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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 2004년 01월 1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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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221쪽 | 404g | 148*210*20mm |
ISBN13 | 9788935911622 |
ISBN10 | 89359116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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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북인의 차별, 그리고 매관매직
평양에 사는 김 진사는 문벌과 재산이 남부럽지 않지만, ‘서북인(西北人)’이라는 낙인을 지울 수 없었다. 그래서 조선에 살던 대부분의 양반들이 그렇듯, 그도 벼슬살이 한 번하고 싶은 마음은 가득했으나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
이는 ‘홍경래의 난’이 보여주듯이 뿌리깊은 서북인 차별 때문이었다. 청담(淸潭) 이중환(李重煥, 1690~1756)은 <택리지(擇里志)>에서 “한양 사대부는 서북인과 혼인하거나 대등하게 사귀지 않았고, 서북인도 또한 감히 사대부와 더불어 대등한 교제를 하지 못하였다.”고 하여 서북지방의 양반이 ‘2등 양반’ 취급을 받고 있음을 지적했다.
심지어 일제강점기에 좌옹(佐翁) 윤치호(尹致昊, 1865~1945)는 동경제국대학 영법학과를 졸업한 설송(雪松) 정광현(鄭光鉉, 1902~1980)을 사위로 맞이하면서 ‘이 결혼은 서울 명문가에서 평양 출신 사위를 맞는 첫 번째 사례이므로 조롱과 비난의 표적이 될 것’이라고 불편한 심기를 보일 정도였다고 한다.
이런 상황이니 소중한 외동딸에게 좋은 짝을 얻어 주려면 서북인이 아닌 자를 찾아야 할 수 밖에 없었다. 이를 위해 김 진사는 서울로 향했다. 물론 가는 김에 벼슬길도 오르면 좋다는 생각은 했을 것이다. 서울에 온 김 진사는 매관매직의 거간꾼인 김양주를 만나게 되고, 그를 통해 조정의 실세인 사직골 허 판서에게서 벼슬을 살 기회를 얻었다.
김 진사가 원했던 현감 자리값은 만 냥이었다. 먼저 천 냥으로 참상관(參上官, 종6품 이상)의 품계에 오르고, 비로소 현감 자리를 살 자격을 얻었다. 그리고 나서 허 판서를 만나 구체적인 벼슬자리와 물건 값, 그리고 이를 지불하는 방법에 대해 합의했다.
세도정치기에 ‘초사(初仕)’라 하여 처음 수령이 되어 임지로 떠나는 자는 1만 냥이었다고 하니 이 소설에서 김 진사가 1만 냥을 주고 ‘과천 현감’ 자리를 산 것은 소위 공정가격에 해당하였을 것이다.
허 판서가 이렇게 당당하게 매관매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1837년(헌종 3년)에 만들어진 ‘수령 천거법’의 영향도 있다. 비변사 당상이거나 관찰사를 지낸 이에게 수령을 추천할 권한을 부여했으니, 허 판서도 이에 근거하여 수령을 사실상 임명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 이중환이 ‘서북 지방에는 300년 이래 높은 벼슬을 한 관리가 없고, 혹 과거에 급제한 자도 관직이 현령(종5품)에 불과했다’는 말을 남겼다고 할 정도니 김 진사가 현감(종6품) 자리 이상에서 시작하는 것도 무리였을 것이다.
안동 김씨 세도정치기의 하옥(荷屋) 김좌근(金左根, 1797~1869)과 그의 첩 나합(羅閤) 양씨(梁氏)를 모델로 한 듯한 조정의 실세 허 판서에게 벼슬만 사고 돌아왔다면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매관매직이 성공하는 순간, 마음이 풀렸는지 김 진사는 입을 잘못 놀렸다. 사람의 입이 화(禍)를 불러온다더니 김 진사는 순간의 실수로 자신의 딸 채봉(彩鳳)을 늙은 허 판서의 첩으로 보낼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자기합리화였을까 아니면 욕심에 눈이 어두워진 탓일까. 김 진사는 자기 딸을 늙은이의 첩으로 바치면서 당당하게 기막힌 사위를 정하고 왔다며 “정실(正室)도 아니오, 부실(副室)도 아니오, 별실(別室)이라오”이라고 외친다.
김 진사의 말에서 첩(妾)에도 서열이 있는 것은 알겠지만 구체적으로 부실(副室)과 별실(別室)이 어떤 차이가 있는 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별실이 더 격이 처진다는 느낌은 든다.
사랑하는 딸을 위해 그 짝을 구하러 가는 자상한 아버지는 어디 가고 부귀영화를 위해 딸을 파는 추악한 욕심쟁이만 남아있으니 읽으면서 기분이 씁쓸했다.
진취적인 여성의 순애보
김 진사의 딸 채봉은 단풍 구경갔다가 전(前) 선천부사 (宣川府使)의 아들 장필성과 인연을 맺어 혼인을 약속한다. <춘향전>의 춘향과 이도령이 그렇듯 순식간에 사랑에 빠져드는 것을 보면, 이런 휘발유 같은 사랑이 이팔청춘의 특권이 아닐까.
<춘향전>에서와 달리 신분의 격차도 없이 순탄히 사랑이 결실을 맺을 것처럼 보였지만, 욕심에 눈이 뒤집어진 아버지 때문에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늙은이의 첩이 되기 위해 서울로 끌려 간다.
하지만 채봉은 흔히 보는 고전소설의 여주인공처럼 부모의 말에 무조건 순종하는 효녀가 아니었다. 그녀는 과감히 부모의 말씀을 어기고 사랑을 찾아 도주할 계획을 세웠다.
그녀에게는 다행히도 김 진사 일행은 조용한 주막에서 쉬다가 화적(火賊)떼를 만나 채봉의 도주를 알지 못했다. 도적이 사라지고 나서 김 진사 내외가 정신을 차려보니 허 판서에게 줄 돈도, 딸도 사라지고 없었다.
어쨌든 딸이라도 찾아보기 위해 허 판서를 만났으나 도리어 김 진사는 옥에 갇히게 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채봉은 허 판서의 첩이 되어 아버지를 구하는 대신 기생이 되어 아버지의 몸값을 마련하기로 한다. 어쩌면 채봉은 어느 길을 택하더라도 이미 기분이 상한 권력자의 마음을 돌려 아버지를 구하지 못할 것임을 직감했을지도 모른다. 허 판서는 돈만 받고 김 진사의 과천 현감자리마저 빼앗고, 계속 감옥살이를 시켰다.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일이 된 상황에서 정절이라도 지키기 위해 채봉은 ‘송이’라는 기명(妓名)을 짓고, 장필성과 주고 받았던 시(詩)를 미끼로 건다. 자신의 답시(答詩)를 제시하고 이와 짝이 되는 시를 지은 자에게 몸을 바치겠다는 광고를 건 것이다. 이 시가 장필성에게까지 전해지자 기이하게 여긴 장필성은 송이의 집에 찾아가 채봉과 재회하지만, 이미 몰락양반이 된 장필성으로는 이 상황을 타개할 아무런 방법이 없었다.
그 사이 새로 부임한 평안감사 이보국이 80세의 노인이라 눈이 침침하여 공사를 일일이 볼 수 없어 답답하던 차에 채봉의 서화가 뛰어나다는 소문을 듣는다. 이에 그녀의 재주를 시험해 보고 자신의 눈을 대신하기 위해 그녀를 기적(妓籍)에서 빼내 별당에 두고 서류 작성의 일을 맡겼다.
신여성이 등장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반영되어 활자화 과정에서 수정된 것이 아니라면, 이 소설의 저자가 진보적이고 혁신적인 사고를 가졌음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천민에 해당하는 기생에게 문서업무를 맡긴다는 상상을 할 수 있었을까.
어쨌든 이 사실을 알게 된 장필성은 채봉을 만나기 위해 양반의 체면을 버리고 평양감영의 이방이 되지만 둘은 만날 수 없었다. 단지 공문서에 쓰인 글씨로 안타까움을 달랠뿐. 결국 상사의 마음을 누르지 못한 채봉은 ‘추풍감별곡(秋風感別曲)’이라는 시를 쓰고, 이를 읽은 평양감사가 두 사람의 관계를 알아채어 이들을 맺어준다.
그 사이에 허 판서는 반역죄로 목숨을 잃었고, 평양감사가 채봉을 위해 김 진사의 무고를 보증하니 채봉의 아버지는 무사히 풀려나올 수 있게 되었다.
채봉의 모습에서 전통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사랑을 위해 세상의 평판을 무시하고 불꽃 같은 삶을 살았던 신여성들의 편린이 보이는 듯해서 기분이 묘했다. 마치 이 소설이 고전소설과 신소설을 이어주는 가교(架橋) 역할을 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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