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지바르 또는 마지막 이유』
소설 속에서 “다른 자”들로 표현된 나치 정권이 모든 것을 지배하던 1937년의 가을, 독일 북쪽 발트 해의 작은 항구 레리크에서 우연히 여섯 인물이?그중 하나는 목각상?만나 ‘자유로의 도주’를 이루어내는 하루 동안의 이야기. 유대인에 대한 체계적?조직적 말살 계획이 진행되고, 공산당 활동을 비롯하여 나치에 비판적인 모든 활동이 금지되고 박해받고 있던 그 때, 이 여섯 인물은 “다른 자”들의 정권 밑에서 모두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다.
‘소년’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매일 똑같은 생각만 하며, 증명서라는 장치로 소년의 세계를 통제하는 '어른들'의 늪인 작은 포구와, 그곳의 지루하며 확정된 삶을 견딜 수 없다. 그는 바로 그런 현실이 자신의 아버지를 죽게 했다고 생각하며, 방치되어 있는 낡은 제혁공장에 작은 비밀장소를 마련해놓고 『허클베리 핀』 『보물섬』 『모비 딕』 등의 책을 읽으며, 그곳을 벗어나 대양을 거쳐 미지의 땅, 잔지바르로 떠나는 모험을 꿈꾸고 있다.
소년을 견습생으로 두고 있는 늙은 공산당원인 어부 크누트센. 그는 “총을 들어 쏘지” 않는, 패배한 자신의 당과 결별하고, 그의 아내가 정신병자라며 수용소로 끌어가려는 “다른 자”들의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물고기나 잡으며 살고 싶어 한다. 그래서 당의 지령을 전달할 자가 나타날 것이란 소식은 그를 불편하게 만든다.
그 늙은 어부에게 당의 지령을 전달하기 위해 레리크를 찾아오는 공산당 청년연맹의 지도원인 그레고어. 그는 독일 내 공산당의 실패 후 소련에서 기관원으로 훈련을 받고, 작전에 투입되기도 하지만, 공산당 잔인한 숙청 방법을 체험하면서 거리를 두기 시작했고, 레리크에서 수행해야 할 업무에 회의를 느끼며 공산당과 “다른 자”들의 나라를 벗어나 명령이 없는 자유로운 세계로 가고 싶어 한다.
그리고 도주 외에는 살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는 유대인 처녀 유디트. 그녀는 집단수용소에 끌려가기 직전, 독약을 마시며 딸에게 도주의 길을 열어준 어머니의 명령에 따라 레리크의 부두에서 외국으로 도주할 배를 찾아야 한다.
목사 헬란더는 오랫동안 신의 말을 기다리고 있지만, 신은 교회마저 “다른 자”들에게 점령당한 그 가공할 현실에는 조금도 관심을 보이지 않고 그저 멀리 ‘오리온 좌에서나 서성이고 있다’고 생각하며, “다른 자”들에 의해 퇴폐적 예술로 낙인찍힌 조각상 「책 읽는 수도원생」이 교회에서 압수되기 전에 안전한 곳으로 옮기려고 한다.
마지막으로 조각상 「책 읽는 수도원생」. 이 목각상은 조각가 에른스트 바르라하Ernst Barlach의 작품임을 쉽게 알 수 있는데, 바르라하는 나치에 의해 작품 활동이 금지되었던 조각가이다. 이 소설에서 조각상은 사고와 행위의 자유를 상징하며, 조각상의 구출이란 목표를 중심으로 등장인물들의 연결고리가 형성되고 이야기가 전개된다.
『프로비던스에서 나의 실종』
「형제」
2차대전의 발발을 알리는 1939년 가을의 어느 일요일, 엘베 강가를 산책하는 형제의 이야기다. 이 형제가 강가를 산책하며 나누는 대화의 내용은 대부분 형제들이 나눌 수 있는 일상적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날씨, 직업적인 미래, 하고 싶은 일들과 형제 사이에 있을 수 있는 작은 갈등 등이 이어지고, 항구에 비행편대가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도 전쟁이 일어날 것인지, 그렇게 되면 그들은 징집이 될 것인지에 대한 대화도 특별한 무게가 실리지 않은 채 진행된다.
「플라이셔 대위를 위한 기념사」
2차대전에서 포로가 되어 미국으로 이송된 독일군 키인을 중심으로 독일군들의 포로생활과, 미국에 정착한 독일계 유대인임을 이름으로 암시하는 군의관 플라이셔와의 만남을 기술하고 있다.
「딸」
스위스 의사 벵거가 열여섯 살의 어린 딸을 영국의 옥스퍼드에 있는 언어기숙학교에 데려다주는 여행을 기술하고 있는데, 딸과의 서먹한 관계, 아버지로서의 몰이해,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회상 등을 통해 아버지로서의 무능함을 인식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첫 시간」
실수로 살인을 하게 된 엘러스가 20년을 감옥에서 보낸 다음 출소하는 첫날의 이야기인데, 오랫동안 머릿속에서 이날을 준비해온 그가 시내로 들어가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주문해 마시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예수킹두취케」
1968년 4월 학생운동의 지도적 역할은 해 온 두취케가 총격을 당하자, 학생들은 그동안 학생운동을 좌익불순세력의 폭력운동이라면서 주동자들의 타도를 외쳐온 우익언론 악셀―슈프링거의 사주라며 격렬한 항의시위를 벌였는데, 이 작품은 이 시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시위에 참가했다 경찰의 곤봉에 의해 머리에 타박상을 입은 친구를 병원으로 데려가면서 세 사람이 나누는 대화가 중심이 되어 있다.
「바닷가의 오전」
도르트문트 건설국의 관리인 ‘그’는 가족과 함께 프랑스의 바닷가에서 휴가여행을 하고 있다. 공무원으로 안정된 수입을 가지고, 소시민이 꿈꾸는 집과 자동차 등 모든 것을 소유하고 휴가여행까지도 즐길 수 있는 그는 자신이 도달한 것이 만족을 느끼고 있는데, 수영금지의 깃발이 올라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다로 뛰어들어 파도에 휘말리게 된다.
「더 아름답게 살기」
2차대전 후, 경제복구의 시기에 냄비와 주방기구를 생산하는 회사를 창업하여 부를 축적한 법학박사 린스는 회사의 운영에서 물러나, 방금 사들인 아일랜드의 집에서 칩거를 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칩거의 목적은 오로지 그동안 수집한 미술품들과 함께 자신의 문화적 욕구에 따라 살기 위함으로, 그것을 위해 어떻게 집을 개조할 것인지 등 세밀한 계획을 세우는데, 과연 그가 그것을 실천하게 될지는 분명하지 않다.
「바람 부는 섬들」
공산당 청년연맹에서 활동하다가 나치에 의해 집단수용소에 수감되었다 풀려난 뒤,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놀고 있던 키인은 우연히 영국 신사에게 자신이 살고 있는 뮌헨 시를 안내하게 된다. 그 신사는 영국 식민지에서 민간 총독까지 지낸 고위 관리다. 그와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키인은 다시 자신의 과거와 나치가 지배하는 현재와 대면하게 되는데, 그의 기대와는 달리 그 영국 신사는 나치 정권에 중립적인 자세를 보인다.
「프로비던스에서 나의 실종」
미국의 독문학과에 초대되어 낭독과 독일문학에 대한 강연을 하기로 되어 있는 서독의 작가 T의 실종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작가 T는 2차대전 당시 미군의 포로로 미국에 수용된 적이 있어, 그곳을 다시 방문해보지만 예상과는 달리 별 감흥을 느끼지 못하고 돌아와서는 자신이 머물고 있던 프로비던스의 대학 주변의 주택가를 서성이다가 빨간 칠이 된 집에 매료되어 들어간 후, 주인 부부에 의해 납치를 당한다. T는 자신이 납치되어 감금된 상태, 자신을 납치한 그 부부와의 관계 등을 ‘나’라는 1인칭 화자의 소설로 구상하는데, 「프로비던스에서 나의 실종」은 바로 그 구상의 과정과 기술된 문장도 부분적으로 보여줌으로써 독자는 작가의 작업 현장을 엿보는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감금된 작가 T는 시간이 흐를수록 자발적으로 감금 상태를 받아들이게 되는데, 작가 T가 구상하는 소설을 끝내게 되는지, 그가 감금 상태에서 풀려나게 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