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로 또 같이’ - 다른 대안은 없다!
대기업 임원을 하고 퇴직한 선배 이야기다. 몇 년 전 선배는 아주 심각한 얼굴로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가슴이 답답하다며 이야기를 꺼냈다. 그의 이야기는 이렇다. 은퇴가 다가오자 선배는 아내에게 갑자기 미안해졌다. 30여 년 동안 오로지 회사 일만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어떻게 컸는지 기억조차 없다. 그 아이들이 이제 대학도 졸업하고, 번듯한 직장을 다니며 제몫은 너끈히 하고 살고 있는 것은 전적으로 아내 덕분이다. 선배는 은퇴하면 아내에 대한 고마움을 어떻게든 갚으리라 생각했다.
드디어 은퇴했다. 많이 서운했지만 직장인으로서는 매우 모범적인 삶이었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후배들도 그를 존경했다. 이제 아내에게만 잘하면 된다. 은퇴하자마자, 선배는 아내와 크루즈 여행을 떠났다. 유럽에서 출발하는 크루즈를 타야 폼 난다는 친구들의 경험담을 듣고, 덴마크의 어느 항구로 날아가 배를 탔다. 신혼여행 이후로 처음인 아내와의 여행은 너무나 즐거웠다.
아내와의 골프도 즐겼다. 아무리 쳐도 늘지 않는 아내의 골프실력이지만, 뒤에서 죽어라 ‘나이샷’을 외쳤다. 일요일이면 아내와 팔짱끼고 교회도 갔다. 내내 꼬박꼬박 졸기는 했지만, 옆의 남편을 사방에 자랑하는 아내의 표정을 보며 꾹 참고 견뎠다. 백화점에서는 화장실에 간 아내의 가방을 들고 기다리기도 했다. 비슷한 자세로 기다리는 남자들과 웃으며 눈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이런 쪽팔림이야말로 진짜 행복 아니겠어?’라는 이심전심이었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아침이었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아내가 쭈뼛거리며 어렵게 이야기를 꺼냈다.
“이제 좀 나가 놀 수 없어?”
어느 은퇴자의 슬픈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갑자기 너무 오래 살게 되었기 때문이다. 수십 년 전만 하더라도 은퇴하면 바로 죽었다. 은퇴한 남편과 아내가 부대끼며 사는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그저 행복에 겨운 투정이었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은퇴한 후에도 30년은 기본이다. 이제 ‘새로운 빙하기가 닥치거나 우주인의 침공이 없다면’ 누구나 100세까지 살 수 있게 되었다. 20, 30대에 결혼한 아내, 남편과 100살까지 살아야한다는 이야기다. 부부가 50년만 함께 살아도 기적 같은 일이라며 ‘금혼식’으로 축하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 한 남자, 한 여자와 최소 70년은 살아야 한다. 도대체 이게 가능하기는 한 걸까?
오늘날의 ‘일부일처제’는 평균수명이 채 50세도 안 되던 시대의 유물이다. 평균수명 50세 시대에 만들어진 ‘가치’ ‘윤리’ ‘도덕’이 ‘호모 헌드레드(Homo Hundred)’ 시대에도 아무 문제없이 유지될 수 있으리라는 이 근거 희박한 믿음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최소한의 ‘연금’만 확보되면 은퇴 후의 삶은 아무 걱정 없을 것이라는 이 황당한 신념은 도대체 누가 퍼뜨린 것일까? 그렇다고 일부일처제를 깰 수는 없는 일이다. 인류가 발명해낸 가장 합리적인 제도인 일부일처제의 대안은 결코 없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돈 많은 부자나 장동건, 김태희 같은 이가 여자, 혹은 남자를 죄다 차지해도 되는 세상을 당신은 받아들일 수 있는가? 그런 의미에서 비와 김태희의 결혼은 진정 축하해줄만 한 일이다. 아무리 잘나도 고작 하나씩만 차지할 수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졸혼(卒婚)’은 100세 시대에 일부일처제가 유지될 수 있는 몇 개 안되는 대안 중 하나다. ‘부부 관계’를 유지하며, 각자의 삶을 살아보자는 이야기다. 그룹 활동을 하면서도 수시로 솔로 활동을 하는 요즘의 ‘아이돌’처럼, 부부 관계도 함께 할 수 있는 것은 함께 하고, 추구하고 싶은 삶의 내용은 각자 자유롭게 추구하자는 ‘따로 또 같이’의 철학이다.
『졸혼 시대 - 낡은 결혼을 졸업할 시간』의 저자 스기야마 유미코는 ‘졸혼’의 가능성을 아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졸혼’ 개념을 처음 만들어낸 작가답게 서로를 구속하지 않는 ‘열린 부부관계’를 다양한 방식으로 탐색한다. 글도 참 잘 쓴다. 그저 남의 사례를 객관적으로(즉, 지루하게) 나열하지 않는다. 작가 자신의 구체적인 경험과 고민으로 다른 부부의 관계를 관찰한다. 그래서 재미있다. 그래서 더 생각하며 읽게 된다.
젊은 남자들부터 읽어야 한다. 다 늙어서 고민해봐야 답이 전혀 안 나오기 때문이다. ‘졸혼’은 추구하는 삶의 콘텐츠가 있어야 가능한 방식이다. 평생 추구할 수 있는 삶의 내용이 없다면 ‘졸혼’은 늙은 남자에게 아주 치명적이다. 젊은 여자들도 꼭 읽어야한다. 아이들 교육, 남편의 승진은 아주 잠시의 고민이기 때문이다. 이 바쁜 시기가 지나면 아주 오랫동안 한가하고, 여유로운 시간이 온다. 내 삶의 내용은 오래 생각하고, 미리미리 준비해야 가능하다. 추구하는 삶의 내용이 있는 여인은 아무리 늙어도 아름다운 법이다. 아, 은퇴 후 ‘젖은 낙엽’처럼 딱 붙어 떨어지지 않는 남편을 피하려면 남편과 아무 관계없는 자신만의 삶이 있다는 것을 미리부터 경고해야 하는 까닭도 있다.
착각하지 말자. ‘졸혼’은 중년부부의 권태로운 삶에 대한 한가로운 이야기가 절대 아니다. ‘평생 추구하는 삶의 가치가 있는가’ ‘가족이나 직장으로부터 자유로운 내 삶의 콘텐츠가 있는가’에 관한 질문이다. 평균수명 100세 시대의 행복과 만족은 결코 거저 주어지는 게 아니다.
아무튼, 오랜만에 흥미로운 일본 책을 만났다.
- 김정운 (문화심리학자, 여러 가지문제연구소장)
졸혼할 것인가, 졸도할 것인가?
한 프로그램에서 혼자서도 우울하지 않게 사는 법에 대해 강연을 해달라는 요청이 왔다. 말하자면 ‘혼자 살면 우울하다’는 전제가 깔린 주제이리라. 강연을 구상하며 내 머릿속을 떠돈 생각은 이것이었다. ‘고통스럽게 같이 사는 것이 더 힘든가, 외롭게 홀로 사는 것이 더 고통스러운가?’ 어느 것이나 지옥이겠으나, 이런 이분법은 마구 파고드는 인생의 결합과 결별 사이, 그 어느 지점에서 경험하는 고통과 번민들의 시작점일 수 있다.
일본 사회와 우리 사회를 깜짝 놀라게 한 『졸혼 시대』는 짬뽕과 짜장면 사이의 갈등을 조화롭게 녹여낸 짬짜면의 등장 같다. 가장 자연스러우나 가장 혁명적으로, 일부일처제 유지와 파뿌리 노화 약정에 일생을 걸은 인류에게 한 줄기 빛으로 다가온다.
동서양의 심리를 움직이는 두 개의 코드는 죄책감과 수치심이다. 죄책감은 주로 서양의 코드로, 수치심은 동양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죄책감은 개인의 양심에서 출발하기에 죄를 인지한 순간부터 스스로를 움츠리게 하는 반면, 수치심은 타인에게 들키는 순간부터 숨이 막혀오기 시작한다. 우리에게 이혼은 죄책감과 수치심 모두를 오물처럼 뒤집어쓰게 하는 문화적 반역이다. 이혼을 생각하는 자의 눈에 밟히는 자식들에게는 죄책감으로, 가문의 시선에서는 수치심으로, 상관도 없는 비혈족들에게는 관계 두절과 손가락질이라는 당황으로 이혼은 개인을 장악한다. 더구나 노년의 이혼이랴!
인생에서 통합성이라는 마지막 숙제를 해가야 할 노년, 그 끝나가는 중년의 자락에서 검은색으로 물들여야 청춘을 얻는 노년의 일상에 이혼은 곧 지옥이다. 다 큰 자식들에 대한 죄책으로, 함께 늙어가며 여전히 고집스런 시댁과 친정에 대한 수치로, 버킷리스트에 들어 있는 친구들에게 함구해야 할 비밀과 관계철회로 노년의 이혼자는 사회적 범죄자처럼 다루어진다.
나는 졸혼을 ‘문화적 꼼수’라고 부르고 ‘현대적 부부 생존 전략’이라고도 부른다. 법적인 관계 속에서 자식들에게 죄책을 지우고, 가문의 눈치를 피하고, 친구들에게는 세련된 선택을 한 결혼문화 선두주자처럼 보이니 말이다. 그 속이야 무엇이든, ‘여전히’ 부부인 졸혼 커플에게 졸혼은 단어만으로도 숱한 해방을 경험하게 한다.
졸혼을 ‘이혼인 듯 이혼 아닌 이혼 같은 너’라고 부를 것이다. 그러나 졸혼의 목적은 그야말로 결혼에 대한 보수적 유지이자 배우자에 대한 상식적 자유를 제공하는 선택이다. 졸혼을 권하는지 묻는 이에게 나는 『졸혼 시대』를 권한다. 결혼이 선택이듯 졸혼도 선택이니, 고민하라. 졸혼을 고민하며 결혼의 참즙을 다시 맛보게 되리니.
이호선 (숭실사이버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