하기 위해 수 천명의 병사들이 급파 되었다. 하지만 이들은 원 명령을 따르는 대신, 여전히 카리스마 넘치는 나폴레옹에게 설득되어 오히려 그의 부대에 합류하게 된다.! 나폴레옹이 파리에 도착했을 즈음에 왕은 이미 퇴위를 하였고, 나폴레옹은 다시금 프랑스의 황제가 되었다. 다른 유럽 국가들은 프랑스나 프랑스인들 전체가 아닌 단 한 남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무찌르기 위해 다시금 각국의 힘을 결집하기로 한다.
유럽 연합 부대가 결속하여 프랑스로 속속 모여들면서, 세 명의 위대한 장군들은 나폴레옹과의 전투를 준비한다. 나폴레옹은 전 세기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세대에서는 가장 위대한 군사 전략가로서 이미 자신의 이름을 드높인 사람이었다. 그에게 대적한 장군은 미래의 웰링턴 공작인 아서 웰슬리 경이었다. 그는 냉정하고 계산이 빠른 영국의 귀족 출신으로, 나폴레옹만큼 유명한 인물은 아니지만, 방어의 귀재였다. 그는 나폴레옹과 맞서기 위해 프랑스로 향하는 영국-네덜란드 연합군의 사령관이 될 참이었다. 그 외에 나폴레옹과의 전투에 참여한 국가는 프랑스의 오랜 숙적인 프로이센이었다. 프로이센 부대의 사령관은 국민의 사랑을 받던 육군 참모 블뤼허(Gebhard von Blucher)였다. 블뤼허는 72세의 노장이었지만, 자신의 조국인 프로이센을 침략하여 자신을 투옥시켰던 나폴레옹을 처치해야겠다는 일념으로 가득 찬 사람이었다. 고령에도 불구하고 블뤼허는 전투에서 위험을 불사하고 공격적인 전략을 구사하는 장군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하지만 블뤼허는 자신이 미처 작전을 취하기도 전에 당한 나폴레옹과 그의 부대의 잔혹한 공격에 허를 찔리게 된다.
프랑스 부대는 프로이센 부대가 이젠 질려서 완전히 퇴각한 것이라고 믿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기세가 등등했던 나폴레옹은 프로이센 쪽에서 프랑스로 진격하길 느긋하게 기다리는 대신 벨기에의 국경을 넘어 웰링턴을 치기로 결정한다.
Disc 3: 격전의 현장 - 벌지 전투
때는 1944년 후반. 연합국이 노르망디에 상륙하여 프랑스를 독립시킨지 6개월이 지난 시점이었다. 러시아의 붉은 군대가 동쪽에서 조국을 향해 진군하는 동안 그들은 이제 독일로 향할 준비가 되었다. 자신의 군 사령관의 판단과 달리, 아돌프 히틀러는 서부 전선에 대해 최종적으로‘모 아니면 도’식의 도박을 걸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만일 독일 군대가 전격전(Blitzkrieg) 혹은 단 4주 만에 프랑스를 굴복시켰던 1940년 ‘번개 작전’공격을 다시 한번 성공적으로 재현해낼 수만 있다면, 연합군 부대의 숫자를 반으로 만들어 버리고 미국과 영국 부대 측에 화평을 청해 러시아 부대에 대항할 수 있는 자신만의 군대 세력을 결집할 수 있으리라 히틀러는 판단했다. 이는 1700년대 프레드리히 2세 이후 독일이 겨울철에 처음으로 수행한 공격이었다. 히틀러의 계획은 혹독한 겨울 추위 속에서 연합군이 잠시 긴장을 풀고 있을 때 연합군 전선의 취약한 중심을 과감히 돌파하여 바다쪽으로 진격, 유럽 연합군에게 물자를 조달하던 주요 항구인 앤트워프를 점령하는 것이었다. 만약 이 도박이 먹힌다면, 자신의 조국 라이히(Reich)를 지켜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한편 1944년 12월, 연합군 부대는 아르덴 숲을 따라 벨기에에 퍼져 있었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장군의 통솔 하의 연합군은 아르덴 숲이야말로 독일의 역습을 맞을 가능성이 가장 희박한 곳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 곳은 나무들로 시야가 빽빽한 곳인데다, 길도 거의 나 있지 않았고, 있는 길이라도 폭이 비좁아 그 곳을 통과하며 서로 교신하기가 특히 혹독한 겨울 날씨에는 - 버거운 장소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합군은 히틀러의 탱크와 기갑 부대가 프랑스 파리를 단숨에 넘어뜨리고 아르덴까지 진격할 수 있었던 번개와도 같은 첫 번째 공격은 잊어버린 듯 했다. 이와 같은 연합군의 착오는 제 2차 세계대전의 육상 전투 중 가장 큰 대가를 치르게 된 이유가 되었으며, 만약 연합군에게 여러 번 다가왔던 뜻밖의 행운과 독일군의 몇 차례 형편없는 판단이 아니었다면 현재 역사가 바뀌었을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