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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 2013년 04월 2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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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형 | 양장 도서 제본방식 안내 |
쪽수, 무게, 크기 | 240쪽 | 370g | 128*188*20mm |
ISBN13 | 9788957077337 |
ISBN10 | 89570773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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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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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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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국’의 자매편이며 소매치기가 주인공인 ‘쓰리’는 비교적 쉽고 편하게 읽혔던 작품입니다.
예전의 서평을 보니 “길지 않은 분량이기도 하거니와, 페이지가 하도 잘 넘어가는 바람에
두어 시간 만에 마지막 장까지 달렸습니다.”라고 적혀있습니다. (서평을 쓰기 시작한 초기라
야박하게 별 세 개만 주고 말았지만, 요즘 저의 잣대라면 네 개는 마땅한 작품입니다)
하지만 ‘왕국’은 인물들을 훨씬 더 사악하거나 복잡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달의 광기, 매춘과 욕망의 신화, 인간의 의지와 운명을 장악한 절대 악 등 수많은 상징들이
때론 묵직하게, 때론 은유적으로 작품 곳곳에 배치되어 있어,
자매편인 ‘쓰리’에 비해 결코 쉽고 편한 책읽기를 허락하지 않고 있습니다.
사건만 놓고 보면 내용은 심플합니다.
유리카는 비밀조직의 요원으로 추정되는 야다의 지시를 받고 기업이나 정부 고위직 남자들의
추잡한 사진과 동영상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 돈을 받는 고급 콜걸 출신의 ‘위장 창녀’입니다.
하지만 야다의 적대 세력으로 보이는 기자키에게 신분이 들통 나고 목숨을 위협받으면서
유리카는 본의 아니게 위험천만한 거짓 이중스파이 노릇을 하게 됩니다.
어떤 선택을 해도 살아남을 수 없다고 판단한 유리카는 위조여권으로 일본을 뜰 생각이지만,
도주를 목전에 둔 어느 날, 야다와 기자키 모두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간단한 줄거리만 보면 전형적인 할리우드 스파이 물의 공식을 따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왕국’의 구성에서 이런 통속적인 줄거리가 차지하는 비중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정작 몸통이 되는 이야기는
‘운명을 거부하는 한 여자와 남의 인생을 멋대로 설계하려는 한 남자의 대결’입니다.
‘쓰리’의 니시무라가 천재적인 소매치기지만 트라우마에 휩싸인 채,
조금은 과할 정도로 철학적이고 자기애(또는 자기혐오)가 강한 남자였다면,
‘왕국’의 유리카는 고아원에서 자라 고급 콜걸을 거쳐 비밀조직의 매춘 사기에 가담하게 됐고,
자신의 삶과 운명을 좌지우지하려는 이 세계의 온갖 힘을 배신하겠다는 ‘자기애’와
딱히 삶에 미련은 없지만 그렇다고 참혹하게 죽기는 싫다는 ‘자기혐오’로 똘똘 뭉친 채
아무런 희망도 미래도 없이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여자입니다.
거기에 덧붙여, 밤마다 뜨는 다양한 색깔과 모양의 달(月)에게 자신을 투사하며
때론 환멸하고, 때론 자조하고, 때론 사무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쓰리’의 니시무라보다 훨씬 더 심연에 가까운 캐릭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쓰리’에서 니시무라를 완벽하게 장악했던 기자키는
‘왕국’에서 유리카를 상대로 또다시 신에 버금가는 절대 악을 행사합니다.
그는 타인의 인생 경로는 물론 감정, 희망, 절망까지도 통제할 수 있는 신의 권능을 꿈꾸는데,
그 인생을 멋대로 희롱하다가 배신하고 망가뜨리고 싶은 대상으로 유리카를 점찍은 기자키는
결국 그녀를 야다와의 권력 투쟁에 이용함과 동시에
자신의 설계도대로 그녀의 삶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놓습니다.
유리카와 기자키는 극과 극의 위치에 서있으면서도 ‘배신’이라는 코드에 있어서만큼은
동류항으로 분류될 수 있는 아이러니한 면모를 지니고 있습니다.
기자키가 자신을 믿고 따르던 자를 한순간에 배신하면서 살해하는데서 쾌감을 느낀다면,
유리카는 욕망에 사로잡혀 자신의 몸을 탐내는 잘난 남자들을 배신함으로써
그들이 성취해온 것과 인생 자체를 박살내는데서 열기와 자유를 느끼는 인물입니다.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정말 공감하기 쉽지 않은 캐릭터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반사회적 인격 장애’에 가깝다고도 할 수 있는데,
‘왕국’에서는 이런 비범한(?) 인물들을 종종 목격할 수 있습니다.
거짓 사랑에 속아 절망에 빠진 여자를 보면서 성적으로 흥분하는 괴물이 있는가 하면,
선량함으로 남을 도와주다가 정작 상대가 구원을 받게 되면 분노를 느끼곤
“어째서 계속 불행하지 않은 것이냐?”며 너덜너덜하게 파멸시켜버리는 인물도 있습니다.
‘왕국’의 등장인물 중 인간적으로 평범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유리카를 이용해
추잡한 정보를 모으면서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거대조직에 복무하는 야다 정도뿐입니다.
마지막 장까지 다 읽은 후의 첫 느낌은 솔직히 말하자면 ‘So what?’이었습니다.
범인을 잡아 진실이 드러나는 이야기도 아니고,
비장한 새드 엔딩이나 유쾌한 해피 엔딩도 아니며,
그렇다고 눈물이든 분노든 감정의 폭발을 끌어내는 마무리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저것 생각할 여지나 여운이 많이 남는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무의미한 삶, 고통스러운 기억, 타인에 대한 지배, 운명이란 존재하는가, 등등...
추정이지만, 작가는 독자에게 어떤 특정한 공통된 정서를 강요할 생각도 없었고,
또, 그런 공통된 정서를 느끼기를 원하지도 않은 것 같다는 느낌입니다.
절대 악과 운명에 대한 자신만의 철학이나 가치관을
인류 최초의 직업인 창녀와 소매치기를 등장시킨 두 편의 작품을 통해 내보였고,
공감과 반감은 철저히 독자의 몫으로 남겨놓았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인지 유리카나 기자키의 삶의 방식이나 그들의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느낌은
글로 표현해봤자 지독히 주관적인 궤변일 수밖에 없을 것 같아 서평에 담지 않기로 했습니다.
나카무라 후미노리의 팬이더라도 ‘왕국’에 관한 한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다만, 자매편인 ‘쓰리’와 ‘왕국’을 다 안 읽은 독자라면, ‘쓰리’부터 읽을 것을 권하고 싶고,
혹시 ‘왕국’을 읽고 실망한 독자라면, 꼭 ‘쓰리’를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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