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세 안재홍 선생은 비타협, 비폭력, 실천적 저항의 지조를 지키고 행동한 독립운동의 표상이었으며, 그의 ??백두산 등척기??는 치열한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한 기행문이다. 우리의 가능성과 역사가 남겨준 자긍심을 잃지 않은 선생의 기개가 그대로 살아 있는 이글은, 막연한 불안감 속에서 미래에 대한 꿈조차 꾸지 못하는 청년들에게 자신을 되돌아보고 새로운 포부를 품는 계기를 마련해 줄 것이다.
김진현 (민세안재홍선생기념사업회 회장, 대한민국역사박물관건립위원회 위원장)
민세 안재홍 선생은 민족 운동가로, 언론인으로, 역사가로, 정치인으로 그 분야마다 굵직한 자리를 차지하는 고절의 국사였다. 우리의 풍토와 역사적 조건 속에서 민족의 살길을 찾으려고 고심한 그 독자적인 사상, 외세 강점 전후 9차례에 걸쳐 7년 3개월의 옥고를 치른 그 도저한 행동, 이 모든 것이 선생의 상을 우리 현대사에 흔치 않은 민중지도자의 한분으로 부각케 하고 있다.
천관우 (사학자)
그는 천성이 학자이다. 언론인이어서 정치를 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기에 야심이 없던 그는 민정장관이 되고서도 다른 정치인들처럼 자리를 이용해서 정치자금을 마련하든가 자파 세력을 부식하는 일이 없었다. 그는 거짓이 없고 순정한 인간으로 온갖 고초를 겪은 민족지도자로 존경 받기는 했으나 한국적 정치 풍토에서 정치인이면 으레 몸에 지니고 있어야 할 권모와 술수, 당략을 구사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고 일제 수난기와 해방 후의 거센 파도 속에서 시대적 희생자로서 인생을 마친 비운의 주인공이었다.
송건호 (언론인)
분단이 점차 심화되는 상황에서 체제의 이질화를 바로잡자는 데 누구나 동의했지만 그 방안을 놓고 정치적 입장에 따라 서로 다른 주장을 폈다. 그중 편향성을 극복하고 대립을 넘어서는 노선을 찾기 위해 힘썼던 사람들을 ‘민족지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데 조소앙 선생과 안재홍 선생이야말로 그 대표적인 예이다.
조동일 (국문학자, 서울대 명예교수)
어젯밤 11시에 경성역을 떠난 우리 일행 7명은 차실(車室) 관계로 둘로 나뉘었다. 내가 갈까 하는 참에 일민(一民) 윤홍열(尹洪烈), 수주(樹州) 변영로(卞榮魯) 두 사람이 먼저 찾아왔다. 원산에서 하차하여 동해 물에 몸을 담그고 함흥으로 치달아 관북(關北)의 웅주(雄州)를 한번 둘러본 뒤, 밤차로 무산(茂山)행을 하자는 상의다. 조금 뒤 옷을 갈아입고 여러 사람이 있는 차실로 갔다. 경암(敬菴) 김찬영(金瓚泳), 예대(詣垈) 성순영(成純永) 두 사람과는 처음부터 길을 함께하기로 예정했다. 어젯밤 같이 출발한 월파(月坡) 김상용(金尙鎔) 씨와 양정고보의 황오(黃澳) 씨 등이 벌써 행장을 묶어 놓고 원산에서 하차할 것을 역설한다.
하지만 관북 천리 웅장하고 아름다운 첫 대면의 풍광을 어찌 어두운 밤에 잠을 자며 지날 것인가? 적지 않은 의기를 발휘하여 중론을 굳이 물리쳤다. 차라리 혼자서 직행하기로 하고, 나는 다시 나의 차실로 돌아왔다. 석왕사(釋王寺), 안변(安邊), 남산(南山)의 모든 역을 거쳐 갈수록 계곡과 숲의 아름다움이 말할 수 없이 곱다.
―1장 「태봉고원의 청량한 맛」중에서
외따로 두세 집씩 산간에 사는 인가에서, 승객을 가득 싣고 달아나는 기차를 맞이하여 문지방을 집고서서 우두커니 쳐다보다가 남성과 눈을 마주치면 수줍어 외면하는 것은 소박한 여성이다. 맨발에 헌옷 입은 나이 어린 오뉘들이 두셋 씩 달려와서 입에 손가락을 물고 덤덤하게 선 것은 암만 보아야 낯익은 이가 없기 때문이다. 까닭 없이 가엾은 정이 일어나 두고 가기가 섭섭하다.
아아! 한 나라의 수도, 현대 문화의 첨단에서 기를 쓰고 버텨 봐도 오히려 일생의 광명이 보이지 않거늘, 이 산간에 헐벗은 어린 동무들에게는 누가 언제나 가슴 벅찬 환희를 가져다 줄 것인가? 부질없는 한만 가득 품고 무산 읍내로 대어 들어갔다.
―4장 「차유령을 넘어서」중에서
백두산은 꽃이 많아서 덩달아 나비가 많다. 세백접이라고 하는 곱고 긴 얇은 나비는 이 산만의 특산이라고 한다. 송도고보의 김병하(金秉河) 씨가 거칠봉 도중에 채집한 수많은 나비 중에서 그 전형적인 것을 보았다. 식물의 분포는 자못 무진장이어서 식물학자들이 침을 흘리는 바다. 아스라이 향기로운 고산식물의 자태가 풋내기의 눈에는 오히려 놀랍고 기쁜 느낌을 돋울 뿐이다. 중동학교의 최여구(崔如九) 씨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식물의 채집에 열중한다. 앉고 일어나고 나아가고 물러나기를 규율에 맞추어 하는 이번 길에서는 충분히 진귀한 품종을 탐색할 수 없는 것이 유감이라고 한다. 조류가 적어서 천적이 거의 없고, 북서쪽의 강풍이 끊임없이 불어 곤충은 모두 날개의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한다. 천막에 들어와 하소하는 귀뚜리는 말할 것도 없고 메뚜기와 베짱이, 여치의 종류는 모두 다리가 굵고 길되 날개는 몹시 짧다.
―8장 ?무한히 비장한 고원의 밤? 중에서
토문강(土門江)으로 내려가는 계곡을 건너 분수령 위에 올라간다. 2천 2백여 미터의 고지대이지만 평평한 등성이로 관목조차 거의 없다. 풀과 이끼가 두터운 곳에 한 조각 정계비가 서 있다. 편마암의 자연석을 납작하게 다듬은 것이다. 길이가 2척 8촌 남짓이다. 보기에는 대단치 않지만 이 한 조각 돌이 갖은 비바람, 219년에 슬픔과 근심, 부끄러움과 원한, 분노와 회한의 한복판에서 외로이 쇠망한 조선의 운명을 짊어지고 온 것임을 생각하면 실로 값싼 비분을 터뜨릴 겨를도 없다. 서글픈 침묵과 침통한 응시로 전천고(前千古) 후천고(後千古)를 자기의 가슴속에 돌아다보고 내려다보며 우두커니 서성이며 방황할 수밖에 없다.
―10장 ?정계비 곁 산해의 슬픔? 중에서
이 완전히 똑같은 옛 신도(神道)의 신앙이 바다를 건너가서는 신에게 크게 제사를 지내는 최고의 형식으로까지 드높여졌고, 그 본래의 고장에 남은 것은 도도한 중국화의 물결 속에 깊은 산 빽빽한 숲 속 부엉이가 울음 우는 너무도 황량한 땅에 내버려두어
거친 형식이 체모조차 갖추지 못하게 되었다. 여기에서도 대륙의 바람 먼지에 온전히
부대끼며 악전고투를 거듭한 우리 민족과, 바다 너머에서 그윽하게 소박함을 지녀온 안온한 일본 국민과의 서로 다른 처지가 방불하게 떠오른다. 신라의 강역이 남쪽 귀퉁이에 치우치고 백두산의 거룩한 자취가 북쪽 변방에 외떨어져서 고구려 이래로 왕성하던 국풍이 발호하는 중국화의 어설픈 새 문화에 휩싸이게 되면서 민족의 정열은 거의 질식하고 말았다. 이에 맞서 나아가려는 기백이 이미 막혀버린 과정은 지금이라도 또 한 번 객관적으로 자신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하겠다.
―17장 ?백두정간의 허항령? 중에서
갑산과 삼수, 장진(長津)과 풍산 각 고을은 이른바 고지대 사군(四郡)으로 일컫는다. 이 일대는 고구려가 성대할 때 졸본부의 통치 아래 두었었다. 발해가 그 5경(京) 16부(府)를 설치할 때 솔빈부(率賓府)로 고쳐 졸본의 유운(遺韻)을 지녔던 고장이다. 휼품(恤品)과 홀본 등의 지명은 모두 졸본의 다른 풀이로, 고구려 시대의 전통을 받은 것이다. 내 이제 천산에 놀고 천평을 건너 다시 이 졸본 고원을 내려오매, 회고가 비록 쓸데없으나 한 조각 동경의 정이 실끝같이 끊어지지 않는다. 걷잡을 수 없는 마음, 이 무슨 회포인가? 산천이 그립고 촌락이 그립고 전야(田野)의 농사가 그립고 동포가 더욱 그리워서 헬멧 모자에 오른 손을 들어 어린 아이에게 경례하고 소녀에게 경례하고 미인에게도 경례하며, 길 고치는 노동자에게도 경례하였다. 미소 띤 얼굴로 감회가 있는 때에 바로 경례하니 삽을 든 노동자는 황망하게 답례한다. 아아! 관산만리(關山萬里)에 갈 길이 유유한데 이 해는 벌써 저무는구나.
―22장 「졸본 고원 넘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