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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조앙 피레스 DG 녹음 전집 (Maria Joao Pires - Complete Recordings On Deutsche Grammophon)

[ 38CD 박스 세트 / 한정반 / 오리지널 커버 슬리브 ]
Wolfgang Amadeus Mozart, Frederic Chopin, Franz Schubert, Robert Schumann, Johann Sebastian Bach 작곡 외 21명 정보 더 보기/감추기 | Universal / Deutsche Grammophon | 2020년 09월 18일 리뷰 총점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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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조앙 피레스 DG 녹음 전집 (Maria Joao Pires - Complete Recordings On Deutsche Grammoph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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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매일 2020년 09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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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소개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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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스트 소개 (26명)

작곡 : Wolfgang Amadeus Mozart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
서양 고전주의 음악의 완성자이자 현재까지도 전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음악가. 35년의 생애 동안 교향곡, 협주곡, 소나타, 오페라, 실내악, 미사곡 등 600개가 넘는 작품을 남겼으며 많은 작품이 각 장르의 정점에 있다고 평가받고 있다. 다섯 살 때 첫 작곡을 했으며 열네 살 때 이탈리아 여행 중에 오페라 [폰투스의 왕 미트라다테스]를 무대에 올려 대성공을 거두었다. 좋은 일자리를 얻기 위해 몇 차례에 걸쳐 유... 서양 고전주의 음악의 완성자이자 현재까지도 전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음악가. 35년의 생애 동안 교향곡, 협주곡, 소나타, 오페라, 실내악, 미사곡 등 600개가 넘는 작품을 남겼으며 많은 작품이 각 장르의 정점에 있다고 평가받고 있다. 다섯 살 때 첫 작곡을 했으며 열네 살 때 이탈리아 여행 중에 오페라 [폰투스의 왕 미트라다테스]를 무대에 올려 대성공을 거두었다. 좋은 일자리를 얻기 위해 몇 차례에 걸쳐 유럽 전역을 여행했으나 경이적인 음악의 신동이라는 평판과 작품들의 대성공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그것을 얻는 데 실패했다. 고향인 잘츠부르크로 돌아와 궁정 오르가니스트로 잠깐 동안 일했으나 대주교와의 불화로 해고되고 이후 빈으로 거처를 옮겨 작곡과 연주에 전념했다. 피아니스트, 작곡가로서의 높은 명성과 [피가로의 결혼], [돈 조반니] 등 오페라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당시 그것에 대한 보수는 그의 형편없는 경제관념과 낭비벽을 감당하기에는 충분치 않았다. 안정적인 예술 활동을 위해서는 궁정이나 귀족으로부터의 후원이 필수적이었던 시대에 높은 급료를 안정적으로 지급받을 수 있는 일자리를 죽을 때까지 얻지 못했던 모차르트는 짧은 생애 동안 주로 생계를 위해 곡들을 썼고, 만년에는 닥치는 대로 주위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 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그런 불안정한 생활 속에서도 모차르트의 창작열은 죽기 직전까지 조금도 식지 않아 음악사에 영원히 남을 수많은 작품들을 썼다. 모차르트의 천재성에 관한 일화는 무수히 많은데 바티칸에서 외부에 그 악보를 공개하지 않고 있던 비곡 알레그리의 [미제레레]를 처음 듣고 거의 완벽하게 채보했고 이틀 뒤 두 번째에는 몇 개의 소소한 것들을 수정해 악보를 완성했다. 모차르트에 의해 처음으로 [미제레레]는 일반에 악보가 공개되었다. [교향곡 36번]을 사흘 만에 작곡했고 그의 3대 교향곡으로 평가받는 [교향곡 39번]부터 [교향곡 41번]까지를 6주 만에 완성했다. 모차르트 스스로 자신은 음악에 대한 천재를 타고났다고 자부했으나 작곡을 위해서 자신보다도 많은 시간을 생각하고 거장들의 작품을 연구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고 단언했을 정도로 그는 음악에 전념한 천재이기도 했다. 모차르트의 작품은 가볍고 경쾌한 장조의 작품이 대부분인데 만년에 접어들어서는 장조의 작품이라도 비장함과 애수에 넘치는 작품이 늘었고, 그런 작품들은 ‘천상의 음악’이라고 형용되었다. 죽기 두 달 전 건강이 이미 안 좋은 상황에서도 [마적]을 작곡해 초연하는 등 정력적으로 곡들을 썼으나 미완의 걸작 [레퀴엠]을 쓰던 도중 쓰러져 불과 2주 뒤에 35년 10개월의 젊은 나이로 빈에서 사망했다. 모차르트의 [레퀴엠]은 하이든, 베버, 베토벤, 슈베르트, 쇼팽, 로시니, 베를리오즈 같은 음악가들뿐 아니라, 실러, 괴테, 나폴레옹을 비롯해 많은 저명인사와 유럽 왕족들의 장례식에서 연주되었다.
프레데리크 프랑수아 쇼팽(프랑스어: Frederic Francois Chopin, 문화어: 프리데리끄 프랑쑤아 쇼뺑, 1810년 3월 1일 ~ 1849년 10월 17일)은 폴란드의 피아니스트·작곡가이다. “피아노의 시인” 이란 별칭을 가진 쇼팽은 가장 위대한 폴란드의 작곡가이자 가장 위대한 피아노곡 작곡가 중의 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프레데리크 프랑수아는 그가 20세 때 폴란드를 떠나고 프랑스에서 살게 되었... 프레데리크 프랑수아 쇼팽(프랑스어: Frederic Francois Chopin, 문화어: 프리데리끄 프랑쑤아 쇼뺑, 1810년 3월 1일 ~ 1849년 10월 17일)은 폴란드의 피아니스트·작곡가이다. “피아노의 시인” 이란 별칭을 가진 쇼팽은 가장 위대한 폴란드의 작곡가이자 가장 위대한 피아노곡 작곡가 중의 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프레데리크 프랑수아는 그가 20세 때 폴란드를 떠나고 프랑스에서 살게 되었을 때 쓰던 프랑스어 이름이다. 원래 이름은 프리데리크 프란치셰크 쇼펜(폴란드어: Fryderyk Franciszek Chopin, 문화어: 프리데리끄 프란찌쉐끄 쇼뺑)이다. ch는 폴란드어에서는 'h' 발음이 나지만, Chopin은 프랑스계 성씨이기 때문에 '쇼팽'이라고 발음한다. 폴란드어에서는 '쇼팽의'는 'Chopina'로 격변화하게 되는데, 이를 '쇼페나'라고 발음한다. 폴란드어에서는 'Szopen'(쇼펜)이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쇼팽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세운 바르샤바 공국으로부터 서쪽으로 46km 정도 떨어져 있는 도시인 젤라조바볼라에서 태어났다. 교구의 세례 기록에는 그의 생일을 1810년 2월 22일로, 이름을 라틴어로 프리데리쿠스 프란치스쿠스(라틴어: Fridericus Franciscus)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폴란드어로 프리데리크 프란치셰크가 된다. 그러나 쇼팽과 그의 가족들은 생일을 3월 1일로 기록하는데, 현재 학계에서는 이 날짜를 진짜 생일로 인정한다.

프리데리크 쇼팽의 아버지인 니콜라 쇼팽(영어:Nicolas Chopin)은 프랑스 로렌 출신으로, 16세가 되던 1787년에 폴란드로 이주해왔다. 니콜라는 폴란드의 귀족 자제들을 가르쳤고, 1806년에는 그가 가르쳤던 가문 중 하나인 스카르벡(Skarbek)의 가난한 친척인 테클라 유스티나 크리자노프스카(폴란드어: Tekla Justyna Krzyzanowska)와 결혼했다. 프리데리크 쇼팽은 부모가 결혼식을 올린 브로후프(Brochow)에 있는 교회에서 1810년 4월 23일, 부활주일에 세례를 받았다. 이 때 니콜라 쇼팽의 18살짜리 제자인 프리데리크 스카르벡을 대부로 삼았는데, 프리데리크라는 이름도 그에게서 따온 것이다. 프리데리크 쇼팽은 둘째이자 외아들로, 누나인 루드비카(Ludwika, 1807~1855), 여동생 이자벨라(Izabela, 1811~1881)와 에밀리아(Emilia, 1812~1827)가 있었다. 니콜라는 폴란드에 헌신했으며, 가정에서도 폴란드어를 주로 사용하게 했다.

프리데리크가 태어나고 6개월이 지난 1810년 10월, 니콜라가 바르샤바 고등학교 (대학 전단계 학교, 1804~1831에 존재했음)(영어:폴란드어: Liceum Warszawskie)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치게 됨에 따라 바르샤바에 있는 작센 궁정(영어:Saxon Palace) 1층으로 이사한다. 니콜라는 거기서 플루트와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어머니는 하숙집 소년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쳐주었다. 프리데리크의 체격은 왜소했으며, 어린 시절에 병에 자주 걸렸다.

그의 누이인 루드비카는 피아노를 배웠는데 종종 자신의 동생 프레데리크에게 놀이처럼 피아노를 가르쳐 주었다. 루드비카는 프레데리크의 재능을 눈치채었고, 결국 그들의 부모는 프레데리크가 공식적인 레슨을 받도록 한다. 공식적인 레슨을 처음 받게 된 것은 체코 음악가 보이치에흐 지브니(영어:폴란드어 Wojciech ?ywny)에게 1816년부터 1821년까지 교습을 받으면서 부터다. 누나 루드비카도 지브니에게 레슨을 받으며 프리데리크 등 남동생들과 가끔 듀엣을 하기도 했다. 쇼팽은 일찍부터 두각을 나타내어 7살 무렵에는 공개 콘서트를 열기 시작했고, 사단조, 내림나장조의 두 폴로네이즈를 작곡했다. 1821년에는 내림가장조 폴로네이즈를 작곡해 지브니에게 헌정하는데, 그 원고는 아직까지 남아있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쇼팽 원고가 된다. 12세 때부터 엘스너에게 작곡 레슨을 받았으며 나중에 엘스너가 세운 바르샤바 음악원에서 들어가게 된다.

1817년 작센 궁전은 바르샤바의 러시아 총독에 의해 군사용으로 징발되었고, 바르샤바 강당은 오늘날 바르샤바 대학교의 총장 집무실인 카지미에슈 궁정(영어:Kazimierz Palace)에 다시 세워졌다. 쇼팽가는 카지미에슈 궁정에 인접한 건물로 이사한다다. 이 기간 동안, 프리데리크는 폴란드 입헌왕국의 통치자인 콘스탄틴 파블로비치 대공에게 초대받아 그 아들과 종종 놀았는데, 거기서 피아노를 연주하고 파블로비치 대공을 위한 행진곡을 작곡했다. 율리안 우르신 니엠체비치(영어:Julian Ursyn Niemcewicz)는 그의 극적 에클로그 《우리들의 담론Nasze Przebiegi"(1818년)》에서 "꼬마 쇼팽"의 인기를 증언하고 있다.

1822년 스승은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다고 하여 스스로 그만두었다.

이후 쇼팽은 바르샤바 콘소바토리의 교수이자 피아니스트인 빌헬름 뷔르펠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14세 때 바르샤바 중학교에 입학하여 작곡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연극에도 흥미를 가지고 희곡을 써서 공연하기도 하였다. 1826년 바르샤바 음악원에 입학하였으며, 1829년 <피아노 협주곡 제2번>을 발표하고 빈에서 연주회를 열어 이름을 떨치자, 유럽 여러 나라로 연주 여행을 떠났다. 그가 빈에 도착하였을 때 바르샤바에 혁명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아버지에게 조국을 위하여 싸우겠다는 편지를 보냈으나, 아버지로부터 조국을 위해 음악을 열심히 하는 길도 애국이라는 답장을 받고, 열심히 노력한 결과 폴란드가 낳은 최초의 세계적인 음악가가 되었다.

1831년 파리에 도착하여 바르샤바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혁명이라는 격정적인 연습곡을 작곡하였다. 1832년 파리에서 최초의 연주회를 열어 성공함으로써, 그 후 파리 사교계의 유명한 인물이 되었으나 그는 늘 조국과 친구와 가족을 걱정하며 고독한 생활을 하였다. 그는 즉흥 연주에도 뛰어났으며, 침착한 성품으로 그의 전주곡이나 연습곡은 예술적 수준이 높은 곡들로 이루어져 있다.

1830년대 초중반의 파리는 작곡가를 위한 시기였다. 쇼팽이 유명한 작품들을 남긴 것이 이 때이다. 1838년경에 그는 파리 시민들에게 유명해졌다. 그의 친구로 프란츠 리스트, 빈첸초 벨리니, 외젠 들라크루아가 있었다. 쇼팽은 헥토르 베를리오즈와 로베르트 슈만과도 친했는데, 그들의 음악을 비판하기도 했지만 그들에게 작품을 헌정하기도 했다.

1836년에 쇼팽은 17살의 폴란드 소녀인 마리아 보진스카와 비밀 약혼을 했고 나중에 취소했다. 같은 해에, 마리 다굴 백작 부인이 연 파티에서 쇼팽은 소설가이자 애인인 조르주 상드를 만났다.

쇼팽과 상드의 연애관계는 1830년대 후반에 시작되었다. 그들의 애정 관계는 9년간 지속되었고, 쇼팽의 건강 악화와 상드의 자녀들 문제로 헤어졌다.

쇼팽과 조르주 상드는 스페인 마요르카의 버려진 가톨릭교회 수도원인 발데모사수도원 근처의 오두막에서 지낸 적이 있는데, 1838년 ~ 1839년 겨울에는 혹독한 추위가 닥쳤다. 쇼팽은 파리에서 먼 길을 거쳐 피아노를 가져와서 언덕에 있는 수도원으로 옮겨야만 했다. 쇼팽은 그 절박한 시간의 기분을 스물 네 개의 전주곡(작품번호 28)에 담았다. 그 작품의 대부분은 마요르카에서 쓰여진 것이다. 추위는 쇼팽의 건강과 폐병에 큰 타격을 주었고, 그와 조르주 상드의 관계가 불륜으로 의심받아 비난과 푸대접을 받았다. 결국 파리로 돌아가야만 했다. 쇼팽은 그 일 이후로 건강을 회복하지 못했다.

1840년대에 쇼팽의 건강은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그와 상드는 노앙을 포함한 많은 곳으로 여행을 다녔지만 소용이 없었다. 1849년 쇼팽은 모든 작품을 완성하고 마주르카와 녹턴에만 전념했으며, 건강이 좋지 않았음에도 러시아의 폴란드 혁명진압으로 발생한 난민들을 위한 연주회에 참여하였다. 그의 마지막 곡은 마주르카 바 단조로 러시아의 지배를 받는 폴란드를 생각하면서 지은 민족주의적인 곡이다.

1849년 10월 17일 쇼팽은 사망했다. 공식적인 사인은 폐결핵이지만 그의 친지가 부검한 결과가 이전 검진결과와 다르다는 점 때문에 낭포성 섬유증이나 폐기종 같은 다른 질병을 앓지 않았느냐는 주장도 있다.

로마 가톨릭 성 마들렌 교회에서 열리게 된 그의 장례식에는 그의 유언에 따라 모차르트의 레퀴엠 을 연주하기로 했다. 레퀴엠에는 여자 성악가의 역할이 크지만 마들렌 교회에서는 합창단에 여자 가수를 허용하지 않았다. 이에 대한 마찰 때문에 장례식이 2주 동안 연기되었고, 결국 교회 측에서 쇼팽의 마지막 소원을 위해 양보했다. 쇼팽의 시신은 파리 Pere Lachaise에 안장되었다. 그의 심장은 누나 루드비카 옝제예비치(Ludwika Jedrzejewicz)가 전달 받아 폴란드로 가져간 뒤 바르샤바의 성 십자가 성당에 있는 기념비 밑에 안치되었다.

21세기에 들어 보존된 그의 심장이 담긴 병을 열지 않고 관찰한 결과 심낭염으로 사망했다는 소견이 나왔다. 쇼팽이 앓았던 결핵은 심낭염의 일종인 결핵성 심낭염의 원인이다.

쇼팽은 필드가 창시한 살롱음악인 녹턴을 깊고 세련된 장르로 승화시켰으며, 일반적인 춤곡인 폴란드의 마주르카나 빈의 왈츠의 선율과 표현의 폭을 넓혔다. 또한 전주곡을 독립적인 장르로 만든 장본인이다.

쇼팽의 곡은 독특한 선율로 많은 대중들에게 공감을 만들어낸다. 그중에는 《혁명 연습곡》과 《강아지 왈츠》가 있다. 《장송 행진곡,전주곡 제 4번》은 지금까지도 슬픔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곡으로 쓰이고 있다. 《즉흥환상곡》 은 쇼팽 시절의 오페라 선율을 모방하면서 그만의 독특한 반음계를 구사한 곡이다. 쇼팽은 노래하는 목소리의 아름다움을 재현하기 위해 피아노를 쓴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리고 종종 자신이 도니제티와 빈첸초 벨리니로부터 가장 큰 영향을 받는다고 말했다.

쇼팽의 작품과 재능은 다른 작곡가에게 영향을 많이 주었다. 슈만은 쇼팽의 선율을 따서 작곡한 그의 《사육제》를 쇼팽에게 헌정했다. 프란츠 리스트는 그의 《Harmonies Poetiques et Religieuses》 가운데 한 악장인 〈Funerailles〉를 쇼팽에게 헌정했고 그 때가 의미심장하게도 1849년 10월이었다. 그 곡의 중간 부분은 쇼팽의 유명한 폴로네이즈 53번의 옥타브 트리오를 연상케 한다.

전주곡과 연습곡을 포함한 많은 쇼팽의 곡들이 그만의 고유한 기교를 띠고 있다. 리스트의 《초절기교 연습곡》과 슈만의 《교향적 연습곡》은 이 점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서양 고전음악에서 쇼팽의 음악은 낭만주의 시대에 속한다. 하지만 쇼팽 자신은 낭만주의 조류에 관심이 없었거나 싫어했고 자기 자신이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쇼팽의 작품을 전형적인 낭만주의 음악으로 보고있다.

약 200곡에 달하는 그의 작품들은 대다수가 피아노를 위한 것이였고 오로지 몇몇만이 다른 악기를 위한 곡이였다. 실내악에 관하여서는 바이올린보다 주로 첼로와 피아노에 대해 썼고, 이조차도 모두 네 곡 밖에 되지 않는다.

바르샤바에 살 때 쇼팽은 부흐홀츠의 피아노를 사용했다. 나중에 파리에서 사는 동안에는 플라이에에서 악기를 구입했습니다. 그는 플라이에(Pleyel et Cie)의 피아노를 '그 이상은 없다'는 뜻의 "비 플러스 울트라"로 평가한다. 리스트는 파리에서 쇼팽과 친구가되었고 쇼팽의 플라이에 피아노의 소리를 "수정과 물의 결합"으로 묘사한다. 런던에서 쇼팽은 "나는 3대의 피아노, 플라이에, 브로드우드 및 에라르드가 놓인 대형 응접실이 있다네" 라는 내용의 편지를 쓴다.

2018 년 폴 맥널티가 만든 쇼팽의 부흐홀츠 피아노는 폴란드 국립 오페라 극장에서 처음 공개되었으며 바르샤바 쇼팽 연구소에서 최초의 시대 악기 국제 쇼팽 콩쿠르에 사용되었다.
작곡 : Franz Schubert (프란츠 슈베르트)
프란츠 페터 슈베르트(독일어: Franz Peter Schubert, 1797년 1월 31일 ~ 1828년 11월 19일)는 오스트리아의 작곡가이다. 음악의 최고봉 중 한 사람이다. 관현악곡·교회 음악·실내악·피아노곡 등 명작이 많은데, 특히 리트(독일 가곡)에 뛰어난 작품이 많으며, 19세기 독일 리트 형식의 창시자이다. 여러 가지 의문점을 남긴 채 31세로 병사한 그는 가난과 타고난 병약함 등의 어려움에도 불... 프란츠 페터 슈베르트(독일어: Franz Peter Schubert, 1797년 1월 31일 ~ 1828년 11월 19일)는 오스트리아의 작곡가이다. 음악의 최고봉 중 한 사람이다. 관현악곡·교회 음악·실내악·피아노곡 등 명작이 많은데, 특히 리트(독일 가곡)에 뛰어난 작품이 많으며, 19세기 독일 리트 형식의 창시자이다. 여러 가지 의문점을 남긴 채 31세로 병사한 그는 가난과 타고난 병약함 등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600여 편의 가곡, 13편의 교향곡, 소나타, 오페라 등을 작곡했으며, 가곡의 왕이라고 불린다.

오스트리아 대공국 빈의 교외 리히텐탈에서 독일의 슐레지엔의 자작농 출신이자 초등학교 교장인 아버지와 요리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음악을 좋아하는 아버지는 음악에 재능이 있는 슈베르트에게 5살부터 악기교육을 시켰고, 1년 뒤 그의 아버지의 학교에 입학한 슈베르트는 그때부터 공식적인 음악 교육을 받기 시작했는데, 그의 아버지는 슈베르트에게 바이올린의 기초를 가르쳤으며, 그의 형 이그나츠는 슈베르트에게 피아노 교습을 시켰다. 7살부터 지역 교회의 합창단장인 미하엘 홀처로부터 교습을 받았다. 또한 가족 현악 4중주에서 형 이그나츠와 페르디난트는 바이올린을, 아버지는 첼로를, 자신은 비올라를 맡아 연주하기도 하였다. 슈베르트는 어려서부터 음악에 대한 재능이 뛰어났으나 아버지가 음악을 가르친 이유는 단순히 취미였을 뿐, 슈베르트를 음악인으로 키우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나중에 어른이 된 슈베르트는 교사가 되길 바라는 아버지와 진로문제로 갈등을 겪게 되었다. 1804년 슈베르트는 살리에리의 지도를 받았으며 그 재능을 인정받기도 하였다. 1808년에는 궁정신학원에 장학생으로 입학하고 그곳에서 모차르트의 서곡이나 교향곡을 접하게 되었는데 그는 특히 모차르트를 좋아하고 베토벤을 존경하였다. 13세 때 변성기로 인해 궁정학교 수업을 그만두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군복무를 일정기간의 교사근무로 대신하는 대체복무제를 허용하고 있었으므로 아버지의 뜻에 따라 1814년부터 아버지가 근무하는 초등학교에서 조교사로 일했다. 이때부터 작곡 활동을 시작했으며, 이 해에 바 장조의 미사곡(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장례미사에 사용하는 음악)을 작곡하였는데, 이 곡의 독창을 부른 테레제 그로브는 슈베르트의 첫번째 애인이었다. 하지만 둘 사이의 사랑은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결실을 보지 못하고, 테레제는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하였다.

1815년 18세 때에 그의 재능을 아는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수백 곡의 가곡을 썼으며, 괴테의 시에 곡을 붙인 《마왕》, 《휴식 없는 사랑》, 《들장미》 등의 명작도 이 해에 작곡되었다. 그가 지은 가곡 중 일부는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책으로 편집되었다. 1816년 슈파운이 소개한 시인 친구 프란츠 폰 쇼버의 권유로 친구 집에 머물며 작곡에 몰두하였다. 이때부터 그의 방랑생활이 시작되며, 죽는 날까지 그를 괴롭힌 매독 또한 이 시기에 감염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1817년 당시 최고의 성악가이자 25세 연상인 요한 미하엘 포글을 만났다. 1818년에는 가곡 《죽음과 소녀》, 《송어》를 작곡하였으며 에스테르하지 공작 집안의 두 딸의 가정교사가 되어 한여름을 첼리즈에서 보냈다. 이듬해에 포글과 함께 북오스트리아 각지로 연주 여행을 하였는데, 그의 음악이 포글에 의해 처음으로 공개 연주되어 호평을 받았다. 이 좋은 벗의 도움으로 그의 명성은 차츰 높아지고, 오스트리아에 있는 그의 친구들을 중심으로 Schubertiads 라는 모임이 결성되었다. 1819년 라이바흐 사범학교의 교사가 되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부친의 학교에 머물면서 많은 작품을 작곡하였다. 가곡 《방랑자》나 《교향곡 제5번》 등이 이때의 작품이다. 1823년에는 《방랑자의 환상곡》, 《로자문데》 등을 발표했고 그 해 여름, 친구의 집에서 읽은 뮐러의 시에 감동하여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처녀》를 작곡하였다. 1824년, 다시 에스테르하지 가의 음악 교사가 되어 전원 생활을 즐기며 《현악 4중주곡》을 작곡하였다. 이듬해 다시 포글과 서부 오스트리아로 여행하였는데, 이때 《아베 마리아》를 작곡하였다. 1827년 30세가 되자 자신의 인생이 겨울을 맞았음을 아는 듯 《겨울 여행》을 작곡하였다. 1828년 3월 자작 연주회를 열어 성공을 거둔 뒤 교향곡 9번인 《대교향곡》을 완성하였으며, 그가 죽은 뒤 출판된 《백조의 노래》에 수록된 가곡의 대부분이 그 해 8월에 완성되었다.

슈베르트는 한때 베토벤과 만난 적이 있었다. 평소에 베토벤을 존경해왔던 슈베르트는 그를 만나고자 했지만 자신의 소심한 성격 탓에 쉽사리 만날 용기를 가지지 못했다. 게다가 베토벤의 청력상실을 비롯한 합병증으로 만난다 하더라도 제대로 된 대화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만날 기회를 더더욱 가지지 못했다. 그러다 지인들의 권유로 슈베르트가 용기를 내어 1827년 3월 19일, 베토벤 집에 방문하여 만나게 되었다. 놀라운 것은 이렇게 어렵게 만난 두 사람이 불과 2 km 정도 떨어진 곳에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슈베르트는 베토벤에게 인사하는 한편 자신이 작곡한 악보를 보여준다. 베토벤은 슈베르트로부터 받은 그의 악보를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으며 이렇게 늦게 만난 것에 대해 후회를 했고 슈베르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네를 조금만 더 일찍 만났으면 좋았을 것을… 내 명은 이제 다 되었네. 슈베르트, 자네는 분명 세상에 빛낼 수 있는 훌륭한 음악가가 될 것이네. 그러니 부디 용기를 잃지 말게…"

이러한 베토벤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합병증으로 인해 힘이 들어 보였고 말할 때마다 계속되는 기침으로 슈베르트는 자신이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것이 더 괴로울 지경이었다. 그 후 베토벤은 청력상실로 듣지 못하는 탓에 슈베르트에게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을 글로 적으라고 했지만 슈베르트는 자신이 존경하는 음악가의 병이 든 처참한 모습을 보고 소심한 성격때문에 일찍 만나지 못한 자괴감과 후회감에 빠져 괴로운 나머지 인사말도 없이 그대로 방을 뛰쳐나가고 말았다. 베토벤이 죽기 일주일 전의 일이었고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이었다. 그러나 슈베르트는 1주일 뒤인 3월 26일, 베토벤이 죽자 그의 장례에 참여하였다.

베토벤이 세상을 떠난 1년 뒤인 1828년, 그는 자신이 대위법이 부족한 것을 스스로 깨닫고 다시 공부하다가(키즐러에게) 11월 17일에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을 얻어 몸져 누웠다. 그의 병세는 날로 악화되어 기억력이 감퇴하여 술에 취한 사람처럼 몸을 비틀거리는데다 허깨비가 보이며 혼잣말을 하는 등 정신이상의 증세를 보이다가 이틀 뒤인 11월 19일에 31세의 젊은 나이로 빈에서 요절하고 말았다. 슈베르트의 아버지는 유해를 교회에 묻으려 했으나 당시 그를 돌보던 둘째 형 이그나츠가 평소에 존경하던 베토벤의 옆에 묻어주자고 제안을 해 빈 중앙 묘지의 베토벤 무덤 옆에 나란히 묻혔다. 슈베르트의 죽음에 대한 의문은 아직 풀리지 않았는데 식중독으로 사망했다는 설, 장티푸스로 사망했다는 설과 매독의 악화로 사망했다는 설도 있으며 현재는 매독으로 인한 사망이 신빙성을 얻고 있다.[주해 1] 별세한 해에 만들어진 최후의 가곡 14곡을 모은 것이 《백조의 노래》이다.

슈베르트는 그 짧은 일생에 수많은 가곡과 기악곡, 교향곡 등을 작곡하였으나, 그의 이름을 유명하게 한 것은 가곡이다. 690곡에 이르는 가곡들이 모두 훌륭하다는 평을 듣지만, 특히 《겨울 여행》이나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처녀》, 《백조의 노래》 등이 특히 뛰어난 작품이며, 자유로운 표현력을 지니는 멜로디의 아름다움, 그리고 화성의 미묘한 변화 등 낭만주의의 특색을 잘 나타내고 있다. 교향곡에서는 제8번의 《미완성》이 특히 유명하나, 제9번 《대교향곡》의 아름다움도 잊어서는 안된다. 피아노곡에서는 《마왕》, 《방랑자 환상곡》, 《스케르초》, 《악흥(樂興)의 한때》 등이 알려져 있고, 실내악곡에도 《죽음과 소녀》나 《송어》 등 걸작이 많다. 그 밖에 오페라·음악극의 작품도 있으며, 가곡을 비롯하여 교향곡·실내악·피아노곡 등 1,200여 곡의 많은 작품을 남겼다.
19세기 독일 낭만주의 음악을 대표하는 작곡가. 1810년에 독일 작센 주의 츠비카우 시에서 태어났다. 출판업을 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책을 가까이 했고, 음악 못지않게 문학에도 심취했다. 음악가가 되고 싶었던 슈만의 바람과는 달리 그의 부모는 이를 탐탁지 않게 여겼고, 슈만은 이후 급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1828년에 법학을 공부하기 위해 라이프치히 대학에 입학한다. 하지만 음악에 대한 마음... 19세기 독일 낭만주의 음악을 대표하는 작곡가. 1810년에 독일 작센 주의 츠비카우 시에서 태어났다. 출판업을 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책을 가까이 했고, 음악 못지않게 문학에도 심취했다. 음악가가 되고 싶었던 슈만의 바람과는 달리 그의 부모는 이를 탐탁지 않게 여겼고, 슈만은 이후 급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1828년에 법학을 공부하기 위해 라이프치히 대학에 입학한다. 하지만 음악에 대한 마음을 버리지 못하고 피아노 공부를 이어가던 중 유명 피아노 교수 프리드리히 비크를 만나 그의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는다. 그렇게 슈만은 열정적으로 음악에 빠져들었으나 혹독한 연습으로 손가락을 다쳐 결국 피아니스트의 꿈을 포기해야 했다.

이를 계기로 슈만은 작곡과 음악 평론의 길로 들어서는데, 어린 시절의 독서가 큰 자양분이 되었다. 1834년 동료들과 함께 음악 잡지인 <음악신보Neue Zeitschrift fur Musik>를 만들고, 10년간 편집장 역할을 하며 글을 썼다. 슈만은 이 잡지를 통해 베를리오즈, 쇼팽 등 무명의 뛰어난 음악가들을 소개하고 슈베르트, 멘델스존 등 작곡가들의 잘 알려지지 않은 훌륭한 작품을 알리는 데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이 책에 실린 슈만의 조언들은 그의 피아노 작품집 〈어린이를 위한 앨범Album fur die Jugend〉과 함께 발표하려고 쓴 것인데, Musikalische Haus-und Lebensregeln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져 있다. 이 글에서 어린이와 젊은 음악가들을 향한 슈만의 특별한 애정을 느낄 수 있으며, 150여 년이 지난 오늘에도 큰 울림을 준다.

1840년 클라라 비이크와 결혼하였다. 그 후 수많은 가곡을 작곡하고 멘델스존의 라이프니츠 음악원에서 강사, 드레스덴 합창단의 지휘자가 되어 활약하였다. 그 뒤 정신 이상으로 라인 강에 투신 자살을 기도했다가 구조되었으나 2년 후 1856년, 46세에 현재 본으로 편입된 엔데니히의 병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가장 대표적인 낭만주의 작곡가라고 평가받는다. 시적이며 철학적인 그의 음악은 아주 낭만적이다. 그의 초기 음악에서 형식적인 고전주의의 틀을 깨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근대적 피아노 기술을 개척하고 개성 있는 피아노 소곡과 가곡을 남겼으며, 가곡에서는 가곡 못지 않게 피아노 반주부에 중요한 표현을 준 점이 획기적이다. 그의 아내인 클라라 슈만은 우수한 피아니스트로서 그의 좋은 협력자였다. 그의 작품으로는 <사육제>, <어린이 정경> 등의 피아노 곡과 <시인의 사랑>, <여인의 사랑과 생애> 등의 가곡집, 합창곡 <유랑의 무리>가 유명하고, 그 밖에 관현악곡·실내악곡·기악곡도 많다.
작곡 : Johann Sebastian Bach (요한 세바스찬 바흐)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독일어: Johann Sebastian Bach, 1685년 3월 21일 ~ 1750년 7월 28일)는 독일의 작곡가이자 오르가니스트이며, 개신교회의 교회 음악가이다. 교회 성기사와 오케스트라, 듀오 악기를 위한 종교적이거나 세속적인 음악을 창작했고, 그의 작품은 바로크 시대의 종말과 궁극적인 성숙을 동시에 가져왔다. 그는 바로크 시대의 최후에 위치하는 대가로서, 일반적인 작품은 독일음...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독일어: Johann Sebastian Bach, 1685년 3월 21일 ~ 1750년 7월 28일)는 독일의 작곡가이자 오르가니스트이며, 개신교회의 교회 음악가이다.

교회 성기사와 오케스트라, 듀오 악기를 위한 종교적이거나 세속적인 음악을 창작했고, 그의 작품은 바로크 시대의 종말과 궁극적인 성숙을 동시에 가져왔다. 그는 바로크 시대의 최후에 위치하는 대가로서, 일반적인 작품은 독일음악의 전통에 깊이 뿌리박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위에 이탈리아나 프랑스의 양식을 채택하고 그것들을 융합하여 독자적 개성적인 음악을 창조하였다. 종교적 작품은 기존 구교 음악과 차별화하여 새로운 음악을 통해 개신교회 예배에 기여하고자 노력하였다.

바흐의 집안은 200년에 걸쳐서 50명 이상의 음악가를 배출한 일대 음악가계였다. 바흐 집안의 음악가들은 대대로 개신교회인 루터교회의 경건한 신자들이었고, 교회음악가로도 활동하였다. 또한 그들의 일에 강한 장인(匠人)적인 긍지를 품고 있었다. 이 '신앙'과 '장인기질(匠人氣質)'은 요한 제바스티안에게도 계승되어서, 마치 2개의 정선율(定旋律)과 같이 그의 일생을 관통하게 된다. 제바스티안 이전에도 17세기 초엽 이래 많은 유명한 작곡가를 배출했고, 일족의 중심지이었던 중부독일의 튀링겐 지방에서는 '바흐'가 '거리의 악사'를 가리키는 용어로 쓰였을 정도였다. 그중에서도 제바스티안의 큰할아버지 하인리히 바흐(1615-1692), 그 아들 요한 크리스토프 바흐(1642-1703)와 요한 미하엘 바흐(1648-94)는 음악사(史)에도 이름을 남긴 뛰어난 작곡가들이었다.

바흐는 사후 고전주의 음악사의 흐름에 밀려 완전히 잊혔으나 1802년 독일의 음악사학자인 포르켈이 바흐에 대한 최초의 연구서인 "바흐의 생애와 예술, 그리고 작품"(Uber Johann Sebastian Bachs Leben, Kunst und Kunstwerke)을 1802년에 발표함으로써 전 유럽적 바흐 광풍을 몰고 오게 하였으며 또한 사후 바흐에 대한 재평가에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하였다. 오늘날에는 일반적으로 온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작곡가 중 한 사람으로 여겨지고 있다. 음악의 아버지라고 불릴 만큼 아주 훌륭한 곡을 많이 작곡 하였다.

바로크 음악에 있어서 바흐는 대위법 기술의 정수를 다한 사람이나, 그것에만 만족하지 않고 당시에 이미 궁정문화에 침투했던 프랑스나 이탈리아의 양식을 스스로 받아들여 칸타타에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도 했다. 거기에는 그가 직접적 또는 간접적으로 배운 여러 나라의 온갖 요소가 모두 투입되어 그만이 지닐 수 있는 최고로 천재적이게 융화되어 일치미를 이루고 있다. 콘티누오(통주저음)만으로 반주되거나 또는 여러 개의 악기로 반주되는 독창이나 중창에 의한 이탈리아식 다 카포 아리아, 오페라적인 아리오소와 레치타티보, 가장 초기의 가브리엘 형태에서 바흐 시대의 프랑스식 서곡에 이르기까지의 관현악 신포니아, 협주곡, 트럼펫의 팡파르, 풍요한 장식성을 지니고 성악성부에 얽혀드는 기악의 오블리가토 성부, 복합창형식, 때로는 성악에까지 적용되는 프랑스의 리드미컬한 춤곡, 이러한 것이 독일의 오랜 전통인 코랄과 결부되고 있다. 대체로 바흐만큼 코랄을 훌륭하게 활용하고 또 코랄을 창작의 중심으로 삼기에 정당함을 느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여러 나라 양식의 혼합은 기악 분야에서도 볼 수 있다. 프로베르거의 전통, 쿠프랭의 프랑스 모음곡형식, 쿠나우에 의하여 전해진 이탈리아의 소나타 다 카메라양식, 도메니코 스카를라티의 건반 텍스처(鍵盤書法), 푸가에 있어서도 클라비어 푸가는 이탈리아 협주양식의 영향을 나타내나 오르간 푸가는 북독일 오르간 악파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 협주곡 분야에서는 끊임없이 비발디가 모범으로 숭앙되며, 가장 이탈리아의 특징을 나타낸다. 이와 같이 바흐의 작품은 매우 많은 여러 가지 양식을 포함하고, 또한 작곡한 분야도 넓으며 바흐 개인으로서도 시대에 따라 기술적, 내용적으로 현저하게 발전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개인양식을 간단히 종합하기란 곤란하다고 하겠다.

바흐는 생전에도 동시대의 음악가였던 비발디나 텔레만과 같이 국제적 지명도를 가진 음악가는 아니었다. 사후에는 당시 음악가들이 대부분 그랬듯이 작곡가로서는 완전히 잊혀진다. 바흐 생애 후반부에 이미 고전파 음악의 전조가 시작되었고 바흐 음악은 낡은 것으로 취급되었다. 바흐는 비발디나 헨델과 같이 음악가의 프리랜서화를 선도하는 인물도 아니었고 끝까지 교회 음악가로 남았다. 고전파 시대에 바흐는 고전파의 문을 연 아들들의 아버지로서 오히려 유명하였다. 유명인 중에는 모차르트가 바흐의 악보를 찾아서 탐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모차르트 음악에 가끔 훌륭한 푸가가 보이는 것이 바흐의 영향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베토벤 또한 바흐를 연구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그 영향에 대해서는 불분명하다. 모차르트와 베토벤이 바흐를 극찬하는 말을 남겼다고하나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가 아닌 아들 바흐에 대한 찬사였다는 것이 일반적인 설이다.

그러나 1802년 독일의 음악사학자인 포르켈이 사후 완전히 잊혔던 바흐에 대한 최초의 연구서인 "바흐의 생애와 예술, 그리고 작품Uber Johann Sebastian Bachs Leben, Kunst und Kunstwerke"(1802)를 발표함으로써 바흐에 대한 인식의 전환점을 제공하였다. 근대 인문학으로서의 음악사학의 발전은 낭만주의 시대에 이전 시대의 음악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키고 이들의 작품을 출판, 연주하기 시작하면서 바흐는 그 핵심 레파토리로 떠오른다. 바흐 생존 시기나 고전파 시대의 지명도와는 달리 낭만주의 시대에 바흐는 이전 시기 어떠한 음악가보다 높이 평가되기 시작하여 멘델스존 이후 음악가들 중 바흐를 연구하지 않은 작곡가가 없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 바흐에 대한 관심은 바흐가 많이 참고하고 편곡을 했던 다른 음악가들, 특히 비발디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켜서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바로크 음악의 부활을 이끌기도 하였다. 오늘 날에도 바흐는-그의 음악이 바로크 음악을 대표한다고 말할 수도 없고, 바로크 시대 가장 유명한 음악가도 아니었지만-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가장 위대한 음악가로 추앙받고 있다.

서양 음악의 아버지라고 일컫는 바흐의 가문에서는 약 200년 동안에 걸쳐 저명한 음악가가 많이 나왔다.
작곡 : Ludwig van Beethoven (루드비히 판 베토벤)
1770년 12월 17일 세례 ~ 1827년 3월 26일)은 독일의 서양 고전 음악 작곡가이다. 독일의 본에서 태어났으며, 성인이 된 이후 거의 오스트리아 빈에서 살았다. 감기와 폐렴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투병하다가 57세로 생을 마친 그는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전환기에 활동한 주요 음악가이며, 작곡가로 널리 존경받고 있다. "음악의 성인(聖人)" 또는 "악성"(樂聖)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가장 잘 ... 1770년 12월 17일 세례 ~ 1827년 3월 26일)은 독일의 서양 고전 음악 작곡가이다. 독일의 본에서 태어났으며, 성인이 된 이후 거의 오스트리아 빈에서 살았다. 감기와 폐렴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투병하다가 57세로 생을 마친 그는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전환기에 활동한 주요 음악가이며, 작곡가로 널리 존경받고 있다. "음악의 성인(聖人)" 또는 "악성"(樂聖)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가장 잘 알려진 작품으로는 《교향곡 5번》, 《교향곡 6번》, 《교향곡 9번》, 《비창 소나타》, 《월광 소나타》,등이 있다.

베토벤의 조부는 21세의 나이에 브라반트 오스트리아 공국(현재 벨기에 플랑드르 지역)의 메헬렌 마을에서 본으로 이주한 귀족 출신의 음악가로, 손자와 동명인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12-1773)이었다. 루트비히는 쾰른 선제후국, 클레멘스 아우구스트의 궁정에서 베이스 가수로 고용되었고, 결국 1761년에 카펠마이스터가 되었으며 본에서 저명한 음악가가 되었다. 그의 생애 말기에 그가 위임한 초상화는 그의 음악적 유산의 부적으로 그의 손자의 방에 남아 있었다. 루트비히에게는 같은 음악 기관에서 테너로 일하면서 그의 수입을 보충하기 위해 키보드와 바이올린 레슨을 한 외아들 요한(Johann van Beethoven, 1740-1792)이 있었다.

요한은 1767년에 마리아 막달레나 케베리히(Maria Magdalena Keverich, 1746-1787)와 결혼했다. 그녀는 트리어 대주교 궁정의 수석 요리사였던 하인리히 케베리히(Johann Heinrich Keverich, 1701-1759)의 딸이었다. 베토벤은 현재 본, 본가세 20번지의 베토벤 하우스 박물관에 해당하는 건물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생년월일에 대한 확실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1770년 12월 17일에 성 레미기우스 가톨릭 교구에서의 그의 세례 기록은 존속하고 있다. 당시 이 지역의 관습은 출생 후 24시간 이내에 세례를 행하는 것이었다. 그의 생년월일이 12월 16일이라는 합의(베토벤 자신이 동의 한 바 있음)가 있지만, 이에 대한 문서로 된 증거는 없다.

요한 판 베토벤에게서 태어난 일곱 자녀 중 두 번째로 태어난 루트비히와 두 명의 남동생 만이 유아기에서 살아 남았다. 첫째 동생인 카스파 안톤 카를 베토벤(Kaspar Anton Karl van Beethoven, 1774-1815)은 형과 같이 작곡가가 되려고 했지만 일찍 포기하고 세무서원이 되었다. 피아노를 웬만큼 치기는 하였지만 별다른 재능이 없었기에 형의 비서 역할을 맡으며 출판을 도왔다. 하지만 나중에 형의 평판이 높아지자 형의 작품을 처분해서 한 몫 보려는 생각으로 형이 출판을 꺼려했던 초기의 습작들을 팔아치우는 등 여러가지로 형을 괴롭혔다. 카스파의 아들도 삼촌인 베토벤에게 말할 수 없는 괴로움을 안겨주었다. 막내동생인 니콜라우스 요한(Nikolaus Johann van Beethoven, 1776-1848) 역시 베토벤에게 골치 아픈 존재였다. 형의 도움으로 약제사가 된 그는 상당한 돈을 모은 후 형에게 빌려주고는 그것을 미끼로 형의 작품을 마음대로 처분했다. 품행이 단정치 못한 여인과 결혼할 때에도 형의 반대를 꺾고 결혼한 뒤부터는 더 멀어졌다. 사업수완이 좋아서 제법 재산을 모았으나 베토벤이 어려운 곤경에 처했을 때에도 결코 도우려고 하지 않았다.

베토벤의 첫 번째 음악 교사는 그의 아버지 요한이었다. 흔히 요한은 가혹한 선생이며 어린 베토벤을 "건반 악기 앞에 세워놓았고 아이는 대개 울고 있었다"고 회자되는데, 이는 그만큼 엄격한 아버지의 행동 때문이었다. 그러나 음악학자이자 음악평론가인 조지 그로브(Sir George Grove, 1820-1900)의 그로브 음악과 음악인 사전에서는 요한의 그런 행동에 대한 확실한 기록 증거가 없다고 지적하며, "억측과 속설은 둘 다 늘어나는 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요한은 혹독했을지 모르지만 아들의 두드러진 재능을 인식하고 베토벤에 대한 음악 교육을 같은 궁정의 동료들을 포함한 다른 유능한 교사들에게 재빨리 양도했다. 베토벤은 후에 궁정 오르간 연주자인 질 판 덴 에덴(Gilles van den Eeden, 1708-1782), 건반 수업을 한 가족의 후원자인 토비아스 프리드리히 파이퍼(Tobias Friedrich Pfeiffer, 1751-1805), 바이올린과 비올라 연주를 지도한 그의 친척 프란츠 로반티니Franz Rovantini 그리고 바이올린 연주를 지도한 한 궁정의 악장인 프란츠 안톤 리스Franz Anton Ries 등 다른 지역 교사들로부터 지도를 받았다. 그의 수업료는 5년차에 시작되었다. 체제는 엄하고 철두철미해서 종종 그는 눈물을 흘렸다. 불면증 환자 파이퍼의 개입으로 젊은 베토벤이 침대에서 건반으로 끌려가는 비정기적인 심야 세션이 있었다. 그의 음악적 재능은 어린 나이에 분명했다. 요한은 이 지역에서의 레오폴트 모차르트의 성공을 알고(아들 볼프강, 딸 나넬과 함께) 1778년 3월의 첫 공개 연주회 포스터에 베토벤이 여섯 살(그는 일곱 살이었다)이라고 주장하며 아들을 "신동"으로 선전하려고 했다. 여하튼 베토벤이 피아노 연주 "신동"으로 불린 건 사실이며 그 후 개인 연주회를 포함하여 많은 소규모 공연이 이어졌다. 평소 수줍음이 많았던 베토벤은 음악이 자신감을 높여 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780년 또는 1781년에 베토벤은 본에서 가장 중요한 스승인 크리스티안 고틀로브 네페(Christian Gottlob Neefe, 1748-1798)와 함께 공부를 시작했다. 켐니츠 출신의 작곡가로서 많은 재능을 갖고 있었던 네페는 베토벤의 능력을 일찌감치 알아차리고 그에게 작곡을 가르쳤다; 1783년 3월 베토벤의 첫 번째 출판 작품인 피아노 변주곡, 《드레슬러의 행진곡 주제에 의한 아홉 개의 변주곡, WoO 63》이 등장했다. 베토벤은 곧 네페의 보조 오르가니스트로 일하기 시작했으며 처음에는 무급(1782년)으로 일했고, 그 다음에는 궁정 예배당의 유급(1784년)의 직원으로 일했다. 그의 첫 세 개의 피아노 소나타, WoO 47은 선제후 막시밀리안 프리드리히(Maximilian Friedrich von Konigsegg-Rothenfels, 1708-1784)에게 헌정되었기 때문에 때때로 Kurfurst ("선제후")라는 별칭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1783년에 출판되었다.

베토벤의 음악적 재능은 모차르트와 마찬가지로 어린 나이에 인정받았는데, 이 세 개의 소나타는 작곡가로서의 재능은 물론 그의 대담성을 일찌감치 엿볼 수 있게 한다. 같은 해에 베토벤에 대한 최초의 인쇄된 언급이 Magazin der Musik ("음악잡지")에 실렸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 ... 11살 소년으로 가장 유망한 재능있는 소년이다. 그는 피아노를 매우 능숙하게 연주하고, 파워풀하게 연주하며, 책을 아주 잘 읽는다... 그가 연주하는 가장 중요한 작품은 스승 네페가 손에 쥐여준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이다 ..."

본의 선제후로서 막시밀리안 프리드리히의 후계자는 막시밀리안 프란츠(Maximilian Franz Xaver Joseph Johann Anton de Paula Wenzel, 1756-1801)였다. 그는 베토벤에게 약간의 지원을 하며 1784년 그를 두번째 궁정 오르간 연주자로 영구 임명하였고, 1792년 빈 방문을 위해 돈을 지불했다. 베토벤은 또한 궁정 예배당에서 하프시코디스트와 비올리스트로서 일했다.

베토벤은 몇 년 동안 그의 인생에서 중요해진 몇몇 사람들에게 소개되었다. 그는 교양 있는 폰 브로우닝von Breuning 가문을 자주 방문했는데, 그곳에서 그는 독일 문학과 고전 문학을 접하였고 몇몇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쳤으며 미망인이 된 폰 브로우닝로부터 어머니와 같은 우정을 제공받았다.

여기서 그는 그의 평생의 친구가 되었고 폰 브로우닝의 딸들 중 한 명과 결혼하기로 되어 있었던 젊은 의대생 프란츠 게르하르트 베겔러(Franz Gerhard Wegeler, 1765-1848)를 만났다. 폰 브로이닝의 가족 환경은 알코올 의존증 환자인 아버지의 통제가 점점 심해지는 그의 가정 생활에 대안을 제시해 주었다. 폰 브로이닝 가문의 또 다른 단골은 페르디난드 폰 발트슈타인(Ferdinand von Waldstein, 1762-1823) 백작이었는데, 그는 베토벤의 본 시대 동안 친구이자 재정적인 후원자가 되었다. 발트슈타인은 1791년에 베토벤의 무대를 위한 첫 번째 작품인 발레 음악, 《기사 발레를 위한 음악, WoO 1》을 의뢰했다.

하이든, 발트슈타인의 도움으로 베토벤은 빈 귀족들의 살롱에서 연주자와 즉흥 연주자로서의 명성을 쌓기 시작했다. 그의 친구 니콜라우스 짐로크는 디터스도르프를 주제로 한 일련의 피아노 변주곡, WoO 66(디터스도르프의 오페라 《빨간 모자》 중 아리아 "옛날 한 노인이" 주제에 의한 열세 개의 변주곡 A 장조)로부터 시작하여 그의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1793년까지 그는 빈에서 피아노 거장으로 명성을 떨쳤으나, 그는 작품의 최종적인 모습이 더 큰 영향을 미치도록 작품 출판을 보류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첫 번째 빈 연주회는 1795년 3월이었는데, 그곳에서 그는 처음으로 그의 피아노 협주곡 중 하나를 연주했다. 이 공연 직후, 그는 Op.를 부여한 첫 번째 작품(세 개의 피아노 삼중주 1-3번, Op. 1)의 출판을 위해 편곡 작업을 했다. 이 작품들은 그의 후원자인 리히노프스키 공작에게 헌정되었고, 재정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베토벤의 수익은 1년 동안 그의 생활비를 충당하기에 거의 충분했다.

1796년 베토벤은 1789년의 모차르트의 연주 여행처럼 중부 유럽의 문화 중심지를 순회하였다. 여정에는 모차르트의 연주여행에도 동행했던 리히노브스키 공작도 함께 하였다. 베토벤은 프라하, 드레스덴, 라이프치히, 베를린을 방문하였으며 작곡과 연주회 활동으로 환영받았다. 여행 중 그는 프라하에서 가장 오래 머물렀는데, 리히노브스키 가문의 인맥 덕분에 그는 도시에 오기도 전에 이미 명성이 높았다. 베를린에서는 첼로 소나타 1?2번, Op. 5를 작곡하여 첼로를 연주하는 음악 애호가,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에게 헌정하였다. 그것들은 첼로와 피아노의 서로 다른 성격을 잘 고려하고 있으며 비르투오소 첼로와 피아노 파트를 잘 결합한 것으로 유명하다. 왕은 베토벤에게 금화가 가득 든 코담뱃갑을 주었는데, 베토벤은 연주 여행으로 "많은 돈"을 벌었음을 알게 되었다. 1796년 7월 베토벤은 빈으로 돌아왔고 그해 11월 다시 여행을 떠났는데, 북쪽이 아닌 동쪽으로 가서 프레스부르크(오늘날의 브라티슬라바)와 페슈트로 갔다. 프레스부르크에서 그는 친구 안드레아스 슈트라이허(Johann Andreas Streicher, 1761-1833)가 보낸 피아노로 연주하였는데, 이를 놓고 그가 농담하기를 "나에게는 너무 좋다 ... 왜냐하면 이 피아노는 나만의 음색을 낼 수 있는 자유를 빼앗아 가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였다.

베토벤은 1797년에 거의 빈에서 체재하였는데, 그에게는 여름과 가을마다 심각한 질병(아마 티푸스)에 시달렸으나, 작곡(작곡 부탁을 받는 일이 많아졌다)과 연주를 계속하였다. 이 시기에(1795년일 수도 있다)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청력에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1798년 다시 프라하로 여행할 때, 청력이 점차 약해지면서 결국 연주 여행 자체를 포기하게 된다.

1799년 베토벤은 모차르트의 전 후원자인 라이문트 베츨라어 남작의 집에서 악명높은 피아노 "결투"에 참가, 거장 요제프 뵐플(Joseph Johann Baptist Wolfl, 1773-1812)에 대항하여 승리했다; 그리고 이듬해 모리츠 폰 프리스(Moritz Christian Johann Reichsgraf von Fries, 1777-1826) 백작의 살롱에서 다니엘 슈타이벨트(Daniel Gottlieb Steibelt, 1765-1823)를 상대로 비슷한 승리를 거두었다. 1799년 출판된 베토벤의 여덟번째 피아노 소나타 "비창", Op. 13은 음악학자 배리 쿠퍼(Barry Cooper, 1949?)에 의해 "성격의 강인함, 감정의 깊이, 독창성의 수준, 동기와 음조의 창의력 면에서 그의 이전 어느 작품들 보다도 능가하고 있다"고 묘사되었다.

1813년, 베토벤은 영국 피아니스트 찰스 네이트(Charles Neate, 1806-1879)에게 1798년 경 한 가수와의 다툼으로 인한 발작이 원인이 되어 청력 상실이 발생했다고 말했다. 그의 청력은 점진적으로 감소하면서 심각한 형태의 이명(耳鳴) 때문에 더욱 방해를 받았다. 일찍이 1801년에 그는 프란츠 베겔러(Franz Gerhard Wegeler, 1765-1848)와 또 다른 친구인 카를 아멘다(Carl Friedrich Amenda, 1771-1836)에게 편지를 써서 자신의 증상과 그것들이 직업적, 사회적 환경 모두에서 일으킨 어려움들을 기술했다(그러나 그의 가까운 친구들 중 일부는 이미 문제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원인은 아마 귀경화증이었을 것이며, 아마도 청각 신경의 퇴화를 동반했을 것이다.

베토벤은 주치의의 충고에 따라 1802년 4월부터 10월까지 빈의 바로 외곽에 있는 오스트리아의 작은 마을 하일리겐슈타트로 이주하여 자신의 상태를 받아들이려고 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현재의 하일리겐슈타트 유서로 알려진 문서를 썼는데, 이 문서는 그의 형제들에게 보내는 편지로서 그의 청각 장애로 인한 자살에 대한 생각과, 그의 예술을 통해 계속해서 살겠다는 결심을 기록하고 있다. 이 편지는 결코 보내지지 않았으며 그가 죽은 후 그의 서류에서 발견되었다. 베겔러와 아멘다에게 보낸 편지들은 그다지 절망적이지 않았다; 그 편지들 속에서 베토벤은 또한 그 시기에 진행 중이던 그의 직업적, 재정적 성공에 대해서 언급했고, 베겔러에게 말했다 시피 "운명의 멱살을 잡으십시오. 그것은 확실히 나를 완전히 짓밟지 않을 것입니다."라며 그의 결단에 대해서 언급했다. 1806년 베토벤은 자신의 음악 스케치 중 하나에서 "당신의 귀먹음이 더 이상 비밀이 되지 않게 하십시오 - 예술에서 조차."라고 언급했다.

베토벤의 청력 손실은 그가 음악을 작곡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지만, 그것은 그의 삶의 이러한 단계에서 중요한 수입원인 연주회에서의 연주를 점점 더 어렵게 만들었다. 그것은 또한 그의 사회적 탈퇴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체르니는 베토벤이 1812년까지도 여전히 언어와 음악을 정상적으로 들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베토벤은 결코 완전히 귀머거리가 되지는 않았다. 말년에도 그는 여전히 낮은 음색과 갑작스러운 큰 소리를 구별할 수 있었다.

베토벤이 하일리겐슈타트에서 빈으로 돌아온 것은 음악적 양식의 변화로 표시되었으며, 현재는 대규모로 작곡된 많은 창작품을 특징으로 하는 그의 중기 또는 "영웅적" 시기의 시작으로 지정되는 경우가 많다. 카를 체르니에 따르면 베토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까지 해 온 작업에 만족하지 않는다. 이제부터는 새로운 길을 택할 것이다." 이 새로운 양식을 사용한 초기 주요 작품은 1803-04년에 작곡된 교향곡 3번 "영웅"이다. 나폴레옹의 경력을 바탕으로 한 교향곡을 만들고자 하는 아이디어는 1798년에 베르나도트 백작(칼 14세 요한)에 의해 베토벤에게 제안이 되었을 수 있다. 영웅적 혁명 지도자의 이상에 동조하는 베토벤은 원래 교향곡에 "보나파르트"라는 제목을 부여했지만 1804년에 나폴레옹이 자신을 "황제"라고 선언한 것에 환멸을 느꼈고 원고의 제목 페이지에서 나폴레옹의 이름을 긁어내었다. 교향곡은 1806년에 "위대한 사람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작곡된Sinfonia eroica, composta per festeggiare il sovvenire d'un grand'uomo"이라는 부제와 현재의 제목인 "영웅 교향곡"으로 출판된다. "영웅"은 이전 교향곡보다 더 길고 더 거대했다. 1805년 초에 초연되었을 때 그것은 엇갈린 반응을 받았다. 어떤 청취자들은 그 길이에 반대하거나 그 구조를 오해했고, 다른 이들은 그것을 걸작으로 보았다.

다른 중기의 작품들은, 베토벤이 물려받은 음악 언어와 같은 극적인 방식으로 확장된다. 라주모프스키 현악 사중주, 그리고 발트슈타인과 열정 피아노 소나타는 교향곡 3번 등의 영웅적인 정신을 공유한다. 이 시기의 다른 작품으로는 4번부터 8번까지의 교향곡과 오라토리오 감람산 위의 그리스도, 오페라 피델리오, 그리고 바이올린 협주곡 등이 있다. 1810년에 작가이자 작곡가인 E. T. A 호프만의 Allgemeine Musikalische Zeitung ("일반음악신문")에서의 영향력 있는 리뷰에서 베토벤은 "낭만주의 음악"의 작곡가 세 명 중 가장 위대한 인물로 칭송되었다; 호프만은 베토벤의 교향곡 5번에 관하여 드라마틱한 필치로 '깊은 밤의 장막을 뚫어내는 것'에 비유하면서, "이를 통해 우리는 열정과 함성을 모두 쏟아낼 수 있고, 꿋꿋이 살아남아 영혼의 파수꾼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이 천재의 광상곡에 대해 "더할 나위 없이 내적인 것과 연관성이 있고, 심중하고 친절하게 듣는 이들을 끝없는 정신세계로 끌어들인다"라며 칭찬했다. 이 기간 동안 베토벤의 수입은 자신의 작품 출판, 그것들의 공연, 그리고 출판 전 독점 기간 동안 후원자들에게 그들이 의뢰한 개인 공연과 작품의 사본을 제공했던 것으로부터 나왔다. 로브코비츠 공작과 리히노브스키 공작을 포함한 그의 초기 후원자들 중 일부는 그에게 작품을 의뢰하고 출판된 작품을 구매하는 것 외에도 연간 급여를 제공했다. 아마도 그의 가장 중요한 귀족 후원자는 1803년, 또는 1804년에 그와 함께 피아노와 작곡을 공부하기 시작한 황제 레오폴드 2세의 막내 아들인 오스트리아의 루돌프 대공일 것이다. 그들은 친구가되었고 그들의 만남은 1824년까지 계속되었다. 베토벤은 루돌프에게 14개의 작곡을 바쳤다. 여기에는 대공 삼중주, Op. 97 (1811년) 및 장엄미사, Op. 123 (1823년)도 포함된다.

안 데르 빈 극장에서의 그의 지위는 1804년 초에 극장이 경영을 변경하면서 종료되었고, 친구인 스테판 폰 브로우닝(Stephan von Breuning, 1774-1827)과 함께 일시적으로 빈의 교외로 이주할 수 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레오노레(그의 오페라 원제)에 대한 작업이 잠시 주춤해졌다. 오스트리아의 검열관에 의해 다시 연기되었고, 마침내 1805년 11월에 현재의 피델리오라는 호칭으로 프랑스의 도시 점령으로 거의 비어 있던 집들에서 초연되었다. 이 피델리오 판은 재정적인 실패일 뿐만 아니라 중대한 실패작이기도 하였고, 베토벤은 그것을 수정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베토벤은 계속해서 인정을 받았다. 1807년에 음악가 겸 출판인인 무치오 클레멘티(Muzio Filippo Vincenzo Francesco Saverio Clementi, 1752-1832)가 영국에서 그의 작품을 출판할 권리를 확보했고, 하이든의 전 후원자 에스테르하지 왕자는 아내의 명일을 위해 미사곡(미사곡 다장조, Op. 86)을 의뢰했다.

1811년 봄, 베토벤은 두통과 고열을 겪으며 중병에 걸렸다. 그의 주치의 요한 말파티(Johann Baptist Malfatti von Monteregio, 1775-1859)는 테플리츠(현 체코의 테플리체) 온천에서 치료제를 복용할 것을 권유했다. 테플리츠에서 그는 코체부의 극에 사용할 서곡을 포함한 부수 음악 2개-슈테판왕, Op. 117과 아테네의 폐허, Op. 113을 썼다. 다음 해에도 테플리츠를 다시 방문하라는 조언을 받은 베토벤은 그곳에서 괴테를 만나게 된다. 뿐만 아니라 그곳에는 다양한 귀족, 군주들과 함께 재능있는 작가 베티나 브렌타노도 있었다. 이러한 만남을 추진한 것은 바로 베티나였다. 베티나는 베토벤과 괴테, 모두를 존경하고 있었다. 얼마후 괴테는 카를 프리드리히 젤터(Carl Friedrich Zelter, 1758-1832)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그(베토벤)의 재능은 저를 놀라게 했습니다. 불행히도 그는 완전히 길들여지지 않은 성격입니다. 그가 세상을 혐오스럽게 여기는 것이 전혀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그러한 그의 태도는 자신이나 타인을 더 이상 즐겁게 하지 못합니다." 베토벤은 브라이트코프 운트 헤르텔 출판사에 "괴테는 시인이 되는 것보다 훨씬 더 궁정의 분위기를 좋아합니다."라고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그들의 만남 후에 그는 괴테의 한 쌍의 시를 기반으로 1815년에 합창단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조용한 바다와 즐거운 항해, Op. 112를 작곡하게 된다. 이것은 1822년에 시인에게 헌정되며 출판되었고, 베토벤은 다음과 같이 썼다: "내가 젊었을 때 이미 소중히 여겼던 유일한 불멸의 괴테를 위해 간직하고 있던, 감탄과 사랑과 존경이 지속되었습니다." 음악적 취향과 같은 괴테의 사회적 태도는 보다 형식적인 시대에 형성되었다. 스물 한 살 후배인 베토벤에게 있어서 진정한 귀족은 예술가 뿐이었다. 20년 후 베티나가 보고한 것 처럼, 신화에 대한 그의 환멸은 거리에서 왕족을 만났을 때 괴테의 행동에 의해 결정되었다. 베토벤이 괴테에게 말했다. "귀족들도 우리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길을 양보할 것이니 계속 걸으십시오." 그러나 괴테는 길가로 비켜 모자를 벗고 경의를 표했다. 베토벤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그들의 행렬을 바로 통과했다. 그리고 괴테를 기다리며 베토벤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당신을 존경하고 당신의 작품을 존경하기 때문에 당신을 기다렸지만 당신은 그 사람들에게 너무 많은 존경심을 보였습니다."

1812년, 그가 테플리츠에 있는 동안 그는 그의 "불멸의 연인"에게 10 페이지 분량의 러브레터를 썼는데, 그는 이 편지를 그 수취인에게 보내지 않았다. 음악학자 메이너드 솔로몬이 의도한 수신자가 안토니 브렌타노(Antonie Brentano, 1780-1869)인 것이 틀림없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증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의도된 수신자의 신원은 오랫동안 논쟁의 대상이 되어왔다.

이 모든 것들은 베토벤이 빈에서의 첫 10년 동안 가능한 소울메이트로 여겨져 왔다. 귀차르디(Julie Guicciardi, 1784-1856)는 베토벤과 바람을 피웠지만 그에게 진지한 관심을 가진 적이 없었고 1803년 11월에 갈렌베르크 백작과 결혼했다(베토벤은 후대의 비서 겸 전기작가인 안톤 쉰들러에게 "(귀차르디가) 나를 찾았고 울었지만, 나는 그녀를 경멸했다"고 주장했다. 요제피네(Josephine Brunsvik or Countess Josephine Deym, 1779-1821)는 베토벤이 그녀로 인해 열병을 앓고 있을 때에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은 귀족, 그리고 부유한 귀족과 결혼하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설득으로 노인 백작 요제프 다임(Joseph von Deym, 1752-1804)과 결혼했다. 요제프 다임은 1804년에 사망했다. 베토벤은 그녀의 집을 방문하기 시작했고 열정적인 편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처음에 그는 요제피네가 자신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였지만, 그녀가 부다페스트로 이주한 후에도 계속해서 그녀에게 말을 걸어, 마침내 1807년에 그녀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에서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받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내가 당신의 기억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듯 여전히 나타나길 바라주셔서 감사합니다." 말파티(Therese Malfatti von Rohrenbach zu Dezza, 1792-1851)는 베토벤의 주치의의 조카딸로 1810년에 그녀에게 청혼했었다. 그는 40세, 그녀는 19세였다. 그 제안은 거절당했다. 그녀는 이제 피아노 바가텔 엘리제를 위하여, WoO 59의 수령자로 기억된다.

823년에는 세 개의 주목할 만한 작품이 완성되었다. 이 작품들은 모두 몇 년 동안 베토벤을 점령하고 있던 것들로서 장엄미사, 교향곡 9번, 디아벨리 변주곡이 바로 그것들이다. 베토벤은 마침내 완성된 미사곡 사본을 3월 19일(대공이 대주교로 취임한 지 1년이 지난 때)에 루돌프에게 제출했다. 그러나 그는 작품의 원고를 독일과 유럽의 여러 법원에 각각 50 듀카트로 수익성 있게 판매 할 수 있다는 개념을 세웠기 때문에 출판이나 공연을 서두르지 않았다. 이 제안을 받아들인 소수 중 한 명은 베토벤에게 무거운 금메달을 보냈던 프랑스의 루이 13세였다. 교향곡과 변주곡은 나머지 베토벤 작업 연도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디아벨리는 두 작품을 모두 출판하기를 원했지만 미사곡의 잠재적 인상은 슐레진저와 피터스를 포함한 다른 많은 출판사들이 베토벤에게 로비를 하게 했다. 그리고 결국 쇼트(Schott Music)에 의해 획득되었다.

베토벤은 건강이 나빠졌음에도 불구하고 갈리친을 위해 현악 사중주를 쓰기 시작했다. 이것들 중 첫 번째의 사중주 12번 E♭ 장조, Op. 127은 1825년 3월에 슈판치히 사중주단에 의해 초연되었다. 1825년 4월, 사중주 A 단조 15번, Op. 132를 쓰다가 갑작스런 병에 걸렸다. 바덴에서 회복하면서 그는 "건강을 회복한 자가 신에게 감사하는 신성한 노래, 리디안 선법을 따름"이라고 불리는 느린 악장을 착수하게 되었다. 다음으로 완성된 것은 사중주 13번 B♭ 장조, Op. 130이었다. 6악장에서 마지막 대위법의 악장은 1826년 3월의 초연에서 연주자와 관객 모두에게 매우 어려운 것으로 증명되었다. 베토벤은 출판사 아르타리아에 의해 추가 요금을 받으며 새로운 피날레를 쓰고 마지막 악장을 별도의 작품(대푸가, Op. 133)으로 발행하도록 설득되었다. 베토벤이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이 시리즈의 마지막 편인 사중주 14번 C# 단조, Op. 131이며 베토벤은 이것을 가장 완벽한 단일 작품으로 평가했다.

베토벤과 그의 조카 카를과의 관계는 계속해서 격렬했다. 베토벤이 그에게 보낸 편지는 요구가 지나쳤고 꾸짖는 방식이었다. 8월 베토벤의 뜻에 반하여 어머니를 다시 만난 카를은 자살을 시도했다. 그는 살아 남았고 퇴원 후 베토벤과 그의 삼촌 요한과 함께 그나이젠도르프로 요양하러 갔다. 그곳에 있는 동안 베토벤은 추가로 사중주(F 장조 16번, Op. 135)를 완료하여 슐레진저에게 보냈다. 베토벤은 마지막 악장에서 도입부의 느린 화음 아래에 "Muss es sein?"("그래야만 하는가?")라는 문구를 붙였다; 그 응답의 문구는 이 악장의 더 빠른 제1주제 위에 "Es muss sein!"("그래야만 한다!")라고 적혀 있다. 악장 전체는 제목처럼 "어려운 결정"("Der schwer gefasste Entschluss")을 향하고 있다. 11월에 베토벤은 최종 작품인 사중주 13번 B♭ 장조, Op. 130의 대체 피날레를 완성했다. 이때 베토벤은 이미 병이 들어 우울해 있었다; 그는 요한과 다투기 시작했고, 요한은 그의 아내보다 우선권으로 카를을 상속자로 삼았다고 주장했다.

베토벤은 종종 30세 무렵부터 질병에 시달렸다. 설사, 복통, 산통, 열병, 또는 염증과 같은 다양한 증상에 대한 설명이 있다. 한편으로는 급성 질환이 원인으로 간주 될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 이상의 만성 질환이 주요 원인으로 명명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납 중독, 브루셀라증 및 잦은 음주 등이 의심되고 있다. 현재까지는 베토벤의 건강 문제가 한 가지로 인한 것인지, 아니면 여러 가지 다른 원인으로 인한 것인지 확실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베토벤의 전기 작가들은 예술가가 값비싼 사탕 수수 설탕 대신 납 설탕으로 달게 했던 값싼 화이트 와인을 정기적으로 마셨다고 언급했다. 베토벤의 뼈와 머리카락에는 거의 측정되지 않은 농도의 납이 포함되어 있었다.

나이가 들면서 질병의 빈도와 강도가 증가했다. 1821년 여름, 심한 황달이 간경변을 예고했다. 베토벤은 목욕과 란트 체류에 대한 불만에서 구제를 구했고, 1826년 9월 29일 그의 조카와 함께 그나익센도르프에 있는 그의 형제 요한의 집으로 옮겨 석달동안 머물렀다. 12월 초, 춥고 습한 날씨에 열린 차를 타고 빈으로 돌아오는 여행에서 베토벤은 폐렴에 걸렸다. 회복 직후 다리와 복부의 수분 저류 및 황달과 함께 심각한 간경변 증상이 나타나 베토벤은 더 이상 병상을 떠날 수 없었다. 카를은 12월 동안 베토벤의 침대 옆에 머물렀다. 하지만, 다음 해 1월 초에 이흘라바에 입대하기 위해 떠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베토벤에게 편지를 썼다ː "사랑하는 아버지... 나는 만족하며 살고 있으면서도, 당신과 헤어지게 된 것 만은 후회합니다." 하지만 카를은 삼촌을 다시 보지 못했다. 카를이 떠난 직후 베토벤은 그의 조카를 유일한 상속자로 만드는 유언장을 썼다.

1월 말에는 베토벤의 병 치료를 위해 말파티 박사가 참석했다. 그의 치료는 주로 알코올에 집중되었다. 베토벤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소식이 퍼지자 디아벨리, 슈판치히, 리히노프스키, 쉰들러, 훔멜과 그의 제자 페르디난트 힐러를 포함한 많은 오랜 친구들이 방문했다. 런던 필하모닉 소사이어티에서 온 백 파운드, 쇼츠에서 온 값비싼 와인을 포함하여 많은 조공과 선물도 보내졌다. 이 시기 동안 베토벤은 때때로 자신을 일으켜 세우려는 용감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거의 완전히 병상에 누워 있었다. 3월 24일, 그는 쉰들러와 다른 사람들에게 "박수를 쳐주게, 친구들, 희극은 끝났네."라고 말했다. 그날 늦게, 쇼트에서 온 와인이 도착했을 때, 그는 속삭였다. "애석하군, 너무 늦었네."

여러 의사들에 의한 몇 차례의 천공과 실패한 치료 시도 끝에 베토벤은 1827년 3월 26일 5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마지막 의사는 안드레아스 이그나츠 바브루흐였다. 베토벤의 임종시, 안젤름 휘텐브렌너와 요한나 판 베토벤 만이 참석했다. 바르부흐에 따르면, 오후 5시 경에 번개와 천둥 소리가 들렸다ː "베토벤은 눈을 뜨고 오른손을 들어 주먹을 쥐고 몇 초 동안 올려다 보았다. 더 이상 숨을 쉬지 않았고, 심장박동도 뛰지 않았다." 많은 방문객이 임종을 보러왔다. 죽은 사람의 머리카락 일부는 휘텐브렌너와 힐러에 의해 보관되었다. 부검 결과 베토벤은 과도한 알코올 섭취와 청각 및 기타 관련 신경의 상당한 확장으로 인해 심각한 간 손상을 입었다.

3월 29일 배링 지역 공동 묘지의 매장은 빈 인구의 큰 공감으로 이루어졌다. 약 2만명이 장례 행렬에 참여했다. 프란츠 그릴파르처가 쓴 장례식 연설은 배우 하인리히 안쉬츠가 연설했다. 불과 1년 후 베토벤을 따라 무덤까지 가야했던 프란츠 슈베르트는 훔멜, 체르니, 그릴파르처, 마이세더, 슈판치히, 카스텔리, 베른하르트, 피링거, 하슬링거, 뵘, 슈트라이허, 슈타이너, 홀츠, 볼프마이어, 링케와 함께 36명의 성화 운반자 중 한 명으로서 그에게 마지막 경의를 표했다.

베토벤의 시신은 두 번 발굴되었다. 1863년에 뼈를 측정하고 두개골을 촬영했다. 1888년에 그의 유골은 다시 대중적인 지지를 받으며 빈 중앙묘지의 명예 묘역으로 옮겨졌다.
작곡 : Johannes Brahms (요하네스 브람스)
요하네스 브람스(독일어: Johannes Brahms, 문화어: 요한네스 브람스, 1833년 5월 7일 ~ 1897년 4월 3일)는 독일의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 첼리스트, 바이올리니스트, 지휘자이다. 함부르크 출생으로 오스트리아 빈에서 주로 음악가 생활을 했으며, 당대 낭만주의 음악의 선도적 존재였다. 일생동안 그는 높은 인기와 영향력을 가졌으며, 19세기 지휘자 한스 폰 뷜로에 따르면 그를 요한 제바스티안 바... 요하네스 브람스(독일어: Johannes Brahms, 문화어: 요한네스 브람스, 1833년 5월 7일 ~ 1897년 4월 3일)는 독일의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 첼리스트, 바이올리니스트, 지휘자이다. 함부르크 출생으로 오스트리아 빈에서 주로 음악가 생활을 했으며, 당대 낭만주의 음악의 선도적 존재였다. 일생동안 그는 높은 인기와 영향력을 가졌으며, 19세기 지휘자 한스 폰 뷜로에 따르면 그를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루트비히 판 베토벤과 더불어 "3B"로 칭하기도 했다고 한다.

브람스는 여러 피아노곡, 실내악, 교향악, 성악, 합창곡을 작곡했다. 피아니스트로서 그는 여러 자신의 작품을 초연했으며, 비르투오조 피아니스트 클라라 슈만,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요하임과 함께 당대의 뛰어난 연주자였다. 브람스의 여러 작품은 현대 음악회에서도 자주 연주되는 레퍼토리이다. 완고한 완벽주의자였던 그는 수많은 자신의 작품을 없애거나 출판하지 않기도 했다.

브람스는 전통주의자이자 혁신자였다. 구조나 작곡 기법면에서 그는 바로크와 고전파 음악에 굳게 뿌리를 두고 있었다. 그는 대위법의 대가였다. 이런 구조와 함께 그는 화성과 음색에 대한 대담하고도 새로운 시도로 당대 조성 음악의 개념을 바꾸어놓았다. 그의 업적과 기예는 아르놀트 쇤베르크에서 에드워드 엘가에 이르기까지 후대 여러 음악가들의 찬탄의 대상이었다. 브람스의 작품은 결국 조성을 버리게 되는 아르놀트 쇤베르크 등 한 세대의 음악가군의 시작점이자 영감의 원천이었다.

브람스의 작품은 독일 낭만파 중에서 비교적 보수적인 경향을 갖고 있다. 그의 작품은 고전파적인 양식 위에 서서, 중후하고 북독일적인 맛을 지니며, 또한 아름다운 서정성도 갖고 있다. 그가 작곡한 4개의 교향곡은 어느 것 하나 빠짐없이 걸작으로 그 중에서 교향곡 1번은 베토벤의 제9에 이어지는 제10교향곡이라고 할 만큼 베토벤의 영향을 받고 있지만, 동시에 자신의 독자적인 세계를 쌓아올린 뛰어난 작품이다. 바이올린 협주곡도 놀랄 만한 완성도에서 베토벤의 곡 다음에 놓일 만한 가치가 있다. 피아노 음악에서도 피아니스틱한 화려한 기교를 배격하고 중후한 작품을 작곡하였다. 두 개의 피아노 협주곡은, 피아노가 관현악과 밀접히 결합되어 있는 데에 특색이 있다. 독주곡에서는 <파가니니 변주곡>(1863), <헨델 변주곡> 등이 뛰어났고, 연탄용(連彈用)인 <헝가리 무곡>은 특히 유명하다. 실내악에도 특필할 만한 작품이 많은데, <클라리넷 5중주곡>이 많이 연주되고 있다. <대학 축전 서곡>, <비극적 서곡>도 많이 알려져 있다. 그는 성악곡을 작곡하는데 있어서도 뛰어난 수완을 보였다. 200여 곡의 가곡과, 중후하고 교묘한 화성은 다소 가까이하기 어렵지만, <알토 랩소디> 등 깊은 슬픔을 담은 명작이 많다. 그리고 마지막엔 심각한 종교적인 작품 <독일 레퀴엠>(1866-1869)을 들 수 있다. 그의 암담하고 우울한 깊이가, 여기에서는 다듬어진 아름다움 속에 정화(淨化)되고, 모든 사람을 감명시키는 숭고함에 이르고 있다.

요하네스 브람스는 세레나데, 교향곡 네 곡, 피아노 협주곡 두 곡, 바이올린 협주곡 한 곡, 바이올린과 첼로 이중 협주곡 한 곡, 관현악 서곡(대학축전 서곡, 비극적 서곡) 등 수많은 관현악 작품을 남겼다.

그의 합창 대작 독일 레퀴엠은 전례상의 장송 미사(Missa pro defunctis)의 내용이 아니라 브람스가 루터 성서에서 고른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작품은 그의 일생에서 세 번에 걸쳐 작곡되었다. 2악장의 초기 판본은 로베르트 슈만이 자살한 지 얼마 안된 1854년에 작곡한 것으로, 나중에 피아노 협주곡 1번에 쓰였다. 레퀴엠의 대부분은 1865년 어머니가 죽은 뒤에 작곡하였다. 5악장은 1868년 공식 초연 이후에 덧붙인 것으로, 작품은 1869년에 출판하였다.

브람스의 변주곡 작품으로는 슈만 주제에 의한 변주곡, 헨델 주제에 따른 변주곡과 푸가, 파가니니 변주곡(둘 다 피아노 독주), 그리고 하이든 주제에 따른 변주곡(피아노 연탄곡과 관현악용 두 판본)이 있다. 교향곡 4번의 마지막 악장은 형식적으로 파사칼리아이다.

그의 실내악곡으로는 현악 4중주 세 곡, 현악 5중주 두 곡, 현악 6중주 두 곡, 클라리넷 5중주, 클라리넷 3중주, 호른 3중주, 피아노 5중주, 피아노 4중주 세 곡, 피아노 3중주 네 곡(4번은 작품번호가 없다)이 있다. 그는 피아노가 반주하는 독주 소나타도 많이 썼는데, 바이올린 소나타 세 곡, 첼로 소나타 두 곡, 클라리넷 소나타 두 곡(이 두곡은 본인이 비올라 소나타로 편곡하였다)이 있다. 또 피아노 독주곡으로는 초기의 피아노 소나타와 발라드에서 나중의 소품 모음집 등 다양하다. 브람스는 가곡(Lied)에서도 중요한 작곡가로서 200곡이 넘는 가곡을 썼다. 그가 죽기 직전에 쓴 오르간 합창 전주곡(chorale preludes) Op.122는 오르간 주자의 중요한 연주곡목이기도 하다.

브람스는 음악에서 특정한 묘사나 이야기를 배제하는 절대 음악의 신봉자였으며, 오페라와 교향시를 전혀 쓰지 않았다.

브람스는 흔히 크고 복잡한 음악 구성을 보이는 진지한 음악가란 평을 받고 있지만, 브람스 생전에 유명해져 상업적으로 성공한 일부 작품 중에는 대중의 기호에 맞게 당대의 번성하던 음악 시장에 적합한 곡도 있다. 20세기 미국의 영향력 있는 비평가 B.H. 하긴은 브람스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를 거부하고 자신의 여러 녹음 음악 안내서에서 브람스는 그러한 작품에서 인기를 얻었지만, 규모가 더 크고 진지한 음악에서는 그에 미치지 못했다고 주장하였다. 브람스가 쓴 이런 류의 가벼운 곡으로는 춤곡집(헝가리 춤곡 왈츠 Op.39 피아노 연탄곡, 성악 4중창과 피아노의 "사랑의 노래 왈츠"(Liebeslieder Waltzes)), 몇몇 성악 작품("자장가Wiegenlied" Op.49 4번이 유명하다. 1868년 출판.) 등이 있다. 브람스의 '자장가'는 친구 베르타 파버의 아들이 태어난 것을 축하하기 위해 썼다.

브람스는 자신의 작품에 고전파의 형식과 질서를 담아내어 당대 여러 화려한 음악과 대조된다. 그리하여 브람스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이들은 신독일 악파의 표제 음악과 대비하여 그를 전통 형식과 "순수 음악"의 대가로 보았다.

브람스는 베토벤을 숭상하였다. 그의 집에는 베토벤의 대리석 흉상이 그가 작곡하던 곳을 내려다보고 있으며, 그의 작품에서 일부 악절에서는 베토벤의 양식을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브람스 교향곡 1번의 4악장 주요 주제는 베토벤 교향곡 9번의 피날레 주제와 닮았으며, 브람스 본인도 그러한 유사성에 대해 아무리 멍청이(jeder Esel)라도 이 점을 알 수 있다고 지적하였다.

독일 레퀴엠은 어느 정도는 1865년 어머니의 죽음에서 영감을 얻었지만, 한편으로 1854년에 작곡을 시작하다가 슈만이 자살을 시도한 뒤 포기한 어느 교향곡 초고에서 내용을 가져온 것이기도 하다. 그는 한때 "슈만의" 레퀴엠을 쓰기도 하였다. 그가 포기한 이 교향곡 작품의 첫 악장은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1번의 첫 악장으로 쓰였다.

브람스는 고전파 작곡가인 모차르트와 하이든도 좋아하였다. 그는 이들 작품의 친필 악보나 첫 판을 수집하였으며, 편집하기도 하였다. 또 브람스는 조반니 가브리엘리, 요한 아돌프 하세, 하인리히 쉬츠 그리고 특히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등 고전파 이전 작곡가의 음악도 연구하였다. 그의 친구로 탁월한 음악학자들도 있었는데, 프리드리히 크리산더와 함께 브람스는 프랑수아 쿠프랭의 작품 판본을 편집하기도 하였다. 그는 엄격한 대위법 기술에서 영감을 얻기 위해 옛 음악을 검토하였는데, 그의 작품 가운데 일부 주제는 바로크 음악에서 본뜬 것도 있다. 가령 브람스 첼로 소나타 1번의 푸가로 된 피날레는 바흐 작품 푸가의 기법을 참조하였으며, 브람스 교향곡 4번 4악장의 파사칼리아는 바흐의 칸타타 150번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젊은 브람스를 격려해준 슈만 등 초기 낭만파 음악가들도 브람스에 큰 영향을 주었다. 브람스는 로베르트 슈만과 클라라 슈만과 종종 만나기도 하였다. 1862~63년 빈에 체제할 적에 브람스는 특히 프란츠 슈베르트의 음악에 관심을 기울였다. 슈베르트의 영향은 이 시기 브람스의 작품인 피아노 4중주 Op.25와 Op.26, 그리고 슈베르트 현악 5중주와 대 2중주가 암시된 피아노 5중주에서 드러난다. 혹자는 브람스의 작품에서 쇼팽과 멘델스존의 영향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여기기도 하지만, 이들이 브람스에 영향을 주었다는증거는 거의 없다. (가령 브람스의 스케르초 Op.4는 쇼팽 스케르초 B-flat단조, 그리고 브람스 피아노 소나타 3번 F단조 Op.5는 멘델스존 피아노 3중주 C단조를 암시한다는 식이다.)

베토벤처럼 브람스도 자연을 좋아하여, 자주 빈 근처의 숲에서 산책을 했다고 한다. 그는 주머니에 사탕을 넣어둬 아이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성인 브람스는 종종 무뚝뚝하거나 냉소적이었고, 때론 다른 사람들을 멀리하기도 했다. 그의 제자 구스타프 예너는 "브람스가 불평쟁이 평판을 듣는데는 이유가 있다. 또 그를 매력적으로 보는 사람도 거의 없다." 그는 빈의 그가 좋아하는 "붉은 고슴도치" 술집에 날마다 드나드는 것처럼 빈의 언론이 보도한 예상할만한 습관이 있었다. 그래서 언론에서는 그가 등짐을 지고 걷는 모습을 그가 붉은 고슴도치 술집으로 걸어가는 캐리커처로 묘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친구로 남은 사람들은 그에게 충실했으며, 브람스도 이들에게 성실하고 관대하게 대했다.

브람스는 요한 슈트라우스 2세와 매우 다른 유형의 작곡가였지만, 그와 평생지기였다. 그는 1897년 죽음을 앞두고 빈의 빈 극장에서 초연하는 슈트라우스의 오페레타 이성의 여신(Die Gottin der Vernunft)에 가려고 하기도 했다. 아마 브람스가 슈트라우스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은 슈트라우스의 푸른 도나우 왈츠를 쓰는데 무언가 도움을 주겠다고 쓴 글일 것이다. 브람스가 슈트라우스와 안면을 트게 되었을 때, 슈트라우스의 아내 아델레(Adele)가 브람스에게 팬이라며 사인을 부탁하자, 브람스는 "푸른 도나우" 왈츠의 음표 몇 개를 쓰고는, "슬프게도 (이건) 브람스의 작품이 아니다!"라고 썼다.

1860년대부터 그의 작품은 널리 팔려, 브람스는 재정적으로 크게 성공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방 셋짜리 아파트에 하녀 한 명을 두며 검소한 생활을 좋아했다. 그는 친척들에게 많은 돈을 썼으며, 젊은 음악가들에게 이름을 숨기고 도와주기도 했다.

그는 극단적인 완벽주의자였다. 그는 자신의 레메니나 바이올리니스트 페르디난트 다비트가 연주한 바 있는 바이올린 소나타 등 여러 초기의 작품들을 없애버렸으며, 1873년 첫 공식 현악4중주곡이 나오기 전에 20곡의 현악4중주곡을 없앴다고 이야기한 적도 있다. 수 년 동안 곡을 고친 끝에 그는 당초 D단조 교향곡으로 쓸 곡을 자신의 첫 피아노 협주곡으로 바꾸기도 했다. 그의 세밀함을 보여주는 다른 예로는 그의 교향곡 제1번인데, 이 곡은 약 1861년부터 1876년까지 거의 15년이 걸려서 쓴 곡이다. 이 곡을 몇번 연주한 뒤 브람스는 악보가 출판되기 전에 원래의 느린 악장을 없애고 새로 악장을 썼다.(원래의 느린 악장을 추측하여 복원한 판본을 로버트 파스칼이 출판한 바 있다) 브람스가 완벽주의자가 된 한 가지 이유로는 초기에 슈만이 그를 이르러 베토벤에 버금갈 음악가로 평가한 것 때문이기도 한데, 이 예언으로 브람스는 베토벤을 따라 잡을 수 있도록 매진하게 되었다. 슈만의 예언에 브람스는 거의 자신감을 얻지 못했으며, 아마 이 때문에 첫 교향곡 완성을 늦춘 것 같다. 그러나 클라라 슈만은 그 전부터 교향곡 1번이 그의 진짜 성격을 반영한 것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클라라는 초고에서 본 어둡고 맹렬한 1악장에 매료되었기 때문에, 활기찬 마지막 악장이 "너무 화려하다"고 느꼈다. 그러나 클라라 슈만은 교향곡 2번을 인정하여 자신의 생각을 거두었는데, 이 작품은 오늘날에도 자주 들을 수 있으며, 브람스의 밝은 작품이다. 하지만 당대의 다른 사람들은 1악장이 특히 어둡다고 생각했는데, 교향곡 2번을 19세기의 우수(melancholia) 감정과 연관지어 연구했던 라인홀트 브링크만가 출판한, 브람스가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빈첸츠 라히너(Vinzenz Lachner)에 보낸 편지에서 브람스는 자신의 성격에 우울한 면이 있으며, 1악장에서 그런 성격이 반영되었다고 쓴 바 있다.
작곡 : Edvard Grieg (에드바르드 그리그,Edward Hagerup Grieg)
성악가 (소프라노) 성악가 (소프라노)
연주 : Maria Joao Pires (마리아 주앙 피레스)
4세에 공개무대에서 연주하고 5세에 첫 리사이틀, 7세에 모차르트의 협주곡연주, 9세에 포르투갈의 ‘젊은 음악상’에 1등을 하는 등 일찍부터 천재성을 주목받았다. 1961년 17세 때 구르벤키안 재단의 장학금으로 뮌헨에 유학하여 그곳에서 엥겔과 슈미트를 사사하면서 그 재능을 본격적으로 꽃피웠다. 70년 브뤼셀에서 열린 베토벤 탄생 200주년 기념 콩쿠르의 우승을 계기로 국제 무대로의 길이 열렸다. 단정한 스타일,... 4세에 공개무대에서 연주하고 5세에 첫 리사이틀, 7세에 모차르트의 협주곡연주, 9세에 포르투갈의 ‘젊은 음악상’에 1등을 하는 등 일찍부터 천재성을 주목받았다. 1961년 17세 때 구르벤키안 재단의 장학금으로 뮌헨에 유학하여 그곳에서 엥겔과 슈미트를 사사하면서 그 재능을 본격적으로 꽃피웠다. 70년 브뤼셀에서 열린 베토벤 탄생 200주년 기념 콩쿠르의 우승을 계기로 국제 무대로의 길이 열렸다. 단정한 스타일, 명쾌한 터치에서 오는 투명한 울림, 치밀하고 청결한 감각 등은 특히 모차르트에서 십분 발휘되며, 일본 컬럼비아의 『모차르트/피아노 소나타 전집』 은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1960년 베를린 음악 콩쿠르 제2위
리스트 콘체르트상 제1위
1970년 베토벤 탄생 200주년 기념 콩쿠르 제1위
연주 : Pavel Gomziakov (파벨 곰지아코프 (첼로))
20대의 젊은 나이로 세계적인 반열에 오른 동시에 21세기의 가장 촉망받는 아티스트인 바이올리니스트 르노 카퓌송(Renaud Capucon)은 솔리스트,그리고 실내악 주자로서 전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 1976년 1월 27일,프랑스 샹베리(Chambery)에서 태어난 르노 카퓌송은 14세 때부터 파리국립고등음악원에 입학하며 본격적인 음악 공부를 시작했다. 1995년 그는 베를린 예술대학에 입학했으며,토마스 ... 20대의 젊은 나이로 세계적인 반열에 오른 동시에 21세기의 가장 촉망받는 아티스트인 바이올리니스트 르노 카퓌송(Renaud Capucon)은 솔리스트,그리고 실내악 주자로서 전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 1976년 1월 27일,프랑스 샹베리(Chambery)에서 태어난 르노 카퓌송은 14세 때부터 파리국립고등음악원에 입학하며 본격적인 음악 공부를 시작했다. 1995년 그는 베를린 예술대학에 입학했으며,토마스 브란디스,아이작 스턴,슐로모 민츠,오귀스탱 뒤메이를 사사하였다. 1997년 르노 카퓌송은 클라우디오 아바도의 특별 초청을 받아 '구스타프 말러 유겐트 오케스트라'의 수석 바이올리니스트로 활동했고,이 때 피에르 불레즈,세이지 오자와,다니엘 바렌보임,프란즈 벨저-뫼스트,클라우디오 아바도와 같은 명 지휘자들과 함께 연주했다.

2000년 프랑스의 저명한 음악상인 'Victoires de la Musique'(음악의 승리)는 르노 카퓌송을 '올해의 신인'으로 선정하고 그를 'Rising Star 2000'으로 지목했다. 솔리스트로서 르노 카퓌송은 베를린 필하모닉,유럽 체임버 오케스트라,프랑스 국립 오케스트라,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보스턴 심포니,NHK 심포니와 같은 유럽,미국,일본의 주요 오케스트라와 협연했다. 이때 함께한 지휘자로는 버나드 하이팅크,정명훈,크리스토프 폰 도흐나니,샤를 뒤투아,세미욘 비취코프,크리스토프 에센바흐,이반 피셔, 다니엘 하딩,볼프강 자발리쉬 등이 있다.
연주 : Antonio Meneses (안토니오 메네세스 )
첼로 연주자 첼로 연주자
연주 : Jian Wang (지안 왕 (첼로))
연주 : Augustin Dumay (오귀스탱 뒤메이 )
바이올린 연주자 바이올린 연주자
지휘 : Emmanuel Krivine (엠마뉘엘 크리빈)
지휘 : Andre Previn (앙드레 프레빈)
독일에서 태어났으나 미국으로 귀화한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 독일에서 태어났으나 미국으로 귀화한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
지휘 : Claudio Abbado (클라우디오 아바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태어났다. 밀라노 주세페 베르디 음악원에서 지휘, 피아노, 작곡을 배웠다. 이 음악원을 졸업한 다음 빈에서 한스 스바로프스키에게 지휘를 배웠다. 1958년에 미국의 탱글우드에서 쿠세비츠키 상(賞)을 받았다. 1960년에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의 탄생 3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열린 갤러콘서트에서 스칼라 오페라 극장에 데뷔했다. 1963년에 뉴욕에서 열린 디미트리 미트로풀로스 지휘자 콩쿠르에서 ...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태어났다. 밀라노 주세페 베르디 음악원에서 지휘, 피아노, 작곡을 배웠다. 이 음악원을 졸업한 다음 빈에서 한스 스바로프스키에게 지휘를 배웠다. 1958년에 미국의 탱글우드에서 쿠세비츠키 상(賞)을 받았다. 1960년에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의 탄생 3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열린 갤러콘서트에서 스칼라 오페라 극장에 데뷔했다. 1963년에 뉴욕에서 열린 디미트리 미트로풀로스 지휘자 콩쿠르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1965년 8월 14일에, 빈 필하모니를 지휘하여 잘츠부르크 음악제에 데뷔했다. 그 때의 작품은 말러의 [교향곡 제2번]이었다. 1967년에 처음으로 스칼라 오페라 극장에서 시즌 최초의 공연을 지휘했다. 작품은 벨레니의 오페라 [카풀레티와 몬테키]였고, 1968년의 잘츠부르크 음악제에서 로시니의 오페라 [세빌랴의 이발사]를 지휘했다. 그 해에 스칼라 극장 관현악단의 수석 지휘자로 임명되었다.

1970년에 베르디의 오페라 [돈 카를로]를 스칼라 극장에서 지휘하였다. 이 작품은 그 뒤에 런던의 코벤트 가든 왕립 오페라 극장이나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에서도 지휘하였다. 1971년에 빈 필하모니의 수석 지휘자로 지명되었다. 뮌헨 음악제에 처음으로 참가하여, 베르디의 오페라 [시몬 보카네그라]를 지휘하였다. 1972년에 베를린에서 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의 첫날을 지휘하였다. 이해에 밀라노의 스칼라 극장의 음악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올림픽 기간 동안 뮌헨에서 스칼라 극장의 오케스트라와 코러스를 지휘하여 베르디의 [레퀴엠]과 오페라 [아이다]를 연주한 것도 1972년의 일이다. 1973년에 빈의 모차르트 협회에서 모차르트 메달을 그에게 주었다. 이해에 클리블랜드 관현악단 및 필라델피아 관현악단과 함께 미국을 연주 여행하였고, 빈 필하모니와 함께 우리 나라를 비롯하여 일본과 중국도 연주 여행하였다. 이때가 아바도의 첫 한국 방문이었다. 더욱이 이 해에는 런던교향악단의 수석 객원 지휘자로 임명되었다. 1974년에는 아바도로서는 최초의 모차르트의 오페라인 [피가로의 결혼]을 스칼라 극장에서 지휘하였다. 이렇게 해서 아바도는 착착 그 활동의 무대를 넓혀 온 셈인데 그 활동 무대 확대 방식은 용의주도하였다. 이것은 레퍼토리의 선택 방식에서도 볼 수 있다. 이제까지(1981년 봄) 아바도는 이탈리아의 지휘자이고 이탈리아 오페라의 메카로 이름난 스칼라 극장의 음악 감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푸치니에 의해 대표되는 베르디 이후의, 일반적으로 베리스모 오페라라고 불리는 오페라를 조심성 있게 피해 왔다. 한편으로 프로코피예프나 스트라빈스키의 작품에 대하여 적극적인 관심을 표시하고, 더욱 루이지 노노의 신작 초연을 종종 하기도 했다. 이러한 것으로부터 아바도의, 굳이 말한다면 지성파(知性派)라고 할 수도 있는 지휘자로서의 본연의 자세가 떠오를 것이 틀림없다. 사실 아바도의 연주는 열기에 가득 찼다든가 또는 정열적이라든가 하는 형용이 걸맞지 않으며, 오히려 지적인 성격을 띄고 있다고 하겠다. 그의 연주는 언제나 명쾌하고, 조금의 애매모호함도 없으며, 그 작품의 양식적인 아름다움을 뚜렷이 떠오르게 하는 것이 특징이다. 지휘자로서는 아직도 젊다고 할 수 있는 아바도에게 요구되는 것은 아마 그 정교하고 치밀함을 잃지 않으면서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풍부한 표현일 것이다. 이제까지의 아바도는 문자 그대로의 수재 코스를 걸어 왔고 충분한 성과를 올렸다. 1989년 정식 상임 지휘자가 없는 빈 필하모니의 준상임 지휘자로 있었으며, 1989년 카라얀의 사망으로 그의 휘하였던 베를린 필의 제5대 음악 감독으로 취임해 세계적인 관심과 이목을 집중시켰다.
지휘 : Frans Bruggen (프란츠 브뤼헨)
지휘자 / 리코더, 플루트 연주자 지휘자 / 리코더, 플루트 연주자
오케스트라 : Chamber Orchestra of Europe (유럽 실내 관현악단)
오케스트라 : Royal Philharmonic Orchestra (로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전설적인 지휘자인 토마스 비첨에 의해 1946년 설립된 런던이 자랑하는 5대 오케스트라의 하나로 세계 일류급 관현악단으로 평가받고 있다. 거장 지휘자들과 뛰어난 연주자들의 참여로 수많은 명연들을 탄생시켰으며, 파격적인 레퍼토리와 다양한 활동으로 대중적인 인기도 또한 높다. 오늘날 클래식 음악문화에 있어서 그 이름만으로도 명품 클래식을 상징하는 아이콘이 되고 있다. 전설적인 지휘자인 토마스 비첨에 의해 1946년 설립된 런던이 자랑하는 5대 오케스트라의 하나로 세계 일류급 관현악단으로 평가받고 있다. 거장 지휘자들과 뛰어난 연주자들의 참여로 수많은 명연들을 탄생시켰으며, 파격적인 레퍼토리와 다양한 활동으로 대중적인 인기도 또한 높다. 오늘날 클래식 음악문화에 있어서 그 이름만으로도 명품 클래식을 상징하는 아이콘이 되고 있다.
오케스트라 : Wiener Philharmoniker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Vienna Philharmonic Orchestra (VPO),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오케스트라 : Orchestra Mozart (모차르트 오케스트라,Orchestra Mozart or Orchestra Mozart Bologna)
오케스트라 : Mozarteum Orchester Salzburg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 오케스트라)
오케스트라 : Berliner Philharmoniker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Berlin Philharmonic Orchestra, BP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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