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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발행일 | 2013년 01월 2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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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450쪽 | 760g | 150*210*30mm |
ISBN13 | 9788901153834 |
ISBN10 | 8901153831 |
2024년 10월 01일 ~ 2024년 10월 31일
상시
49명의 예스24 회원이 평가한 평균별점
제목: 넓고 깊게 그리스 여행하기, 『문명의 배꼽, 그리스』
아는 만큼 보인다, 이 말이 정말이라면 나는 이 책 『문명의 배꼽, 그리스』을 처음 접하면서 나는 눈뜬 장님이 된 기분이었다. 두꺼운 두께, 적당히 묵직한 책의 무게감은 ‘니코스 카잔차키스’라는 낯선 이름과 함께 나의 눈을 멀게 했던 것이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그 니코스 카잔차키스라니. 늘 피해왔던 그 작가와 그 책을 여기에서 만나는 구나, 나는 탄식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스·로마 신화와, 별자리 이야기, 그리고 꽃들의 전설에 이르기까지 곳곳에 어려있는 신들의 발자취를 나는 늘 동경해왔다. 어릴 때에 즐겨듣던 교육방송 라디오에서 별자리 이야기를 하면 늘 등장하던 것이 신들의 이야기였다. 포세이돈은 얼마나 강렬하고도 멋진 존재로 내게 다가왔는지. 나르시시즘은 왜 또 꽃 이야기 속에 숨어있었지. 작가 이윤기 선생님이 직접 해설을 하신 책들도 두루 읽으면서도 나는 막상 그리스를, 그리고 그 부르기도 낯선 꼬부랑 외국어로 적힌 신들의 이름을 어려워 했던 것 같다.
9개의 장으로 크게 구분되어진 이 그리스 여행기는 역시나 처음부터 말썽을 일으켰다. 저자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관문, 코린토스를 향해 기운차게 걸어가고 있었지만, 나는 ‘코린토스’라는 지명이 낯설기만 했다.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서 버린 채 즐거이 떠나는 그와 박경철 선생님을 원망스럽게 바라보고만 있었다. ‘제가 카잔차키스 선생님과 안친하다고 안챙기고 그냥 가시는 거죠?’하면서. (그리고 슬프게도 이 ‘코린토스’ 이야기는 9개 중 4개 장에 걸쳐 펼쳐진다. 맙소사.)
카잔차키스와 저자가 나란히 문답을 하면서 즐거이 걷는 그 길을, 한참을 쉬었다 걷다 뒤처진 걸음을 따라잡다 보니 그리스의 이야기가 하나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는 만큼 볼 수 있다는 것이 정설이라면, 나는 이 여행을 함께 걸으면서 ‘내가 아는 한국’을 통해 ‘그리스’를 알아가기로 마음먹었으므로 가능한 일이었다.
"로마인들과 그리스인들의 관계는 애증의 관계였다네. 하지만 그들이 코린토스에 대해 가진 집착은 유별난 데가 있었어.“
그는 그것을 ‘집착’이라고 표현했지만, 애당초 로마는 코린토스를 적대시하지 않았다. (p.49)
“스스로를 지킬 수 없는 민족은 노예의 신세를 면할 수가 없지, 아무렴. 분열은 반드시 역사의 대가를 치르는 법이야.” (p.55)
로마가 세력을 확장하면서 자신들을 괴롭히던 마케도니아의 힘이 약해지자 코린토스인들은 로마에게 기대기 시작했다. 외세를 이용하여 해방을 이루겠다는 기대는 짐짓 삼국 시대의 말기의 신라와 고구려의 힘싸움, 그리고 당나라의 지원이 떠올랐다. (혹은 어렴풋이 광복 이후의 조선이 떠오르기도 했다.)
페리안드로스는 운하건설을 꾀하였지만 무용지물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고 한다. 큰 배는 지나지 못하고 작은 배들만 오가는 한가로운 관광지가 되어버린 코린토스를 바라보며 저자는 무엇을 떠올렸을까. 그리고 나는 무엇을 떠올려야 했을까. 지도자로서의 역량이 얼마나 되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건 정말 많은 요인이 있을 것이다. 저자와 내가 가만히 갈매기가 날아다니는 운하를 바라보자 카잔차키스가 말한다.
“각 시대는 그 시대가 가장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 이상을 의식하지 못하는 법이지. 각 시대는 지나간 시간 속의 사상과 사건들 중에서 오늘의 시대에 동화하고 변화시켜 행동화할 수 있는 것만을 적절히 선택할 뿐이거든.” (p.125)
저자는 시대가 바라는 것을 찾아야 한다고 그의 말을 내게 풀어 설명해주었다. 또 대중의 일부로서 내가 깨달아야 하는 것을 이야기해주었다.
지도자는 역사를 두려워해야 한다. 더군다나 무모하게도 역사와 직접 대화하려는 지도자는 위험하다. 역사에 이름을 남기겠다는 지도자의 욕심은 눈을 멀게 하고 이성을 마비시켜 반드시 무모한 결정을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지도자가 역사에 남겨야 할 것은 자신의 이름이 아니라 동시대에 대한 평가일 것이다. ‘역사상 최초로 어떤 일을 한 지도자’ 혹은 ‘이 엄청난 구조물을 건설한 지도자’ 혹은 ‘이런 제도를 만든 지도자’처럼, ‘최초로’라는 이름을 만기는 것에 집착하는 유아적 도취에 빠진 지도자를 둔 국민은 불행할 수 밖에 없다. (p.126)
시골의사 박경철을, 그 누가 ‘시골’의사라고 얕잡아 볼 것인가. 그의 눈은 한낱 그리스의 낡은 운하를 바라보면서도 시대와 역사와 우리의 이야기를 함께 바라보고 있는데. 나는 멋모르고 쫄레쫄레 떠나온 그 길이 새삼 대단해 보였다. 코린토스의 지리한 역사를 길게 늘어놓는 것도 어쩌면 저자의 계획의 일부일런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는 다른 지역의 문화재의 속성을 꿰뚫어 보는 심미안 또한 가졌다. 이름은 달리 불리우고, 시대는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각자가 가진 조각상, 그리고 신전의 기둥하나까지 그는 속속들이 파악하고 우리에게 설명해준다. 폐허가 된 신전의 공터 혹은 바윗돌 하나까지도 그는 샅샅이 살피는 매의 눈을 가졌다. 그의 말을 빌어 그리스를 둘러볼 수 있게 된 것이 참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 때쯤 저자는 또 ‘행운이 따라다니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게 한다. 낯선 유럽의 여행지에 나타난 동양인에게 여러 행운이 따랐으므로. 아침 개장에 맞추어 방문한 저자에게 혹자는 입장료를 받지 않고, 그를 미행하기 위해 따라 붙었던 사람은 그의 좋은 유물 가이드가 되어주기도 한다. 그리다가 카잔차키스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는 행운을 만나기도 한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나에게도 영웅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친구입니다.”
그는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그렇게 대답했다. 그리스인들에게 우정이란 이런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것을 같이 사랑하고, 내가 살아가는 곳에 같이 살아가고, 내가 아끼는 것을 같이 아끼는 사람. 그것이 친구이고, 친구에게는 모든 선의를 베풀어야 하는 것. 그것이 그리스인들의 명예의 한 축을 담당하는 ‘우정’이란 말의 의미다. 이 우정은 곧 명예고, 거기에 용맹을 더하면 탁월함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그 명예를 누구보다 드높인 사람을, 그들은 ‘영웅’이라 부른다. (p.321)
저자에게 카잔차키스가 영웅이라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우정을 보여준 어떤 택시 운전사의 미소. 나는 그 안에서 경주나 제주도 같은 관광지에서 생활하고 있을 법한 우리의 택시 운전사 아저씨들을 떠올려보았다. 그들 앞에 나타난 ‘멀리서 온 서양인’은 우정을 보여줘도 될 친구로 받아들여질까, 아니면 한국 실정 모르니 마음껏 뜯어내도 될 돈줄로 보일까. 아마도 전자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적지 않을까. (역사 유적지를 방문하는 외국인에게 마음이 열린, 우정이 가득한 택시 운전사 분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아, 우리에게 ‘우정’은 어떤 의미일까.
저자는 마음 속에 코잔차키스를 품고 그렇게 여유롭게 그리스를 걷는다. 그리스의 종교와 사람들과 유적지와 사상, 그리고 역사를 차근차근 곱씹으며 천천히 걷는다. 그래서 앞으로 이 그리스 기행 시리즈는 아홉권 정도의 책이 더 나올 것이라 한다. 처음에 멋도 모르고 따라나선 나마저, 이 찬찬한 걸음 걸음에 동화되어 버리고 만다. 남은 아홉권의 분량에서 또 얼마나 깊은 이야기가 오고갈지 궁금해지기까지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마헤로도토스의 『역사』, 이윤기 선생님이나 천병희 선생님이 번역하신 온갖 책들의 목록을 따로 챙겨 적었다. 분명 함께 그리스를 여행하면서 더 많이 보기 위해서는 ‘이 책들’을 읽어놓는 편이 더 행복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나의 욕심일 뿐, 책은 참 친절하게 많은 이야기들을 풀어간다. 쉬엄쉬엄 간다면 저자의 목소리만으로도 그리스는 잘 보인다.)
한편으로는 우리 ‘한국’을 찾아 오는 낯선 이방인의 모습도 떠올려봤다. 저 멀리에 사는 낯선 이방인 하나는 세종대왕의 훈민정음을 읽고 혹은 삼국유사를 읽고 혹은 고은 시인의 시나, 백석 혹은 이육사의 시를 읽고 한국을 방문하는 일은 없을까. 그들의 글 속에서 ‘한국인’을 가장 잘 알아봐줄 독자는 어디 없을까. 나는 그 설레는 상상을 해보았다. 그가 누구이건 한국에서 한국의 역사와 사상과 종교, 그리고 우리 민족을 꿰뚫어 ‘한국 기행’을 책으로 써주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의 책을 사고 또 사고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선물하리라 생각해봤다.
엉뚱한 생각에 빠져 있다 보니 카잔차키스와 저자가 다음 여정으로 얼른 오라며 내게 손짓해준다. 아, 조금 어렵지만 즐거운 여행이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그리스는 참 넓고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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