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칸 국제영화제 미드나잇 스크리닝에서 김옥빈 주연의 『악녀』를 봤다.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1인칭 시점 액션 장면이 잔혹하게 펼쳐진다. 여자 혼자 수 십 명의 남자들을 때려눕힌다. 통쾌했다. 『악녀』는 단점도 많은 영화이지만 여성의 복수와 액션을 극한까지 밀어붙인다는 점에서 좋았다. 여성의 액션을 좋아하는 개인적 취향이기도 하다. 『원티드』의 안젤리나 졸리, 『레지던트 이블』의 밀라 요보비치 등이 보여준 액션은 매혹적이었다. 마블 영화에서 블랙 위도우가 그렇듯이.
여성의 액션은 다 좋다. 그래도 굳이 선호를 따진다면 『매드 맥스:분노의 도로』의 퓨리오사나 오래 전 뤽 베송이 창조한 니키타 같은 캐릭터가 더 좋다. 자신도 모르게 폭력의 중심에 들어가게 되고, 살아남는 것만이 아니라 타인을 위해 자신을 버릴 수도 있는 강한 여성. 『슬픈 열대』를 읽으면서 퓨리오사, 니키타 등이 떠올랐다. 원하지 않은 삶을 살게 된 여성. 하지만 결국 자신이 뭔가를 할 수밖에 없음을 깨달은 여성이 온 몸을 내던져 싸운다. 그런 강렬함과 처연함이 『슬픈 열대』에는 흘러넘친다.
권순이는 북한 특수부대 출신이다. 암살과 침입 등을 특기로 하는 살인무기로 길러졌다. 장산범이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하면서 순이는 최강의 전사가 된다. 그녀가 원한 것도 아니고, 그 일에 큰 보람을 느낀 것도 아니었다. 북한에서 태어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그것이기 때문에 한 것이다. 국가가 지정한 암살대상을 별다른 죄책감 없이 죽이는 것도 단지 주어진 임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순이는 거부하게 된다. 자신이 지키던 배의 화물이 어린 소녀들이었음을 알게 되고, 그녀들이 죽어가는 것을 무기력하게 보고만 있었던 그녀는 모든 것을 버리게 된다. 조국이 자신의 목숨을 노리고 뒤쫓아 올 것을 알고 있지만 어쩔 수 없다. 인간으로서, 인간이라면 마지막으로 지켜야만 하는 선이 있으니까. 그것은 또한 세월호의 은유이기도 하다.
과거를 버린 순이가 도착한 곳은 또 다른 지옥이다. 마약왕 파블로 에스코바르가 지배하는 콜롬비아. 미국의 한 해 예산보다 많은 돈을 벌어들이는 에스코바르의 메데인 카르텔은 콜롬비아를 마음대로 주무른다. 정치인, 법관, 기자들을 내키는 대로 살해하고 무차별 테러를 벌인다. 아이들을 정보원으로 쓰고 또 죽여 버리기도 한다. 순이는 그 안에서 살아간다. 목적도 없이 그저 주어지는 일만을 하면서. 그러다가 리타를 만나게 되고, 하나의 목적이 생긴다. 구하지 못한 소녀들 대신 리타를 구해주어야 한다는 것.
『슬픈 열대』는 처절한 싸움의 기록인 동시에 구원의 이야기다. 에스코바르가 활약하는 시기의 콜롬비아는 처절한 싸움이 계속되는 곳이다. 마약 카르텔과 그에 반대하는 로스 페페스, 이념을 앞세운 게릴라들이 저마다의 목적을 앞세워 서로 죽이고, 무고한 사람들까지 가차 없이 희생시킨다. 이미 지옥을 경험한 순이지만 이곳이 나을 것도 없다. 지옥의 저편에서 지옥의 이편으로 넘어온 것일 뿐이다. 『슬픈 열대』는 그런 순이가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끈기 있게 그려낸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변화라기보다 외면하고 싶었던 것을 결국 받아들이는 이야기니까.
『슬픈 열대』는 액션 장면에서 뛰어난 묘사력을 보여준다. 콜롬비아에는 온갖 무기가 다 있다. 전쟁에 육박할 정도의 규모일 뿐 아니라 온갖 술수도 쓰인다. 순이가 맞닥뜨리는 갖가지 상황은 언젠가 영상으로 보고 싶을 만큼 화려하고 박진감 넘친다. 이걸 실사로 재현하려면 엄청난 블록버스터가 될 테니 한국에서는 거의 불가능하겠지만. 그런 점에서 소설은 여전히 매력이 있다. 읽는 것만으로도 그런 스펙터클을 머릿속에서 재현할 수 있으니까. 『슬픈 열대』는 보고 싶은 액션 장면들을 수시로 제공해준다.
여성 전사의 처절한 액션, 그것만으로도 『슬픈 열대』는 읽는 즐거움이 있다. 그리고 다음 이야기는 어떻게 될지 궁금해진다. 그녀의 뒤를 잇는 다음 이야기는 무엇일까. 리타의 이야기도 다시 읽고 싶다.
- 김봉석(대중문화 평론가. 에세이 『하드보일드는 나의 힘』, 『나의 대중문화표류기』)
북한 출신의 여성 전사, 90년대, 남미, 마약...작품에 등장하는 주요 키워드는 2017년을 살아가는 대한민국의 평범한 사람들이 일생 단 한 번도 마주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때때로 헐리웃 블록버스터의 어떤 장면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속도감이 넘치고, 본 적도 없는 무기들이 눈앞에서 실제로 불꽃을 튕기는 것 같은 액션 장면의 디테일한 묘사는 옆구리가 팽팽하게 당겨지는 긴장감에 저릿할 만큼 높은 쾌감을 선사한다.
그런데 참 묘하게도, 아이러니하게도 현실적이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어린 소녀와 20대의 여전사는 우리 속에서, 우리를 갉고 있는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카르텔의 난무하는 배신과 그들을 이용하려 드는 강대국의 권모술수는 지금 대한민국을 살아내며 마주해야 하는 많은 모습과 지독히도 닮아있다.
이렇게 이물감 넘치는 소재를 갖고 동시대성을 담아낸 첫 소설을 세상에 내놓은 작가에게 박수를 보낸다. 그의 다음 작품이 벌써 기다려진다.
- 김희재(작가. 영화 『실미도』, 『공공의 적2』, 소설 『소실점』)
PTSD(외상 후 증후군)를 앓는 특수부대원에 관한 이야기는 『허트 로커』나 『아메리칸 스나이퍼』같은 영화에서 많이 다루고 있다. 소설 『슬픈 열대』의 주인공인 북한 특수부대원 권순이 역시 그런 증상을 앓고 있는 중이다. 『슬픈 열대』는 피도 눈물도 없이 살아왔던 그녀가 무슨 일을 겪어서 그렇게 고통스러워하는지를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이야기가 흥미를 끄는 지점은 여러 가지가 있다. 우선 북한 특수부대원을 보여주는 영화나 드라마, 소설은 많았지만 여자를 주인공으로 하는 경우는 드물다. 남미, 그것도 콜롬비아라는 우리에게는 대단히 낯선 무대를 배경으로 한다는 점도 눈길을 끈다. 익숙함에서 벗어나서 신선함을 주는 동시에 마약 카르텔이라는 범죄조직을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마약 카르텔에 가담한 북한 특수부대원 출신의 여성 권순이와 그런 사정을 모른 채 그녀를 챙겨주려는 대한민국 외교관 장덕진, 그리고 권순이를 죽여야만 하는 절박한 상황에 처한 또 다른 북한 특수부대원 허성훈을 중심으로 풀어진다. 콜롬비아를 무대로 하는 마약 카르텔인 메데인 카르텔은 늑대라고 불리는 정체불명의 조직에게 공격을 당한다. 거기에 휘말린 권순이는 우연찮게 리타라는 어린 여자아이를 구출한다. 이야기는 인간병기로 살아가던 그녀가 차츰 사라졌던 인간성을 찾아가는 여정을 보여준다. 리타라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여자 아이, 그리고 낙천적인 장덕진과 함께 지내면서 말이다. 이 소설을 보면서 딱 떠오른 영화가 하나 있었는데 바로 뤽 베송 감독이 각본을 쓴 『콜롬비아나』다. 어린 시절 콜롬비아 마피아에게 부모를 잃은 카탈리아는 미국으로 도망쳐서 킬러로 성장한 후, 복수를 하게 된다. 단순한 플롯이면서도 기억에 남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카탈리아가 보여준 화려한 액션과 복수와 사랑 사이에서 방황하는 모습 때문이었다. 『슬픈 열대』는 과연 한국판 『콜롬비아나』가 될 수 있을까?
- 정명섭(작가. 소설 『별세계 사건부』, 『제 3의 도시』, 『조선변호사 왕실소송사건』)
『슬픈 열대』는 할리우드의 액션 영화를 연상시키는 글로벌 소설이다. 콜롬비아를 주 무대로 세계 각지를 넘나드는 방대한 스케일로 한 편의 블록버스터를 본 느낌이다. 멋 부리지 않은 간결한 문체로 높은 몰입감을 준다. 작가의 소재에 대한 관심과 철저한 취재 흔적이 소설 곳곳에서 발견된다. 다큐를 방불케 하는 사실성이 강점이다. 이 소설의 시대적 배경에서 수십여 년이 지났는데도 전쟁이 끊이지 않는, 오히려 격화되는 지구촌이 서글프다. 이념 혹은 돈의 꼭두각시가 되어 죽고 죽이는 인간들의 슬픈 자화상을 잘 그려냈다.
“신은 콜롬비아를 너무 아름답게 만들었기에, 대신 이 땅에 악한 사람들을 주셨죠.”
『슬픈 열대』를 상징하는 단 한마디의 문장을 꼽으라면, 미드 『나르코스』의 이 대사에 기댈 수 있을 것만 같다. 신이 창조한 땅, 그러나 마약상의 왕국이 되어버린 90년대의 콜롬비아. 어린 소녀의 초경조차 저주가 되어버린 이 땅은 ‘백성은 없고 간부만 있는 것 같다는’ 지구상의 어느 공화국과도 겹친다. 그리고 마치 운명처럼 북한 35호실 출신의 특수요원 권순이가 콜롬비아를 배경으로 자신의 시대보다도 암울한 싸움을 이어간다. 더 이상 공화국의 명령을 받지 않는 특수요원의 운명은 슬프고도 시리다.
마약왕 파블로 에스코바르가 지배하던 콜롬비아에서 어린 한 소녀의 인생을 지켜주기 위해 펼쳐지는 권순이의 액션, 이 여름, 그 통쾌하면서도 너무나 인간적인 그녀의 행로를 따라가 보기를 권한다.
- 윤현호 작가. 영화 『변호인』, 『공조』, 드라마 『리멤버-아들의 전쟁』
근사한 범죄소설이나 흥미진진한 스릴러로 기억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들이 필요하다. 그중에서도 특히, 스케일을 구축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슬픈 열대』는 첫 장면만으로도 독자들을 무법천지의 콜롬비아의 한가운데로 이끈다.
영화 『시카리오』나 드라마 『나르코스』 같은 영상 속에서나 등장할 법한 이국적인 배경 속에 북한 35호실 요원 장산범 ‘순이’가 있다. 이 묘한 이질감은 그럴 듯한 현실성과 나름의 긴장을 선사하는데, 작가의 노력이 결코 적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한다. 근래 보기 드문 밀리터리 액션과 작품 끝까지 유지되는 휴머니즘은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이다.
- 윤영천(howmystery.com 운영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