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위험사회에 있어서 형법의 팽창현상*
Ⅰ. 논의 배경
근대 이후 산업화와 과학기술의 발전은 인류에게 무한한 풍요와 진보를 약속하는 듯 했다. 하지만 오늘날의 우리는 오존층의 파괴, 대기오염의 증가, 스모그 현상, 하천과 바다에서 유해물질의 증가 그리고 유전공학의 발전에 따른 생명의 유전자적 조작 등 인류의 전체 삶의 기반을 위협하는 “새로운 대량위험”(neue Großrisiken)에 대한 뉴스를 거의 매일 접한다. 1986년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Ulrich Beck)은 후기산업사회의 급격한 발전의 어두운 측면을 지적하면서 “위험사회”(Risikogesellschaft)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제시하였다. 이 개념은 사회학, 철학 등의 영역에서뿐만 아니라 이제는 형법학의 영역에서도 일반적으로 수용되고 있다. 구체적으로 80년대 후반부터 독일형법학계에서는 위험사회라는 개념으로부터 “위험형법”(Risikostrafrecht)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출하여 형법이 위험사회에서 발생하는 새로운 대량위험에 대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에 관한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국내 형법학계에서도 1990년대 후반에 들어 경제형법, 환경형법, 마약형법, 정보형법 등의 영역에서 이러한 개념들이 소개되었다. 특히 2003년에는 한국비교형사법학회에서 “위험사회와 형사법”이라는 주제로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한 바 있다.
형법학에서 위험사회 내지 위험형법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논의하고자 하는 근본문제는 후기산업사회의 발전에 따라 사회현상으로부터 야기되는 새로운 대량위험을 해소하거나 차단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과연 형법이 적합한 수단인가이다. 위험사회란 객관적 측면에서 새로운 대량위험의 상존과 주관적 측면에서 불안의 일상화로 특징지어지기 때문에, 이러한 새로운 대량위험의 제거와 개인의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정치인이나 형사입법자들은 손쉽고 확실한 문제해결방안으로서 형법의 조기투입이나 형벌의 상향조정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형법의 조기투입과 관련하여 위험사회에서 형법은 새로운 법익개념의 도입과 기존 법익개념의 완화, 추상적 위험범의 확대 및 상징형법의 도입으로 새로운 대량위험의 제거와 미래의 안전을 보장하여 위험사회가 아닌 “안전사회”(Sicherheitsgesellschaft) 구축에 기여하고자 한다. 그 결과 형법은 자신의 영역을 날로 확대해가고 있으며, 소위 “형법의 팽창현상”(Expansionsphanomen des Strafrechts)이 발생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형법의 팽창현상은 형사입법자와 일반 시민의 기대와는 달리 전통적·자유주의적 법치국가형법의 원칙인 죄형법정주의, 책임원칙, 비례성원칙, 보충성원칙 등을 위협하여 “현대형법의 위기”(Krise des mordernen Strafrechts)를 초래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아래에서는 위험사회에 있어 현대형법의 위기를 초래하고 있는 형법의 팽창현상에 대한 원인을 분석하고(Ⅱ), 그에 따른 형법기능의 변화를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Ⅲ). 나아가 형법의 팽창현상에 따른 현대형법의 위기와 이를 극복하기 위해 지금까지 제시된 대안을 비판적 시각에서 고찰하고자 한다(Ⅳ).
Ⅱ. 형법 팽창현상의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일찍이 칼 빈딩(Karl Binding)은 “형법의 단편적 성격”(fragmentarischer Charakter des Strafrechts)이라는 표현으로 사회통제 전체체계에서 형법이 담당하는 질서유지 과제의 몫은 사회규범과 형법 이외의 다른 법규범의 몫을 염두에 둘 때 극히 적은 일부분임을 언급했다. 이는 형법이 사회의 모든 질서유지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 오히려 특별히 가벌성이 인정되는 제한된 분야에서 법익보호임무를 담당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오늘날 형사입법자는 이러한 형법의 근본성격을 망각한 채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새로운 범죄(예컨대 경제범죄, 환경범죄, 마약범죄, 조직범죄 및 테러범죄)와 새로운 대량위험(예컨대 원자적, 화학적, 생태적 그리고 유전공학적 기술들에 기초한 위험)을 예방하고자 형법의 영역을 날로 확대하고 있다. 이러한 형법의 팽창현상에 대한 근본원인으로 크게 위험사회에 있어 새로운 대량위험의 출현, 사회의 불안감 증가 및 수동적 사회집단의 증가 등을 언급할 수 있다.
1. 위험사회에 있어 새로운 대량위험의 출현
우선 형법의 팽창현상에 대한 원인으로 위험사회에 있어 새로운 대량위험의 출현을 들 수 있다. 1986년 벡의 “위험사회 -새로운 근대(성)를 향하여-”라는 저술이 출간된 이래로 위험사회라는 개념은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후기산업사회를 표현하는 유행어가 되었다. 현대 후기산업사회에서 과학기술은 지금까지 인류역사상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급속하게 발전하고 있다. 이러한 급속한 과학기술의 발전은 개개인의 복지향상과 직접적인 관쎷을 맺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러나 득이 있으면 실이 있듯이 이러한 과학기술의 긍정적인 영향과 더불어 발생하는 부정적인 영향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2003년 2월 18일 대구에서 발생한 지하철 참사는 과학기술이 가져다주는 편리함의 이면에 엄청난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이다. 이러한 교통기술발전에 따른 재해 이외에도 인위적으로 생긴 원자적, 화학적, 생태적 그리고 유전공학적 위험과 같은 새로운 대량위험이 위험사회에서 새롭게 출현하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대량위험은 이미 크리스토프 라우(Christoph Lau)가 주장했듯이 개인 혹은 기관의 결정과 작위 내지 부작위에 기인하지만, 더 이상 자연발생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가항력적으로 닥치는 것으로 표현된다. 또한 새로운 대량위험은 일반적으로 발생 가능성, 경제적 이용가치 및 그에 대한 비용 등에 따라 계상된다. 다만 그 위험의 원인, 종류 및 범위 그리고 위험에 따르는 피해의 비교가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기존의 위험과 구별된다. 이처럼 현대 후기산업사회가 가져온 엄청난 과학기술의 발전은 대형의 불명확한 새로운 대량위험을 동반했다. 이 새로운 대량위험은 인류전체의 생존을 위협할 정도의 엄청난 파괴의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위험사회에 있어 새로운 대량위험의 출현이 형법에서 갖는 의미를 살펴보면, 우선 급속한 과학기술의 발달은 전통적인 범죄영역에서 범죄구성요건을 고의로 실현했던 행위자에게 엄청나고 중대한 손해결과를 초래케 하는 새로운 기술을 손에 쥐어줬음을 의미한다. 인터넷상에서 내지 인터넷을 통해 행해지고 있는 컴퓨터범죄가 대표적 예이다. 또한 과학기술의 발전은 새로운 형태의 범죄출현을 용이하게 한다. 이에 대한 예로는 국제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조직범죄와 테러범죄를 언급할 수 있다. 이는 의심할 여지없이 국가와 일반 시민에 대한 새로운 위험으로 다가오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아 새로운 기술발달의 결과는 형법에 있어 고의범이 아닌 미필적 고의범 내지 과실범의 중요성을 증대시키고 있다. 여기서 “기술적 결함”(technische Fehler)으로 인해 초래되는 손해가 주요한 문제로 등장한다. 즉 기술적 결함을 형법적으로 중요한 위험의 영역으로 포함시킬 것인지 아니면 계속해서 “허용된 위험”(erlaubtes Risiko)의 영역으로 포함시킬 것인지에 대한 보다 명확한 기준을 설정해야할 필요성이 지속적으로 제기된다.
또한 현대 후기산업사회는 벡이 주장한 바와 같이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새로운 대량위험이 지배하는 위험사회로 불리어 질 수도 있지만 그밖에도 근대 산업사회와 구별되는 여러 특징들을 가진다. 그 특징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극도의 복잡성”을 갖는 사회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복잡성 때문에 현대 후기산업사회는 타인과의 협동과 기능적 분업을 필요로 한다. 그 결과 개별적 상호행위가 지금까지의 어느 사회보다 중요시되고 있다. 즉 개별 산업조직체 내부에서 세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상호관계는 업무자 상호간의 의존성을 현저히 증대시키고 있다. 이러한 상호관계 중 어느 일부가 깨어졌을 경우 엄청난 손해발생을 초래할 개연성이 증대된다. 또한 이렇게 증대된 상호의존성은 개개인의 법익불가침성이 더욱더 광범위하게 위험(Risiko)을 성공적으로 통제하는 제3자의 행위에 의존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바꾸어 말하면 개별 산업조직체는 더 이상 개별 업무자 1인에 의해 자율적으로 작동되는 것이 아니라 업무자 상호간에 안전기능의 지속적인 인도와 인수라고 하는 상호현상에 의해 작동된다. 이는 곧 형법에 있어 작위범 뿐만 아니라 부작위범에 대한 적용범위가 이러한 영역으로까지 확대될 수 있을 의미한다. 나아가 부작위 도그마틱의 증가된 의미는 다시 객관적 귀속체계의 내부에서 재 반영되고 있다.
이렇게 위험사회에 있어 새로운 대량위험의 출현과 후기산업사회의 복잡성은 형법에 있어 고의범이 아닌 미필적 고의범, 과실범 그리고 부작위범의 중요성을 증대시킴으로써 그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2. 사회의 불안감 증가
앞서 언급한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른 새로운 대량위험의 출현이라는 객관적 측면도 중요하지만 이로 인한 사회구성원의 불안감과 두려움이 증가하는 주관적 측면이 더욱더 큰 의미를 획득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으로부터 현재 후기산업사회를 위험사회가 아닌 “불안전사회”(Unsicherheitsgesellschaft) 또는 “두려움의 사회”(Angstgesellschaft)라고도 정의할 수 있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당연히 기술적이든 비기술적이든 새로운 대량위험이 상존하고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불안감이 하나의 일반적인 감정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나아가 선과 악 그리고 신뢰할 가치가 있는 것에 대한 결정을 가능케 하는 명확한 기준이 없거나, 반대로 이에 대한 과잉정보를 갖게 하는 사회의 복잡몼은 의심, 불확실성, 두려움 그리고 불안감을 초래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된다. 더욱 중요한 것은 통제하기 곤란하거나 통제 불가능한 위험에 대해 일반시민이 느끼는 이와 같은 불확실성, 두려움 그리고 불안감의 크기가 어떠한 객관적인 잣대로도 정확하게 측정될 수 없다는데 있다. 또한 새로운 대량위험의 출현은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현저하게 감소된 자연적 위험(예컨대 자연재해 내지 전염병과 같은 질병에 의한 손해)을 상쇄하고도 남는다. 그러므로 개별적인 측면에서는 서로 상이하지만 전체적인 측면에서 보면 일반 시민이 지각하는 주관적 불안감은 분명 객관적인 불안감을 능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범죄발생에 의해 야기되는 일반 시민의 불안감과 그에 따른 사회 불안정에 대해 적절히 반응해야 하는 것이 형법의 임무라고 할 때 형법의 측면에서도 안전보장의 요구를 전적으로 회피할 수만은 없다. 즉 불안전사회에서 안전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기 때문에 일반시민은 국가가 이러한 욕구를 충족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때 국가와 형사입법자는 이러한 불안감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경찰법에서가 아니라 형법에서 찾고자 한다. 그 결과 전통적·자유주의적 법치국가형법에서 추구되고 있는 형법의 단편적 성격을 간과한 채 불안감으로부터 발생하는 두려움을 제거할 수 있을 정도까지 형법적 보호를 확대할 것을 요구한다. 실제로 환경, 경제, 정치적 부패, 마약, 성희롱, 성매매, 조직폭력 그리고 가정내 폭력 등의 영역에서 비범죄화가 아닌 신범죄화의 요구가 날로 증대하고 있다.
3. 수동적 사회집단의 증가
현대 후기산업사회에서는 점차 일반 시민의 복지개념이 중요시되었고, 이러한 측면에서 “복지국가사회”(Gesellschaft des Wohlfahrtsstaates)라고 하는 사회모델이 새롭게 주목을 끌고 있다. 이러한 복지국가사회에서는 더욱더 수동적 사회집단, 예컨대 국민연금생활자, 정부에서 지급되는 생활보조금 내지 기타 공적 자금의 수령자, 하층 노동자 등이 중요한 사회집단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와 같은 수동적 사회집단의 증가는 반대로 능동적이고 역동적이며 기업가적인 사회집단의 수가 더욱더 축소됨을 의미한다. 복지국가사회에 있어 수동적 사회집단의 영향력이 점차로 증가하여 50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에 이르고 있다.
산업화 진행과정의 정점에서 허용된 위험의 카테고리는 객관적 귀속의 한계로서 도출되었지만, 복지국가사회에서 허용된 위험은 안전보장의 요구증대로 인해 날로 그 의미를 상실해가고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형법학의 영역에서 허용된 위험은 일정한 위험을 안고 살아야 하는 현대 후기산업사회에서 고도의 위험을 수반하는 행위를 했을 때(예컨대 자동차 운전, 원자력발전소의 운영, 거대한 구조물의 건축, 폭발물의 취급, 신기술의 사용행위 등) 발생하는 손실과 이익을 고려하여 고안해낸 결과물이다. 비록 고도의 위험이 수반하는 행위라 할지라도 행위자로 하여금 수반되는 위험을 불가피한 최소한도로 줄이도록 성실히 배려할 것을 요구하고, 이때 불가피하게 발생하게 될지도 모르는 위험을 허용된 위험이라 하여, 위험에 결부된 행위를 위법하지 않은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위험과 결부된 행위시 발생하는 손실과 이익 사이의 이익형량은 지금까지 한 사회에서 형성된 가치체계의 평가에 의존하고 있는데, 최근 수년간의 급속한 사회 가치체계의 변화는 시종일관 이러한 이익형량의 결과에 변화를 초래하고 있다. 이와 같은 토대위에서 진행되고 있는 허용된 위험의 재평가는 “위험한 자유”(riskante Freiheiten)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듯이 일반시민의 자유보다 안전을 보다 과잉평가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과잉평가는 앞서 언급한 능동적 사회집단보다 수동적 사회집단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사회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또한 수동적 사회집단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근대 산업사회에서와는 달리 법익침해결과가 우연 내지 운명적인 상황에 의해 발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해 심리적 저항을 표출하는 특징이 있다. 왜냐하면 수동적 사회집단은 자신들에게 발생한 법익침해결과를 결코 우연이라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인간, 보다 구체적으로는 능동적 사회집단의 작위 내지 부작위의 결정에 기인한 위험의 부산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수동적 사회집단에서 발생한 “불행”(Ungl?ck)이 “불법”(Unrecht)으로 전환되는 경향이 증가하고 있으며, 그 결과 형법의 영역이 불가피하게 확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