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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 2009년 05월 1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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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131쪽 | 202g | 128*205*20mm |
ISBN13 | 9788932019574 |
ISBN10 | 89320195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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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9월 01일 ~ 2024년 09월 30일
상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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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라져가는 존재는 슬프다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채색이 덜 마른 수채화를 액자에 끼웠다. 손에도 액자에도 풍경이 물들었다. 나는 또 한 번 동화적 상상을 한다. 그것은 어린 날 꿈꿨던 청사진이 아닌, 어른이 되어 돌아본 삶의 고단함이다. 송찬호의 네 번째 시집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은 어쩐지 슬펐다.
개나리, 찔레꽃, 맨드라미, 종달새 울음은 어느새 고전이 돼 버린 듯 한, 낡고 고루한 느낌마저 든다. 그러나 한편에서 그것들이 그리워지는 건 왜일까?
마당가 분꽃들은 노랑 다홍 빨강 색색의 전기가 들어온다고 좋아하였다
울타리 오이 넝쿨은 5촉짜리 노란 오이꽃이나 많이 피웠으면 좋겠다고 했다
닭장 및 두꺼비는 찌르르르 푸른 전류가 흐르는 여치나 넙죽넙죽 받아먹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리고 가난한 우리 식구들, 늦은 저녁 날벌레 달려드는 전구 아래 둘러앉아 양푼 가득 삶은 감자라도 배불리 먹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해 여름 드디어 장독대 옆 백일홍에도 전기가 들어왔다
이제 꽃이 바람에 꺾이거나 시들거나 하는 걱정은 겨우 덜게 되었다
궂은 날에도 꽃대궁에 스위치를 달아 백일홍을 껐다 켰다 할 수 있게 되었다
-<옛날 옛적 우리 고향 마을에 처음 전기가 들어올 무렵, 전문>
'전기'는 '유행'이다. '유행'에 흔들린 '자연'은 현재에 과거형으로 남는다. 그것은 '생각했다'는 부정적 인식의 종결어미에서 나온다. 시인은 과감히 자신의 주관적 인식을 피하고 듣고 그대로 쓴다는 객관적 입장으로 위장했다. 색색의 전기가 들어오는 아름다움이 날벌레 달려드는 전구와 융합됨으로써 그것은 삶의 잔잔한 일상을 담아낸다. 그러나 백일홍을 껐다 켰다 할 수 있게 되었지만, 우리는 왜,
과수원에 이르러, 우리는 쉬이 잊혔던
지난날 어떤 사소한 기억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것은 돌팔매처럼 먼 전선으로부터 날아왔다는 것
날아와선 꽃씨 주머니처럼 인정사정없이 터졌다는 것
그런데, 그때나 지금이나 세상은 아직 꽃밭이 아니어서 그걸 도로 집어던지기도 했다는 것
-<사과 중에>
꽃밭에 살고 있지 않는 걸까?
나는 거대하다
나는 천천히 먹고 잠자고 천천히 이동한다
벌써 나는 삼만 년째 석상(石像)이 되어가고 있다
나는 이미 오래전 사냥꾼들에게 그림자를 빼앗겼다
그들은 내 몸을 마구 파헤쳤다 내 눈앞에서
초원은 시들고 강과 호수는 사라져버렸다
그들의 배로 열찰로 군대로
내 살과 피를 조각내 운반해 갔다
그들은 내 몸을 쇠사슬로 묶었다
내 등에 그들의 의자가 놓여 있다
그들의 식탁과 사무실과 침대가 올라타 있다
그러나 보아라, 그들이 아무리 채찍을
휘둘러도 재촉해도 나는 굳세게
천천히 먹고 잠자고 천천히 이동한다
나는 삼만 년째 석상이 되어가고 있다
나는 거대하게 사라져간다
-<코끼리 전문>
그것은 거대하게 사라져간다는 사실 때문이다. 존재는 유행을 믿고 따라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유행은 매 순간 한 시점이 아니라 뫼비우스 띠처럼 맞물려 순환한다. 사라져가는 것은 인간의 문명에 있는 거대한 코끼리 뿐일까? 사냥감이 모두 사라지고 나면, 우리는 굶는 것일까?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정치적인 인간에게 우연이란 있을 수 없다. 그것은 모두 치밀하게 계획된 것이다. 사과도 민들레도, 코끼리도 사라졌다. 사라짐은 슬픔이지만, 그 슬픔은 우리가 아니어서 느끼는 것 뿐이다. 시를 보며 우리도 사라지는 존재자가 되지 않을까는 생각을 해본다.
자신의 삶에서 문물을 읽고 그것을 가볍게 터치하는 붓놀림이지만, 면밀히 들여다보면 우리는 시인이 몇 번씩 덧칠한 물자국을 보게 된다. 함부로 손대지 마시라. 당신이 그 풍경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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