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일도(다일공동체)
“이 땅에서의 삶이 우리를 보내신 분의 사랑에 대한 응답이어야함을 깨닫는다면 고통과 상처는 우리에게 참된 희망과 축복의 근원이 된다. 이 책 곳곳에는 이런 깨달음에 대한 감사가 넘쳐나고 있다. 나에게 새로운 삶의 각오를 심어준 이 글을 통해 모든 이들이 그늘과 어둠에서 일어나 힘차게 새로운 비전을 향해 나아가게 되리라고 확신한다.
정애리(CBS 새롭게 하소서 진행자)
88서울 장애인올림픽 2관왕, 89영국세계대회 2관왕, 94북경아시안게임 석권, 97동아시아게임의 최종 성화봉송자. 이런 수식어들과 함께 늘 따라다니는 또 하나의 수식어는 장애인 박세호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이렇게 본다. 그러나 내가 아는 박세호는 자신의 조건과 상관없이 그 조건으로 인해 쓰임받는 하나님의 아들 박세호다.
KBS 9시 뉴스
“어떻게 하면 병역을 피할 수 있을까 머리를 굴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군복무 의무를 지게해 달라며 국방부에 선처를 호소하는 사람도 있다.”
MBC 뉴스데스크
“가수 유승준의 병역 기피로 온 나라가 시끄러웠던 2002년 2월. 88서울장애인올림픽 2관왕이었던 그는 국방부에 입영희망원을 냈다. 그리고 마침내 창군이래 첫 장애인 군번 수여자가 되었다.”
SBS 8시뉴스
“당당하게 총을 들고 나라를 지킬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고맙다는 그의 말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할까?”
동아일보
“뇌성마비 중증장애인이 비무장지대 철책 근무를 서는 보기 드문 장면이 서부 전선 전진부대에서 연출되었다. ‘신의 아들’이니 ‘어둠의 자식’들이니 하며 군대 안 가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던 신세대 젊은이들에게 경종을 울렸다.”
조선일보
“연이은 유명인들의 병역기피와 양심적 병역 거부 등을 생각해 볼 때 그의 솔선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는 병역의무의 중요성을 다시금 일깨웠으며 장병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고도 남음이 있었다.”
-운동선수로서의 삶
1985년 처음 운동을 시작했다. 장애인 특수학교인 혜남학교 중등부 2학년 때이다. 선생님의 권유로 시작한 곤봉던지기는 새로운 삶의 활력을 주었다. 그해 바로 장애인 전국체전에 출전해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그 다음해에는 곤봉뿐만 아니라 투포환 던지기에서도 금메달을 획득했다. 국내에는 적수가 없을 정도로 나의 실력은 월등했다.
’88서울장애인올림픽을 앞두고 일산의 홀트복지회에 입소에 1년 6개월 동안 합숙훈련을 하게 되었고 그 결과 성적은 놀랄 만큼 향상되었다. ’88서울장애인올림픽에 출전해 투포환과 곤봉던지기에서 금메달을 2개를 획득한 것을 시작으로 89년 영국 세계대회에서 곤봉던지기 세계신기록을 달성하고, 일본 히로시마, ’94북경아시안게임에서도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러나 너무 잘 던져 상대가 없는데다가 다른 나라의 참가선수들이 전무해 ’92년 바로셀로나와 ’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는 출전조차 하지 못했다. 이후 2000년 시드니장애인올림픽에 출전했으나 경기방식과 장비의 변화로 시드니 올림픽 금메달은 거머쥐지 못했지만 4년 후 금메달을 꼭 되찾아 오겠다는 강한 의지를 심게 되었다. 오늘도 2004년 아테네올림픽을 향해 던지고 있다.
-남자로서의 삶
이성에 눈을 빨리 떴다. 특수학교는 보통학교와는 달리 반마다 보조언니를 두었는데, 대부분 부산시 야간 실업계 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었다. 그들과의 생활 속에서 내가 경험하지 못한 이성과의 사랑을 배울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과의 만남 속에 한계는 늘 있었고 난 그때마다 아파하며 나의 몸을 저주했다. 사춘기 시절 한 달 동안 아버지와 낚시를 하러 떠난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난 내 나이 또래의 소녀를 만나게 되었고, 그녀와 우정을 쌓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와의 만남은 짧기만 했다.
내 아내를 만난 건 1990년 교회의 야외예배에서였다. 그녀는 봉사자였고 난 그의 봉사가 필요한 장애인이었다. 나보다 네 살 위인 그녀는 나를 누나처럼 위로해 주었고, 나를 사랑해 주었다. 우린 같은 동네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거의 매일같이 만날 수 있었다. 내 나이 스물하나! 그녀가 “우리 결혼하자”고 했지만 당시로서는 그녀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녀와 헤어졌다.
그녀와 헤어진 후 난 한 달여 동안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했다. 그녀와 헤어진 후 정말 우연히 첫사랑인 바닷가의 그 소녀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소녀와는 이제 다른 모습으로 만날 수 있었다. 정말 우리는 사랑했다. 하지만 그 소녀는 다시 나를 인정하지 않고 떠나 버렸다.
그녀와의 이별은 다시금 나를 고통 속에 있게 했고, 독한 술과 짙은 음악으로 날 저주하며 지내게 했다. 그러던 중 4년 동안 까맣게 잊고 있던 ‘천사’ 지금의 나의 아내를 생각해냈다. 그리고 바로 전화를 걸어 그녀를 찾았다. 나를 잊었으면 어떡하나, 전화번호가 바뀌었으면 어떡하나 많은 생각을 했지만 그녀는 정말 계속 만나왔던 사람처럼 반갑게 나의 전화를 받아 주었고, 통화 후 곧 우리 집으로 와서 나를 회복시켜 주었다. 그녀는 아낌없이 나를 사랑해 주었다.
그녀는 곧 부모님께 우리의 만남을 알렸고, 결혼하고 싶다는 의사를 말씀드렸다. 하지만 그녀의 집에서는 장애인인 나에게 귀한 딸을 시집 보낼 수 없다고 하셨다. 하지만 우리는 설득했고, 목사이신 그녀의 아버지는 40일간의 금식기도 끝에 허락해 주셨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의 축복 속에 진정한 사랑으로 결혼했다.
-아빠로서의 삶
결혼 후 곧 우리는 아기를 낳았다. 아들 성민이 세상에 처음 태어났을 때 나의 아내는 ‘팔, 다리, 눈, 코, 입’이 정상적으로 달려 있는지를 물었다. 혹시 나 같은 장애인이 태어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있었나 보다. 하지만 내 아들 성민이는 어느 아기보다 건강하고 다부진 아이였다.
출산 후 아내는 어쩔 수 없이 생활비를 위해 직장에 나가게 되었고, 낮동안은 내가 아이를 돌봐야했다. 기저귀를 갈고 우유를 데워 먹이는 일이었지만 한 팔밖에 쓰지 못하는 나에게 이 일은 대단한 훈련이 필요했다. 하지만 아기는 아빠의 이런 고충을 알았는지 기저귀를 갈 때면 엉덩이를 살짝 들어주어 나를 도왔다.
아들은 이제 초등학생이 된다. 지금까지 아들은 밝고 씩씩하게 자라 주었다. 그리고 나의 친구가 되어 주었으며, 나의 꿈이 되어 주었다. 그 아들을 위해 나는 오늘도 최선을 다하는 삶을 선택하고 있다.
-신앙인으로서의 삶
올림픽 출전을 앞두고 합숙훈련을 하던 홀트복지회에서 처음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말할 수 없는 외로움 속에서 나는 기쁨과 사랑이 넘쳐 흐를 수 있는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러던 중 홀트에 있는 교회를 알게 되었다. 그곳에서 나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손가락질당하는 고통 중의 영혼들이 그곳의 교회를 묵묵히 지키고 있음을 보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나와는 달리 너무나 행복해 보였다. ‘그들은 왜 행복해 보이는 걸까?’ 그후 나도 주일마다 교회를 다니게 되었다. 하지만 처음엔 그저 의미없이 교회생활을 했을 뿐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내 신앙생활이 변해 갔고, 어느덧 성경을 읽지 않으면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나는 구원받았을까?’ 하는 질문이 나를 늘 괴롭히고 있었다.
어느 날 말씀을 묵상하던 중에 ‘세례’를 받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세례를 받은 후 나는 이 고민에서 해방되게 되었다. 아울러 내가 그토록 저주하던 장애, 그 장애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리고 금메달을 따야겠다는 욕심을 넘어 그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겠다는 숭고한 생각으로 운동을 하게 되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나는 항상 기도하며 믿고 운동했다. 이후 15미터밖에 못 던지던 내가 30미터를 던지게 되었다. 기적이었다. 그후 늘 하나님은 함께 하셨고, 나에게 운동뿐만 아니라 여러 모양으로 살 수 있는 희망을 주셨다. ’94극동 및 남태평양 장애자 경기대회를 위해 중국에 갔을 때, 그곳에서 전도를 할 수 있게 하셨고, 많은 매체와 간증집회를 통해 하나님을 전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나는 하나님을 만나면서 비로소 쉴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