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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발행일 | 2020년 03월 2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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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604쪽 | 128*188*35mm |
2024년 09월 09일 ~ 2024년 10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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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9월 20일 ~ 2024년 11월 30일
소진시
9월의 굿즈 : 타공 정리함/클립 북 라이트/디즈니 캐릭터 태블릿 파우치/손잡이 텀블러/메쉬 펜 파우치
2024년 08월 30일 ~ 2024년 09월 30일
2024년 09월 01일 ~ 2024년 09월 30일
상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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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네덜란드 화가인 히에로니무스 보쉬(Hieronymus Bosch)는 해석하기 어려운 그림으로 유명하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동시대 사람이었지만, 우아함으로 상징되는 르네상스 화풍과는 다르게 기괴하고 화려하고 몽환적인 그림들을 그렸다. 그는 대체로 인간의 죄와 부도덕함을 상징하는 그림들을 대형 패널에 그리는 걸 즐겼다.
그의 그림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쾌락의 정원 (The Garden of Earthly Delights)>인데, 세폭 제단화 (Triptych) 형식으로 그려진 이 작품에는 천국(에덴 동산)과 지옥을 모두 담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가운데 패널인데, 이 그림은 천국과 지옥 사이, 그러니까 현재의 세상을 의미한다는 게 보편적인 해석이다. 그런데 보쉬가 해석한 ‘현세’란 인간의 악행으로 타락한 지상의 낙원이다. 인간 세계는 점차 타락하고 있으며, 그리하여 유토피아였던 세계가 점점 지옥으로 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보편적인 해석 외에도 이 세 점의 그림을 모두 지옥 시리즈로 보거나 그와는 상반되게 그림 전체를 잃어버린 에덴이나 천국으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다면 천국과 지옥이 매한가지라는 것인데, 무엇이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것일까
여기서 간과하면 안 되는 것은 보쉬가 그린 세계는 자신이 살고 있던 세상을 바탕으로 한 것이고, 그가 생각한 천국이나 지옥은 가공의 장소나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 세계를 묘사한 것이라는 점이다.
그렇게 보자면 <쾌락의 정원>의 가운데 패널에 있는 다양한 인간군상들의 내면세계가 바로 이 그림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모습이기도 하다.
까뮈는 『페스트』에서 죽음을 당면한 인간 군상들의 천태만상을 보여준다. 총 5부로 나눠진 이 작품은, 194X년 4월 16일 시작된 페스트가 다음해 1월에 끝나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데, 페스트 발생으로 죽음의 공포에 휩싸인 오랑의 시민들이 경험한 10개월을 각 부마다 한 계절씩 기술하고 있다. 즉 1부에서는 봄을 2부에서는 여름을 3부에서는 가을을 4부에서는 겨울을, 그리고 마지막 5부에서는 해가 바뀌고 페스트가 종식된 상황을 시간순으로로 서술한다. 따라서 이 작품을 읽는 동안 독자들은 ‘페스트’를 직면한 사람들이 어떻게 동요하고 어떤 심리 상태를 겪으며 어떤 식으로 행동을 하게 되는지 등의 변화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이하의 내용을 통해 드러나게 되겠지만, 그것은 보쉬가 그린 <쾌락의 정원> 속 사람들과 매우 유사하다.
봄
리외가 죽은 쥐를 처음 발견한 4월 16일 이래로 불과 나흘만에 쥐들은 떼지어 나와서 죽기 시작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그저 약간 혐오스러운 사건이라고 불평할 정도였지만, 곧 시민들의 불안은 공포에 가까워진다. 이로 인한 죽음이 하급 일용직이나 빈민들에게만 국한된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면서부터다.
도시 전체가 열병으로 푹푹 찐다. 그러나 쥐 문제를 유난스럽게 보도하던 신문들은 일제히 침묵한다. 쥐는 거리에서 죽었지만, 사람들은 방 안에서 죽어 갔기 때문이다. 신문은 눈에 보이는 일에만 신경을 쓴다.
그 사이 사망자 수가 몇 배로 껑충 뛰고, 사람들은 페스트 앞에서 속수무책이 된다. 오랑 시민들은 무작정 이 재앙이 오래가지 않을 거라 믿고 싶어한다.
겉으로는 여느 봄날과 다르지 않았지만 나날이 사망자가 늘어가자, 도지사가 페스트 사태를 공표하고 도시를 폐쇄하기에 이른다.
여름
페스트를 공표한 순간부터 페스트는 모두의 문제가 된다. 사람들의 허약함이 즉시 드러난다. 시민들은 비이성적이 되어간다. 가령, 술이 감염성 질병을 예방해준다는 검증되지 않은 속설 때문에 음주량이 폭증한다. 격리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생기겨서 경찰과 무장 군인까지 개입하는 상황도 발생한다.
편지가 감염 매체가 되는 것을 막고자 모든 우편물의 왕래가 전면 금지되자 가족이나 연인과 떨어진 사람들의 고통이 더욱 커진다.
감염자들이 점점 늘어나 학교 건물을 빌려 임시로 꾸민 500개 병상이 거의 다 찬다.
사람들은 페스트가 불시에 왔듯이 불현듯 떠나길, 그렇게 국면이 전환되길 간절히 바란다.
더위와 페스트 때문에 일부 시민들이 자제력을 잃고 폭력을 쓰기 시작하고, 봉쇄된 관문의 감시망을 뚫고 야간 탈출을 시도하는 사람들도 생겨난다.
주당 거의 700명을 헤아리는 희생자 수의 급상승에 더위까지 맞물려서, 오랑 시 전체가 엄청난 실의에 빠진다. 페스트와 더위라는 이중 압박이 지속되자, 관광업도 파산한다.
종이 부족으로 일간지들이 부득이 지면을 줄이는 와중에도 <전염병일보>가 창간하는데, 신문의 지면은 곧 페스트 예방에 효력이 확실하다는 신상품들의 광고에 할애된다.
전염병이 확산되면서 윤리 의식도 느슨해진다. 페스트 초기에는 사람들이 종교적이 되었으나 이 병의 심각성을 알게 될수록 향락적이 되어간다.
그러나 몇몇 뜻있는 자원자들을 주축으로 보건위생대가 조직된다.
가을
사실상 8월 중순에는 페스트가 모두를,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더 이상 개인의 운명은 없었다. 오직 집단의 운명만 있었다. 페스트가 빚어낸 운명과 감정을 모두가 공유했다. (p.182)
생존자들의 폭거, 사망자들의 매장, 생이별한 연인들의 고통이 이어졌다. 페스트가 외곽에서 번화가까지 공략했고 사람들은 바람을 감염의 주범으로 비난했다. 격리에서 풀려난 사람들의 방화도 잇따랐다. 등화관제가 실시됐다. 식량 부족 문제가 불거지면서, 직접적 관심이 민생으로 쏠렸다.
사람들은 음식을 구하기 위해 줄을 서고 수속을 밟고 서류를 갖추는데만도 진이 빠져서,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죽어 나가는지, 또 자신은 어떻게 죽게 될지 생각할 겨를 조차 없다. 페스트로 경제활동이 붕괴되자 상당한 수의 실업자가 발생했다.
8월부터 사망자 수가 계속 정점을 찍어 시의 공동묘지가 포화에 이르자, 영구임대묘지의 유해들이 화장터로 보내졌고 곧이어 페스트 사망자들도 화장터로 보내졌다.
9월과 10월 두 달 동안, 오랑 시는 페스트의 발 아래 굴복했다. 페스트가 수주일간 정체 상태로 지루하게 이어졌기 때문이다.
겨울
의료진들도 점점 지쳐갔다. 보건위생대 사람들도 누적된 피로를 감당해내기 어려웠다.
사람들은 조금씩 피로에 무너져 탈진했고, 이로 인해 나태해져 스스로의 생활을 망가뜨렸다. 점점 더 자주, 자신들이 세운 위생 규칙에 소홀해지고, 스스로 시행했어야 할 소독 조치들을 까먹고, 심지어 페스트 환자의 집에 감염 예방 조치도 전혀 하지 않고 방문하기도 했다. 바로 이 점이 진짜 위험했다.
사람들은 꾸준히 성당에 나가는 대신 허황된 미신들에 빠져들었다. 미사에 참석하기보다는 수호용 목걸이나 성 로크의 부적을 지니는 데 더 적극적이 되었다.
11월이 되자 페스트가 다소 진정되는 듯 보였고 이 즈음 새 혈청을 이용한 치료가 몇 건 성공한다. 의사들과 의료진은 탈진할 정도의 노력을 쏟았다. 초인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일을 소화해내고 있었다.
이와중에도 부유층들은 부족한 것이 거의 없이 누리는 반면, 빈곤한 가정들은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신문들은 ‘무조건적 낙관론’이라는 하달된 지침을 철저히 따랐다.
12월 내내, 페스트는 정체없이 전진했고, 오랑 전체가 내일은 없는 것처럼 살아갔다.
그해 성탄절은 복음의 축제라기보다는 차라리 지옥의 축제가 된다.
그러다 쥐들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고, 통계에서도 병의 감소세가 보이기 시작한다.
이듬해
페스트는 올 때와 마찬가지로 슬그머니 떠나고 있었다. 시민들은 극도의 낙관과 지독한 비관을 번갈아 가며 겪었다. 그러나 물가가 현저하게 떨어지고, 시의 두 수도원이 다시 활동하기 시작하고, 군인들도 빈 병영에 재집결하는 것이 큰 징조가 되었다.
1월 25일 도청이 공식적으로 종식 선언을 발표한다. 그리고 2월의 어느 날 봉쇄되었던 도시의 관문들이 열린다.
이상이 리외가 관찰자이자 기록자로서 서술한 ‘페스트’의 연대기이다.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코로나 팬더믹의 상황과 거의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페스트와는 달리 이 팬더믹은 언제 종결될지 기약이 없다는 점만 빼놓고 말이다.
까뮈는 리외의 입을 통해 “이 연대기는 그저, 성자가 될 수 없지만 재앙에 굴복하기도 거부하기에, 각기 다른 아픔들 속에서도 의사로서 최선을 다했던 모든 이들이 공포에 맞섰던 기록이자, 앞으로도 결코 끝나지 않을 공포의 가차없는 맹습에 맞서서 확실히 수행해야 할 것들에 대한 기록일 뿐이다.” (pp.327-328)라고 말한다.
즉 『페스트』는 ‘페스트’라는 질병이 어떻게 시작해서 어떻게 소멸했는지의 과정을 기술한 연대기이기도 하지만, ‘페스트’라는 공포에 직면했던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페스트』는 ‘페스트’라는 재앙 앞에서 절망하거나 침묵하거나 요행을 바라는 사람들의 천태만상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방법으로 페스트를 이해하고 그에 대응하는 쪽을 선택한 사람들도 보여준다. 그 중에서 까뮈가 주목한 것은 ‘페스트’의 재앙과 공포에 맞선 사람들, 까뮈 식으로 표현하자면 ‘부조리에 투쟁하는’ 인물들이다. 『페스트』는 이들에 대한 기록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그중 우선적으로 주목하게 되는 사람들은 서로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는) 리외와 파늘루 신부이다.
베르나르 리외는 의사로서 페스트 초창기부터 페스트를 인지하고 환자들을 치료한다. 감염자가 급속히 늘어나면서 자신이 하는 일이 페스트 치료가 아니라 페스트 선고가 되고 그래서 사람들에게 인정머리 없다는 비난과 오해를 받으면서도 리외는 하루에 스무 시간 이상씩 묵묵히 소임을 감당한다.
그에 비해 파늘루 신부는 신앙에 의존하는 종교적 인물이다.
이 둘의 차이는 타루와 리외의 대화를 통해 극명하게 드러난다.
타루가 신을 믿느냐고 묻자 리외는 “아뇨.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죠? 나는 어둠 속을 헤매고 있지만, 또렷이 보려고 애쓰고 있습니다.”(p.135)라고 대답한다. 타루는 그게 리외와 파늘루 신부를 가르는 점이라 지적한다. 타루가 다시 왜 헌신하냐고 묻자 리외는 신의 전능함을 믿지 않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그러면서 신 역시 하늘만 바라보기보단 ‘자기를 믿지 않고 온 힘을 다해 죽음과 싸우는 걸 더 좋아할’(p.138)거라고 말한다.
리외는 신을 믿지 않지만 그렇기 때문에 온 힘을 다 해 죽음과 싸우는 쪽을 택한다.
그에 비해 파늘루 신부는 모든 것을 신의 뜻이라 생각한다. 페스트 역시 신이 내린 심판의 결과물이므로 인간으로서 응당 받아들여야만 하는 숙명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리외에게서 파늘루 신부의 강론 내용을 들은 타루는
“파늘루가 옳아요. 죄 없는 사람이 두눈을 파인 경우 기독교인이라면 신앙을 잃거나 눈이 파인 것을 받아들이거나 해야죠. 파늘루는 신앙을 잃고 싶지 않으니까 끝까지 갈 겁니다. 그는 그걸 말하고 싶었던 거예요.” (p.243)라고 파늘루의 입장을 이해한다.
하지만 기독교인으로서 파늘루가 모든 것을 신의 뜻으로 생각한다고 해서, 그가 현실의 상황을 외면하는 건 아니다.
판사 오통 씨의 아들 필리프가 혈청을 투여한 뒤에도 결국 죽게 되자 리외는 파늘루에게 화를 낸다. 그때 파늘루는 우리 모두 인간의 구원을 위해 일하고 있다고 말한다.
“인간의 구원이라니 너무 거창한 말입니다. 그렇게까지 고상한 목표는 없어요. 내 관심은 인간의 건강이에요. 건강이 최우선입니다.” (p.232)라고 리외가 반박하는 지점에서 이 둘의 의견은 정확하게 갈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리외도 자신이 미워하는 건 죽음과 악이는 걸 인정하며 “원하시든 그렇지 않든, 우리는 동맹입니다. 함께 그것들을 겪고 함께 싸우고 있죠.”(p.233)라고 말한다. 파늘루 역시 이에 동의해 보건위생대에 들어가고 항상 선두에 서서 페스트에 맞선다.
페스트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입장은 그들이 추구하는 신념이나 목표에 따라 차이가 있었지만, 리외와 파늘루는 의사와 신부로서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함께 한 것이다. 큰 재앙 앞에서 인본주의자냐 신본주의자냐는 중요하지 않다. 각자의 최선을 다해 재앙에 맞서는 게 중요할 따름이다.
프랑스 파리에서 온 신문기자 레몽 랑베르는 공동체보다는 개인을 중시하는 인물을 상징한다. 그는 오랑이 연고지도 아니고 파리에 두고 온 연인도 있었기 때문에 모든 수단을 강구해 오랑을 빠져나가려는 한다. 급기야 그는 밀항까지 시도한다. 스페인 내전에 종군했던 랑베르는 사람들이 관념이나 영웅주의 때문에 죽는 게 지긋지긋하다. 그런데 리외가 “이 모든 일은 영웅주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어요. 이건 도의의 문제예요. 웃기게 보일지 모르지만, 페스트와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도의뿐입니다.”(p.179)라고 말하는 걸 듣고 자신이 오랑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방인’이 아니라는 걸 자각한 후 보건위생대 일에 참여해 페스트에 맞서 열심히 싸운다.
랑베르처럼 오랑 시민이 아니라 외부인이었던 장 타루의 경우엔 심지어 자원자들을 모집해서 보건위생대를 조직하기까지 한다. 타루는 자신이 본 걸 수첩에 기록하는 사람인데, 페스트 초창기의 일종의 연대기는 그의 기록에 의거한 것이다. 일반적인 역사가라면 건너뛰었을 것들을 두서 없이 일기 형식으로 적었지만, 그의 기록엔 그 시기의 매우 중요한 세부 사항들을 많이 담고 있다.
타루는 국면국면에서 상황을 분별력 있게 해석하고, 사람들을 설득하고 이해시키는 일을 한다.
예를 들어, 많은 사람들이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을 때 전염병이 모두의 문제이기 때문에 모두가 제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설득한 인물이 바로 타루였다. 코타르가 페스트가 너무 강해 헛수고라고 할 때도 “두고 보면 알겠죠. 우리가 모든 노력을 다 해 본 후에요.” (p.172)라고 말하며 섣불리 낙담하지 않은 것도 타루였다.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페스트와 싸운다.
『페스트』에서 까뮈는 자신이 주장하고자 하는 바를 드러내기 위해 종종 타루와 리외의 대화를 사용한다.
“신없이 성자일 수 있느냐, 이것이 오늘날 내가 겪고 있는 단 하나의 구체적인 문제입니다.”(p.272)라고 타루가 말하자 리외는 “나는 성자들보다는 패배자들과 더 연대감을 느껴요. 나는 영웅주의나 신성함에는 취미가 없는 것 같습니다. 내 관심사는 인간이에요.”(p.273)라고 대답한다.
신을 믿지는 않으나 성자가 되고자 한 타루와, 영웅이 되고자 하는 마음 없이 패배자들과의 연대감을 느끼며, 신이 아니라 오직 인간에게만 관심이 있었던 리외는 함께 페스트에 맞선다. 인간들 사이의 ‘공감’과 ‘우정’을 바탕으로 한 유대감과 결속력에 의거해서 말이다.
그리고 여기, 또 한 명 주목할 사람이 있다. 바로 시청 서기 조제프 그랑이다.
그랑은 시청의 별볼일 없는 하급 서기이다. 22년 전 이 일을 시작한 이래로 계속 임시직일 뿐만 아니라 쥐꼬리만한 급여를 받고 있다. 키가 크고 마른데다 몸에 맞지 않는 큰 옷만 입고 윗니까지 다 빠진 별볼일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정직하게 노동해서 생계를 해결하는 사람이고, 자신의 선한 감정에서 나오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다. 리외는 매우 이성적고 냉철한 사람이지만, 그랑과 같이 소박한 공무원이 있는 오랑이라면 페스트가 기승을 부리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생긴다. 그 정도로 그랑은 묘하게 무해한 사람이다. 그랑 역시 자신의 시간을 쪼개 리외를 돕고 보건위생대에서 봉사한다.
결국 이렇게 선량한 사람들이 선의로 모여‘함께’ 페스트에 맞서 오랑을 지켜낸다.
사람들은 ‘페스트’라는 거대한 재앙, 극한의 절망과 대면하여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삶의 방식을 선택한다.
도지사를 비롯한 행정공무원들은 지금 유행하고 있는 것이 ‘페스트’라는 전염병임을 공인해야 하는지 여부를 두고 시간을 지체하며 고민한다. 이 때, 중요한 건 어휘가 아니라 시간이라며 시민들의 안전을 위해 공표를 서두르라고 한 건 리외였다. 언론들이 민심의 안정을 빌미로 위에서 하달된 내용만을 그대로 발표하는 쪽을 택했을 때,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며 보건위생대를 조직한 것은 타루였고, 그에 동의해 함께 뜻을 모은 사람들이 보건위생대 일에 자원한다.
까뮈는 이러한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면면을 보여줌으로써, 천국을 만드는 것도 지옥을 만드는 것도 결국 인간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코로나 팬더믹을 경험하고 있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거대한 재앙의 시대를 살고 있지만,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지옥이 되지 않는 것은, 『페스트』에서 까뮈가 설파한대로 인간에게는 성실과 연대가 있기 때문이다.
리외를 인용해서 말하자면, “이 세상에는 매번 재앙과 희생자가 있고, 무엇이 되느냐는 우리가 얼마나 재앙의 편이 되기를 거부하느냐에 달려”있다.
중요한 것은 자기 본분을 충실히 수행해 나가는 것이었다. (p.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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