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기생(妓生)은 원칙적으로 관기(官妓)를 일컫는 것이었다. 관청에 소속되어 활동을 했기 때문에 수령들이 바뀔 때마다 점고를 하고 관청의 행사에 동원되었다. 북쪽의 국경지대에서는 관기들이 무예를 익혀 사냥을 하기도 하고 의장병들처럼 사열을 하거나 관장들의 이취임 때 행렬을 인도하기도 했다. 제주도에서는 기녀들이 말을 타고 달리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녀들은 가무를 익혀 국가나 관청의 행사에서 가무를 공연하고 지배층의 흥을 돋우기 위해 술을 따르고 웃음을 팔았다.
기녀들은 가무와 기예를 익혀 나라에서 필요할 때에 봉사하던 여인들이었다. 제도적으로 관청에 소속되어 있었으나 신분은 천민이었다. 기생이 낳은 아들은 남자가 돌보아주지 않는 한 천민으로 살아야 했고 딸은 종모법에 따라 다시 기생이 되어야 했다.기생들이 천민의 신분을 벗어나는 것은 속전을 바치고 기적에서 빠져 나오는 방법과 권력을 갖고 있는 사대부들의 첩이 되는 것 뿐이었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많은 첩을 거느릴 수 있었는데 양가의 딸을 첩으로 삼으면 양첩, 기생을 첩으로 삼으면 기첩, 여종을 첩으로 삼으면 비첩이라고 불렀다.
조선의 기생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숫자가 존재하고 있었다. 여자로서 가장 천한 신분으로 살면서, 가장 화려한 삶을 살았다. 여자들이 학문과 예술을 하는 것을 금기시하던 조선시대에 어릴 때부터 학문과 금기서화, 그리고 가무를 익혀 남자들을 즐겁게 하던 집단이 기생이었다. 대부분의 관기는 교방(敎坊)에서 13~16세가 되면 관장이나 사대부들에게 순결을 바친다.
이십이 늦잖거든 십이세에 성인하니
어디 당한 예절인지 짐승과 일반이라
해주기생 명선은 한 남자를 12세에 강제로 몸속에 받아들이고 짐승 같은 짓이라고 통곡한다. 조혼 풍속이 있다고 해도 12세에서 16세의 어린 소녀들을 성을 향유하는 대상으로 삼는 것은 잔인한 일이다. 오죽하면 해주기생 명선이 짐승과 다를 바 없다는 기록을 남겼는가.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조선의 사대부들은 미성년자 성폭행범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기생들의 환경은 열악하다. 겉으로는 춤과 노래, 시와 술로 일생을 보내는 듯하지만 많은 남자들의 노리개로 일생을 살아야했다. 많은 남자들이 하룻밤 풋사랑을 나누고는 그녀들을 버렸다. 술과 무절제한 성생활로 인해 병이 생기고 덕지덕지 바른 분단장으로 인해 수은이나 납중독을 앓는 여자들도 있었다. 젊었을 때는 남자들이 비단과 패물로 환심을 사지만 늙으면 아무도 돌아보지 않아 비참하게 살아야 했다.
기생들은 말을 알아듣는 꽃이라고 하여 해어화(解語花), 길가의 버들가지와 담밑에 핀 꽃이라 누구나 꺾을 수 있다고 하여 노류장화(路柳墻花)라고 불렸다. 그러나 그녀들 중에는 학문이 뛰어난 여자들도 적지 않았다. 기생들 중에는 사대부들의 학문을 능가하는 기생들도 있어서 종종 허위와 위선으로 가득찬 사대부들을 조롱하기도 한다. 조선이 개국한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 재상들의 연회가 열렸다. 고려왕조의 대신들이 모두 조선왕조의 재상이 되어 축하를 하는 자리였다.
동쪽에서 밥을 먹고 서쪽에서 잠을 자는 것은 노류장화의 본분입니다. 왕(王)씨도 섬기고 이(李)씨도 섬기는 대감과는 유유상종(類類相從)이 아니겠습니까?
설중매가 재상들의 연회에 참석했을 때 한 재상이 ‘듣자니 기생들은 아침에는 동쪽에서 밥을 먹고 저녁에는 서쪽에서 잠을 잔다고(東家食西家宿) 하는데 오늘 밤 이 늙은이에게 수청을 드는 것이 어떻겠느냐?’ 하고 묻자 설중매가 매섭게 쏘아붙인 말이다. 기생은 이 남자 저 남자를 섬기지만 당신은 이씨도 섬기도 왕씨도 섬기니 같은 부류가 아니냐는 조롱인 것이다.
세조 때의 기생 초요갱은 여러 왕자들과 염문을 뿌렸다. 이에 세조 수양대군 일파가 금성대군을 역모로 몰기 위해 초요갱의 간통사건까지 탄핵했다.
초요갱은 금수(禽獸)와 다름이 없으므로 족히 책(責)할 것도 못되나 세종조에 새로 제정한 악무(樂舞)를 홀로 전습(傳習)하였고 다른 사람은 이를 아는 자가 드무니 고향으로 내칠 수가 없습니다.
대신들이 초요갱을 처벌하는 것을 반대했다. 초요갱은 세종조의 궁중 악무를 유일하게 전승하여 죄를 다스릴 수 없다는 것이다.
기생들은 많은 남자를 만난다. 양가의 여자들이 장옷, 소위 쓰개치마를 쓰고 다니고 내외가 심하여 남자와 여자들은 중간에 종을 두고서야 이야기를 할 정도로 엄격했던 조선시대에 남자들을 자유롭게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신분이 기생들이었다. 자연스럽게 사랑을 하게 되고 하룻밤 풋사랑으로밖에 생각하지 않는 남자들이 떠난 뒤에 그리워하면서 수절하게 된다. 기생이 수절을 하려고 하면 혹독한 벌을 받는다. 부령기생 영산옥은 서시랑을 위해 수절을 지키려고 하지만 부령도호부사 유상량에게 혹독한 벌을 받고 피눈물을 흘린다.
거문고와 ?른 퉁소 준비하고 기다릴게요.
꿩도 삶고 잉어회도 준비하겠어요.
좋은 술은 우리 집에 넘쳐난답니다.
이 시는 자신이 사랑하는 서시랑의 인척 김려에게 보내는 편지에 있는 것이다. 거문고와 퉁소를 준비하고 안주와 술까지 차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여인의 마음이 오롯이 드러나 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내는 시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서쪽 바닷가에 아름다운 사람 있으니
맑은 기운이 모여 선녀로 태어났구나
율곡 이이가 자신이 평생 동안 사랑하던 기생 유지에게 남긴 시다. 율곡은 유지가 12세 때 처음 만났다. 어린 동기를 차마 범할 수 없어서 마음으로만 사랑을 하다가 그녀가 성인이 되었을 때도 인연을 맺지 못한다. 율곡이 늙고 병들었을 때 다시 만났으나 율곡은 같은 방에 나란히 누워서도 동침을 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유지와 20년 가까운 프라토닉한 사랑을 유지사라는 시로 남긴다.
수놓은 옷을 입고 징치고 노래 부르는 화살 맨 기생들이
준마를 타고 말을 채찍질하며 성으로 들어온다.
의주와 제주의 기생들은 말을 잘 탈뿐 아니라 무예에도 능했다. 기생들은 시와 문장, 가무에만 능한 것이 아니라 변경지방에서는 무예에도 능하여 사냥을 하고 군대처럼 사열을 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논개는 왜장을 끌어안고 진주 남강으로 뛰어들어 의기가 되었고 제주 기생 만덕은 흉년에 자신의 부를 모두 구휼하는데 사용하여 정조로부터 내의녀에 임명되기도 했다.
누가 진흙 속의 꽃이
벌나비에 짓밟히지 않았음을 알아주랴
동래부사 송상현의 첩이었던 함흥 기생 김섬은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갔으나 굳게 절개를 지켰을 뿐 아니라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부인을 비롯하여 일본 여인들에게 예절과 글을 가르치고 돌아와 명성을 떨쳤다. 그러나 자신이 일본인들에게 짓밟히지 않았다는 사실을 누가 알아주랴 하고 한탄하는 시를 남긴다.
황진이는 이생과 함께 금강산 곳곳을 구경했다. 양식이 떨어지면 구걸을 하고 굶기도 했다. 비가 오면 맞고 바람이 불면 피했다. 산을 오르다가 지치면 바위 위에 누워서 하늘에 구름이 흘러가는 것을 보면서 쉬었다. 때때로 중들에게 몸을 팔아 양식을 얻기도 했다. 이생은 황진이가 중들에게 한 끼의 끼니를 위해 몸을 팔아도 탓하지 않았다. 산 깊고 골이 깊은 곳에서는 소리를 뽑고, 선녀담에서는 목욕을 하고 호젓한 곳에서는 춤을 추었다.
황진이는 조선 최고의 기생이라고 할 수 있지만 가장 자유롭게 세상을 산 여인이다. 이생이라는 재상 아들과 함께 중에게 몸을 팔면서 금강산, 태백산, 지리산을 구경했고 계약결혼도 했다. 관찰사를 모신 나주의 연회에서는 저고리를 벗어 이를 잡은 뒤에 거문고를 타면서 노래를 불러 사대부들을 놀라게 했다.
조선의 기생들을 살피는 것은 조선의 여성사를 살피는 것이다. 조선의 기생들은 지배층인 사대부와 가까우면서도 천한 신분이었기 때문에 질곡의 삶을 살아온 조선의 여성들을 대변한다. 살인사건, 연애사건, 16인의 왕후들에 이어 조선의 기생들을 통해 독자들은 조선 역사의 또 다른 면을 살필 수 있을 것이다.
『조선을 뒤흔든 16인의 기생』들에게도 독자들의 변함없는 성원을 바란다.
옛사람들은 기생을 왜 하필이면 길가에 핀 꽃이라고 했을까. 노류장화라는 그 말에는 기생을 하찮게 생각하던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멸시와 밤마다 술과 웃음을 팔던 여인들의 가슴 저린 애환이 함축되어 있다. 기생들은 유일한 연예인이면서 인간적인 대우를 받지 못한 채 평생을 살았다. 어머니가 기생이었기 때문에 딸도 기생이 되어야 했던 숙명과 같은 삶, 기생의 굴레를 벗어던지기 위해 몸부림을 쳤어도 남자들이 만든 신분의 족쇄는 풀 수 없었다.
기생들은 자신들의 비참한 처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혼이 실린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던 것이 아닐까. 예술의 경지에 이르려면 가슴 속에 켜켜이 쌓인 한까지 승화시켜야 한다. 황진이나 매창처럼 당당한 기생은 손가락 꼽을 정도고 대부분의 기생들은 이름도 없이 피었다가 스러졌다. 저자는 이 책을 쓰면서 귓전을 암암하게 울리는 그녀들의 웃음소리와 탄식, 슬픈 노래가락과 혼을 실은 춤사위가 떠올라 내내 가슴이 아팠다.
조선을 뒤흔든 기생들 이야기를 쓰면서 그들의 발자취를 찾아 전국을 돌아다녔다. 퇴계 이황과 단양기생 두향의 아름다운 사랑을 찾아 안동 도산서원을 찾았을 때는 때마침 두향의 맑은 영혼과 같은 매화가 활짝 피어 있었다. 백매는 도산서원의 너른 바깥마당에 피어 있었고 홍매는 서원 안쪽에 피어 있었다. 퇴계 이황이 살던 생가에도 매화가 잔뜩 피어 매화를 매형이라고 부르던 퇴계 이황의 군자다운 고결한 성품을 엿볼 수 있었다. 퇴계 이황과 두향이 처음 만난 사인암은 천년 세월 속에서도 의연했고 두향이 꽃 한 가지 꺾어들고 부르는 노랫소리가 금방이라떵 들려올 것 같아 나그네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사인암을 찾아갔을 때 기암절벽 위와 싁우에는 짙푸른 녹음이 우거져 있고 사인암 아래로는 내린천이 옥류처럼 흐르고 있었다.
냇가에 앉아 사인암을 바라보다가 문득 고개를 숙여 냇물을 들여다보자 물고기들이 유유자적하여 인걸은 가도 산천은 의구하다는 옛말이 새삼스럽게 가슴을 적셔 왔다.
안동서원은 두 번, 퇴계 이황을 사랑하여 두향이 뛰어내린 강선대는 세 번을 찾아갔다. 강선대와 두향의 무덤은 단양 장회나루에서 유람선을 타야 바라볼 수 있었다. 4백 년 전 유림의 종사인 퇴계 이황에게 애틋한 사랑을 바쳤던 두향의 무덤을 유람선에서 바라보자 그녀의 얼굴이 가뭇하게 떠오르는 것 같았다.
두향은 얼마나 절절하게 이황을 사랑했던 것일까.
사랑이 가슴에 사무치면 강선대 높은 바위 위에서 꽃처럼 몸을 던질 수 있는 것일까.
두향을 삼켰던 강물은 오늘도 유장하게 흐르고 단양팔경을 오가는 유람선은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 된다.
두향이 몸을 던졌기 때문에 신선이 내려와 놀았다는 강선대가 유명해진 것인가. 강선대가 유명하여 두향이 그 곳에서 뛰어내린 것인가. 선인들의 아름답고 슬픈 전설이 깃든 강선대는 오늘도 강물이 도도하게 흐르고 있다.
율곡 이이와 유지의 사랑은 안타깝다. 어린 동기였던 유지를 만나 평생을 그리워하면서도 손 한 번 잡지 않았던 율곡 이이, 죽음을 앞둔 말년에 이르러서야 남긴 유지사는 순애보이자 그의 가슴 저린 회한이 절절하게 드러나 있다. 어떻게 수십 년 동안 인연을 맺었으면서도 육체적인 사랑을 나누지 않았을까. 현대를 사는 나의 생각으로는 도무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다.
경기도 파주에 있는 화석정은 율곡 이이가 벼슬에서 물러나 여생을 보내면서 학문을 논하고 이(理)를 구(究)하던 곳이다. 정자는 장단 쪽을 향하고 있는데 마치 율곡 이이가 황주 기생 유지를 그리워하면서 보낸 장소처럼 느껴졌다. 그의 증조부 이명신이 건축했는데 울곡 이이가 증수했다.
내가 화석정을 찾은 것은 4월의 어느 날, 석양이 붉게 내려앉던 저녁 무렵이었다.
율곡 이이와 기생 유지는 임진강 건너 강촌 어느 절에서 밤을 새웠다. 유지사에 의하면 병풍도 치지 않고 나란히 누워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조선시대 남녀가 방안에 나란히 누워 있을 수 있는 것일까. 그러나 유지가 기생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율곡 이이는 무르익어 농염하게 아름다운 여인을 옆에 두고 늙고 병들어 동침을 하지 않았노라고 했다. 그날의 정경은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율곡 이이의 나이는 49세, 스스로 늙고 쇠잔했다고 탄식을 했으니 지나친 학문 연마로 병마에 시달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에 비하면 유지는 30대의 농염한 여인, 지독한 염기를 뿜었을 것이다.
율곡 이이에게 그 밤은 고통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랑의 고통은 달콤한 것이다. 평생을 살면서 진정한 사랑 한 번 못했다면 얼마나 삶이 공허했겠는가.
율곡 이이와 유지는 밤새 무슨 이야기를 나눈 것일까. 율곡 이이가 임진강 강언덕에 화석정을 증수한 것은 선녀처럼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술회한 유지를 그리워했기 때문인가. 4백여년 전에 살았던 선인들의 마음속을 누가 헤아릴 수 있겠는가. 강변을 서성이면서 그들의 사랑을 되살려보는 나그네의 기슴 속에는 어느 사이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
동래부사 송상현의 기첩 김섬은 대중들에게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포로로 끌려가 토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일본 고위관리의 부인들에게 학문과 예의를 가르치고 돌아온 그녀의 절개는 대나무처럼 곧기만 하다. 청주 충렬사 뒷산에 남편 송상현의 무덤 앞에 순절한 또 다른 첩 이양녀와 함께 나란히 묻혀 있다.
김섬의 무덤을 찾아갔던 날은 날씨가 후덥지근하던 초여름이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가로수 길이라는 0번국도, 청주에서 조치원 방향으로 달리다가 송상현의 충렬사를 찾아가 참배를 하고 뒷산에 있는 김섬의 무덤을 찾아갔다.
신도비 옆에 가파른 계단이 193개나 있어서 땀을 흘리며 올라가자 너른 공터의 왼쪽에 이양녀, 오른쪽에는 김섬, 뒤에는 송상현의 묘소가 있었다. 참배를 하고 나자 만감이 교차했다.
4백년 전 이들이 나눈 사랑은 어떤 색감을 가지고 있었을까. 김섬은 사랑하는 남자 앞에서 어떤 웃음을 지었을까.
녹의홍상에 눈웃음치는 가려한 모습이 떠오른다. 사랑을 얻기 위해 고운 목청을 뽑아 노래 한가락을 부르고 바람에 날리는 꽃잎인 양 너울너울 춤을 추는 그녀의 아리따운 춤사위가 아련하게 떠오른다.
김섬은 함흥 출신의 기생이다. 지금은 역사의 주인공이 되어 지아비의 무덤 앞에 누워 사랑을 속삭이고 있지만 그녀의 고단한 인생 역정이 눈에 보일 듯이 선하게 떠올랐다.
민제인과 성주 기생 성산월이 처음 만난 곳은 남대문 밖의 한 언덕, 후암동 쯤 될 것으로 추정되지만 옛날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후암동을 몇 바뀌 돌다가 선술집에 들어가 소주를 마시면서 성산월이 운명처럼 민제인을 만나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술집에서 나올 때는 초여름비가 내리고 있었다.
민제인과 성산월을 연결시켜 준 것은 백마강부, 민제인이 백마강부를 지은 낙화암과 백마강을 돌아보면서 왕조의 흥망성쇠와 인생의 무상함을 함께 느낄 수 있었다.
북쪽에 황진이가 있다면 남쪽에는 매창이 있다. 부안 명기 매창은 시기로 유명하여 지금도 수십편의 시가 남아 있다. 전라도 부안에 이르자 그녀를 기리기 위해 매창공원이 만들어져 있고 무덤은 공원 안에 잘 가꾸어져 있었다. 당대의 최고 시인인 유희경, 혁명적 사상을 가졌던 허균, 인조반정의 1등공신인 이귀와 불꽃 같은 사랑을 나누었던 매창의 흔적을 찾는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부안을 찾아갔던 날은 매창의 눈물 같은 비가 내리고 있었고 ‘이화우 흩날릴제….’ 운운하는 시비 앞에 이르자 금방이라도 하얀 배꽃이 자욱하게 흩날릴 것 같고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하는 매창의 여심이 가슴을 촉촉하게 적시는 것 같았다.
세월은 가도 사랑은 남는 것.
37세의 생애는 오래 전에 끝났으나 그녀가 지은 아름다운 싯귀는 후인의 가슴 속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고 살아 있을 것이다. 매창공원에 가득한 시비와 묘소를 돌아보고 발길을 돌렸으나 차마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진주에는 의기 논개가 있다. 촉석루는 영남제일루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는데 유유히 흐르는 남강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촉석루 바로 아래 왜장을 끌어안고 뛰어내린 의암이 있다. 촉석루에 이르렀을 때 남강에는 배 한 척이 떠 있었다. 마치 그 옛날 논개가 사랑하는 남자 최경회와 배를 타고 밀어를 나누었을 것 같은 풍경이 펼쳐져 있어서 나그네의 눈을 황홀하게 했다.
논개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는 의기사를 참배하고 의암으로 내려가 본다.
논개가 왜장을 끌어안고 몸을 던진 곳이 여기였구나.
푸른 물이 유장하게 흐르는 남강을 내려다보자 가슴이 저렸다.
초요갱은 박연이 만든 궁중악의 유일한 전승자다. 나라에서 제일로 꼽는 예기였기 때문에 과거에 장원급제한 선비조차 눈아래로 보았다. 그녀의 이름은 실록에까지 올라 있지만 어디 출신인지 생몰년이 언제인지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정재를 바치는 궁중악의 대가였기 때문에 경복궁에서 자주 공연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경회루를 찾아갔다.
경회루는 언제 보아도 아름답다.
연못에 휘휘 늘어진 수양버들이며 물속에 잠긴 누각의 모습은 마치 하늘에 떠 있는 누각 같았다.
저 누각 어디쯤에서 초요갱은 세조에게 정재를 바쳤으리라.
경회루 2층 누각은 텅 비어 있었으나 포구락을 추는 그녀의 춤사위가 눈에 어리는 것 같았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자 초요갱을 비롯하여 정재를 바치는 기녀들의 화사한 웃음소리가 환청처럼 들린다.
공주에는 이름없는 기생의 눈물이 남아 있다. 그녀는 미모가 뛰어나지도 않고 출중한 기예를 갖고 있지 않았던 듯하다. 그녀의 고단한 업무는 오로지 공주를 오가는 사대부들에게 하루도 거르지 않고 수청을 바치는 것뿐이었다.
공주 동헌 앞에 이르자 사대부들의 악취가 풍기는 것 같고 기생의 또 다른 측면을 보는 것 같았다.
조선을 뒤흔든 16인의 기생을 쓰기 위해 많은 자료를 살폈다. 소수록을 보았을 때 기생들의 눈물과 한숨을 보았고 이능화가 펴낸 조선해어화사 ‘갈보종류총괄’의 사진을 보았을 때 기생의 요염을 보았다.
아름답구나.
낡은 사진첩의 기생들은 고혼이 되었으나 빼어난 자태는 나를 설레게 했다.
사실 기생이라는 존재는 엄격한 유교문화가 일탈하고 즐길 수 있는 합법적 공간으로서의 역할이 가장 크다고 할 것이다.
가희아는 궁중의 연회에 참석하는 상기(上妓)였다. 미색이 뛰어나고 노래와 춤을 잘 춰 왕과 대신들의 사랑을 받았다. 상기는 기생들 중에 가장 뛰어난 자들이다. 상기는 궁중에 소속되어 연회가 벌어질 때마다 정재(呈才 기예를 바침. 공연하는 일)를 해야 했고, 평소에는 노래와 춤을 연습하면서 대궐 밖에서 지냈다. 궁중 연회에 참여하니 미모도 나라에서 가장 뛰어나고 가무도 출중해야 한다. 지금으로 말하면 연예인이나 다를 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