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설지 ]
한국 모던 록의 시초
유앤미블루의 시대를 앞서간 데뷔작
U & ME Blue / Nothing’s Good Enough
한국의 유투(U2). 1994년 유앤미블루가 처음 등장했을 때 생소한 이름과 낯선 사운드를 내세운 듀오의 정체성은 이 짤막한 말로 표현되었다. 세련된 모던 록과 얼터너티브 사운드, 이펙트 사용으로 인한 깊고 너른 공간감과 몽환적인 분위기, 리버브가 적극 활용된 나른한 읊조림과 강렬하게 뻗어 가는 시원스러운 보컬, 때로 펑키한 리듬과 블루지한 선율 등은 유앤미블루 음악의 주된 특징이었다. 곳곳에서 유투의 향취가 어른거리기는 했지만 곡들을 관통하는 우울함과 외로움, 공허함, 애상과 같은 정서는 이들의 음악이 단순한 모방이 아닌 재창조라는 사실을 확고히 보여주었다. 이 모든 요소들은 기존 가요에서 들을 수 없었던 새로운 스타일이었다. 그때 우리 대중음악 시장은 본격적인 활황 속에서 한 단계 진화한 다채로운 음악이 막 날개를 펼치며 약동하고 있었지만, 아쉽게도 유앤미블루는 대중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음악 제작과 유통, 공연, 감상과 소비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며 젊은이들을 매혹한 ‘인디 음악’은 2년 후에나 태동할 터였고, 아직은 이러한 음악이 의미 있는 반응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토양이 갖추어지지 않았던 탓이다.
유앤미블루는 평범하지 않은 재능을 지닌 동갑내기 방준석과 이승열로 이루어진 그룹이다. 둘 모두 곡을 쓰고 노래하며 기타를 연주한다. 1970년 춘천에서 태어난 방준석은 10살 때인 1979년 칠레로 이민을 떠났고 1988년 미국으로 이주하여 뉴욕주립대학교 빙엄턴 캠퍼스에서 경영학을 전공했다. 1970년 서울생인 이승열은 1984년 중학교 2학년 때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으며 역시 뉴욕주립대에서 예술사를 공부했다. 신입생 때 만난 이들은 곧 기숙사 룸메이트가 되었고 공통적인 음악 취향을 바탕으로 자연스럽게 밴드를 결성했다. 재미교포 대상의 몇몇 음악 경연대회에 참가하여 주목할 만한 수상 성과를 거두기도 했던 이들은 꾸준히 곡을 쓰고 4트랙 녹음기를 이용해 데모를 만들었다. 1993년, 학교를 졸업한 둘은 고국에서 음악을 하고 싶었다. 방준석이 데모 테이프를 들고 귀국하여 여러 기획사의 문을 두드렸다. 늘 그렇듯 쉽지 않은 일이었다. 당시의 가요계에서는 생소하기만 했던 이들의 음악에 관심을 보인 이는 송홍섭이었다.
‘대장’ 송홍섭은 사랑과 평화,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베이시스트, 80년대부터 90년대 초반까지 조용필, 윤항기, 구창모, 임형순, 김완선, 오석준, 강수지, 원미연, 장혜진, 김종서 등이 노래한 수많은 곡의 편곡자, 그리고 봄여름가을겨울, 한영애, 김현식, 박정운, 신윤철 등의 프로듀서로서 한국 대중음악 신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인물이다. 그는 누구보다 뛰어난 음악적 감각과 ‘컨템퍼러리’에 대한 혜안을 지니고 있었다. 그가 1991년 설립한 녹음 스튜디오이자 제작사인 송 스튜디오는 실력과 개성을 갖춘 뮤지션들의 아지트와 같은 곳이었다. 그들과 함께 다양한 ‘음악적 재미’를 추구해 온 송홍섭이 처음 유앤미블루의 데모를 들었을 때 그는 ‘얼터너티브’에 목말라 있던 상태였다. 이미 데모에 담긴 사운드에 한껏 매료된 그에게 이들의 음악은 그야말로 완벽한 대안이었다. 대중의 반응이 어떠할지, 얼마나 팔릴지 또는 얼마나 손해를 볼지는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재밌다, 같이 하자.”라는 송홍섭의 말과 함께 모든 게 시작되었고, 방준석의 전화를 받은 이승열은 부푼 마음으로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그렇게 유앤미블루의 데뷔작이 탄생되었다.
큰 기대를 품은 채 곧바로 녹음 작업을 시작한 듀오는 자유롭게 자신들이 원하는 작업을 펼쳐 갔다. 데모에 담겼던 여러 곡들을 바탕으로 머릿속에 그렸던 그림을 하나하나 그리기 시작했다. 직접 프로듀스를 하고 기타와 베이스를 연주하고 노래를 했다. 몇몇 곡에서 당시 송 스튜디오의 엔지니어이자 초기 부활의 베이시스트였던 김병찬, 그 즈음 자신의 세 번째 솔로 앨범을 작업 중이던 신윤철, 그리고 건반 연주자 장경아 등이 베이스와 키보드, 피아노를 연주했다. 드럼은 실제 연주 대신 프로그래밍으로 대체했다. 이 데뷔작은 데모 테이프의 연장선상에 자리한 작품이었다. 때문에 대부분의 곡에는 그 작업이 이루어진 뉴욕주 빙엄턴 시절의 정서와 감성이 담겨 있다 할 수 있다. 그 정서에 더해진 건 10여년 만에 귀국하여 바라본 조국, 달라진 이 땅에서 느낀 낯선 기분과 여전히 ‘끝나지 않은 여행’을 하고 있는 둘의 약간은 혼란스럽기도 한 다양한 감정이다. 그 ‘괴리’는 몽롱한 도취와 허무함, 두려움과 무관심, 그리움, 결여 등 여러 형태로 앨범을 채운다.
특이한 건 송홍섭의 역할이다. 그는 앨범에서 최소한의 음악 디렉터 역할 외에 프로듀스나 베이스 연주 대신 ‘가사 지도’를 맡았다. 어린 시절부터 해외 생활을 한 둘의 한글 가사가 매끄럽지 않고 어색했기 때문이다. 더불어 그는 특히 둘의 모호하고 어색한 발음과 가창에 신경을 썼다. 세련되고 독창적인 사운드에 실리는 이들의 노래는 전에 없던 독특한 감흥을 전한다. 자연스럽게 빠져들 수밖에 없는 매력적인 저음과 폭발하듯 터져 나와 쭉 뻗어 오르는 강렬한 음색을 지닌 이승열의 흔치 않은 목소리는 앨범이 지닌 색채를 대표한다. 묘한 불안감과 긴장을 전하는 인트로 격의 짧은 타이틀곡을 시작으로 그가 노래한 여러 곡들은 가슴속을 시원하게 채워준다. 예의 유투, 디 엣지의 기타를 연상케 하는 기타 이펙트와 강렬한 리듬, 나른하면서 동시에 파워풀한 열창이 돋보이는 <세상 저편에 선 너>가 그렇다. 김병찬의 베이스와 신윤철의 키보드 연주가 더해진 <흘러가는 시간들… 잊혀지는 기억들> 역시 마찬가지다. 이 두 곡을 비롯해 방준석이 노래한 업템포의 블루스 <꽃>과 지극히 아름다운 는 유앤미블루의 명쾌한 정체성이 표출된 이 앨범의 하이라이트로 손꼽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승열의 목소리에 보다 웅장하고 스케일 큰 남성적 힘이 실려 있다면 방준석의 노래는 상대적으로 더 섬세하고 감성적인 면모를 지닌다. 사실 그의 역량은 두 번째 앨범의 <지울 수 없는 너>나 <그날>과 같은 탁월한 작품에서 활짝 꽃을 피웠지만, 그 시작은 이 앨범의 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꿈결 속을 흐르는 듯 아련한 선율과 몽롱한 기타, 중독적 리듬과 긴 여운을 남기는 피아노와 함께하는 이 곡에서 그의 나른한 목소리는 더없는 매혹이다. 그 외에 둘이 함께 노래한 <영화 속의 추억>이나 음울한 감성을 펑키한 리듬에 실은 이승열의 <고백>과 는 이들 특유의 어두운 감성이 도드라지는 곡들이다. 다양한 이펙트와 화려한 코러스, 방준석의 담담한 노래로 펼쳐지는 <패션 시대>와 이승열의 열창과 현란하고 역동적인 그루브로 전개되는 <싫어>에서 이들은 당시 한국 사회에서 느낀 경험을 고스란히 담았다.
이 앨범이 발표되었을 때 가요계의 중심에는 감성적인 팝 발라드와 록 발라드, 레게 리듬을 가미한 댄스, 그리고 서태지와 아이들, 디제이 디오씨, 김건모, 룰라, 넥스트 같은 이름이 자리하고 있었다. 밴드가 활동을 펼친 2년여 동안 그들의 음악은 늘 ‘한발 앞서간’ 사운드였고, 이를 알아본 일부 평론가와 PC 통신을 중심으로 퍼진 팬들의 찬사에도 불구하고 널리 알려지고 사랑받기엔 이른 시대였다. 1996년 봄, 데뷔작을 능가하는 탄탄한 짜임새와 보다 뚜렷한 사운드 질감, 더욱 감성적이고 수려한 멜로디를 담은 두 번째 앨범 [Cry... Our Wanna Be Nation!]을 발표하지만 다시 한번 상업적 실패를 맛봐야 했던 밴드는 이듬해 초의 마지막 공연을 끝으로 긴 휴식에 들어간다. 1998년에는 이들이 대학로 학전 소극장, 홍대 클럽 블루데블, 그리고 예술의 전당 등에서 행했던 공연의 흔적들을 담은 라이브 앨범 [Live 95-97](2002년 [Live Collection From 95 To 97]으로 제목을 바꿔 재발매)이 발매되기도 했다.
유앤미블루는 시간이 흐른 후에야 공정한 평가를 받았다. 2007년 평론가와 음악 관계자들이 뽑은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에 1, 2집이 각각 41위와 23위에 올랐고 2018년 발표된 리스트에서는 2집이 40위를 기록했다. 두 앨범의 위상은 이미 절판되어 그간 꽤나 비싸게 거래되어 온 중고 음반 가격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나마도 매물이 많지 않았던, CD와 카세트테이프로만 발매되었던 이 작품들을 공들인 슬리브와 꼼꼼한 리마스터 작업이라는 멋진 새 옷을 입은 LP로 소유할 수 있게 된 즐거움은 꽤나 크다. 뭐랄까, 이제야 걸작이 ‘완성체’로 재탄생된 듯한 기분. 이제 편안히 앉아 세월의 간극을 훌쩍 뛰어넘은 멋진 사운드와 연주, 목소리에 흠뻑 빠져들 일만 남았다.
- 글 / 김경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