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모여 있는 일곱개의 단편들은 저마다 자기 색을 갖기 위한 힘겨운 실험 속에서도, 예의 그 작가의 재기발랄한 유쾌함을 빠뜨리지 않는 풍성함을 안겨다 준다. 그 풍성함 속에는 농담도 있고, 사유도 있고, 그럴듯한 아포리즘도 있다. 은희경 상표라고 불릴만한 것도 있고, 그와는 다른 새로운 브렌드도 있다. 하지만 그 모든게 참 잘 섞여 있다. 도가니탕이 아니라 야채 샐러드다. 봄냄새 물씬 풍기는 야채 샐러드의 푸릇한 색을 갖추고 있다. 모양새가 그렇다면, 맛은 또 어떨까? 당연히 샐러드인 만큼, 재료 하나 하나의 맛을 볼 수 있다. 국물 맛을 보던 작가의 장편소설과는 또 다른 음식맛을 안겨 준다. 입맛을 잃었다면 권해 주고 싶은 음식. 그게 이 책의 역할이며, 미덕이다.
첫번째 소설 '명백히 부도덕한 사랑'은 '은희경'이라는 상표가 아주 또렷히 붙어 있다. 상표를 떼버린다고 해도 쉽게 알 수 있는, 명백히 그녀의 스타일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작품이다. 유부남을 사랑하는 여자, 그 여자를 둘러싼 문제있는(?) 가족, 냉소적인 시선을 곁두지 않는 스타일, 그 복잡한 이중적 상황 하에서 사랑을 이해하고, 가족의 의미를 깨우치고, 자신의 한계를 가늠하며, 그로 인해 또 다른 삶을 드러내는 포맷. '명백히' 은희경적인 작품. 그런 이유, '명백히 은희경적'이라는 이유로 인해 읽는 재미는 있지만 별로 남는 건 없는 희안한 작품이다. '사랑은 그렇지 않다. 언제까지나 지속된다고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배타적이 된다. 독점욕이 생기고, 그 독점욕이 구속을 낳는다. 그 때문에 사랑 자체가 파괴된다 할지라도 그 덫을 피할 수는 없다.'(p.23). 맞는 말이긴 하다. 하지만, 그 덫이 무서워 사랑을 포기한다면.....? 건 못난 짓이고 아주 비겁한 짓이다. 사랑한다면, 독점욕도, 집착도, 그로 인한 구속도 사랑의 또 다른 모습임을 이해하도록 and/or 이해시키도록 노력해야 한다. 사실 그런 이해라는게 거의 불가능에 가깝긴 하지만.......
두번째 소설 '멍'은 학교 다닐 때 '잡지방'(도서관 잡지 있는 열람실을 우린 그렇게 불렀다)에서 재밌게 본 단편인데, 이번에도 아주 재밌게 읽었다. 작가는 소위 사이버 컬춰라는 것에 너무 예민하게 냉소적이다. 이전 작품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에선 '섹스란 스타크래프트 같은 것하곤 비교도 안될 만큼 재미....' 운운하더니, 이번엔 '왜 컴퓨터에서 불현듯이라고 치면 삐릭, 소리가 나면서 불현과 듯을 띄어 버리고 신호등이라고 치면 신호와 등을 제까닥 떼놓잖아. 나중에는 그 단어를 잘 안 쓰게 되더라구. 이런걸 무슨 경우라고 하는지, 혹시 '반항'인가?'(p.73)에서 처럼, 한글의 자동교정 기능을 비꼰다. 재미없는 냉소다. 냉소란 좀 더 그럴듯해야 한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작가는 '어느 소설'에서 봤는데...하는 문구를 자주 쓴다.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에서 '달을 보면서 아내의 생리주기를 생각한다던' '어느 소설'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태엽감는 새'이다. 그렇다면, p.59 '학교와 군대와 감옥의 가장 나쁜 점이 함께 발달되어 있는 곳이 소년원이라는 주장을 나도 어느 소설에선가 읽었다'의 '어느 소설'은? 그 '어느 소설'은 지금은 절판되어 나오지 않는 장정일의 초기 소설(?)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이다. 소설이라고 하기에는 좀 뭐한 이 책을 난 대학 저학년 때 잡지방을 함께 다니던 친구집에서 읽었다. 장정일의 이 책이나, <통일주의>와 같은 초기 시집을 90년대 학번이 초판본으로 가지고 있다는 걸 한편으론 뿌듯하게 느낀다고 몰래 말해주던 그 친구를 본 지도 참 오래됐다. 전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세번째 소설이자, 표제작인'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는 작가의 새로운 시도다. 어머니와 자살한 애인을 교차통행시키며 회상하는 이러한 형식은 외국 소설에서 본듯한 느낌이 든다. 그래서인지 이 단편 역시 전에 읽었던가 하며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은희경의 나래이터는 사진을 보고 읇조리며 기억을 회상한다. 반면 신경숙이었다면.....말할 것도 없이 편지를 쓴다. 신경숙의 나래이션은 편지를 통해서 이루어 질때가 가장 그녀답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홍콩이나 중국영화에서 웅얼웅얼 대는 선문답같은 나래이션을 참 좋아하는 나, 그런 이유로 여유있게 읽을 수 있었던 작품.
네번째 소설 '서정시대'는 97년 문학동네 봄호에서 읽었던 작품이다. 계간지 문학동네에는 '젊은 작가 특집'과 '외국 작가 특집'이라는 구역이 있다. 그 중 '젊은 작가 특집'을 위해 씌여진 소설, 그래서 아주 아주 자전적인 이 작품은 작가 은희경의 개인사를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여담으로 이 계간지 문학동네에서 터뜨린 가장 호사스러웠던(?) 대박은 젊은 작가로 '장정일', 외국 작가로 '무라카미 하루키'를 다뤘던 통권 2호다. 그 대박 이후 2년여간 꾸준히 구입해 봤지만, 지금은 보지 않는다. 왠지 지금은 계간지를 보는 시대가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그런 집도 절도 없는 논리가 어디 있냐고 반문하면, 뭐라고 딱히 할 말은 없지만.....왠지 그런 느낌이 든다. 지금은 계간지를 보는 시대가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다섯번째 소설 '지구 반대쪽'. 졸면서 읽었나? 아무 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 작품집에서 가장 기이한 단편인 여섯번째 소설 '여름은 길지 않다'는 지극히 모자이크적인 작품이다. 영화 같기도 하고, 연극 같기도 한 이 작품에는 비슷 비슷한 기억들을 떠 올리게 하는 구절들이 상당하다. 매일 3킬로그램씩 체중을 늘리는 또라이는 영화 '세친구'를, '너 슈퍼맨 티 샀구나?', '응. 사은품으로 타이쯔도 받았어.'하는 구절은, 영화 '강원도의 힘'의 다음과 같은 대화, '너 나이키 신발 샀구나?', '응. 잘 미끄러지지 않는 재질로 만든거래.'를 떠 올리게 한다. 그리고 전체적으로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나 '1973년의 핀볼' 같은 하드보일드 풍을 느끼게 해 준다. 그래서 그럭저럭 정신없이 영화를 한편 본듯한 느낌이 든다. 성공한 실험인지, 실패한 실험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난 재미있게 읽었다. 은희경이 이런 치기도 있었구나 하면서 말이다.
요즘 난 동생의 하드트레이닝 아래 'All My Loving'과 'I Will'을 열심히 코드를 뜯으며 배우고 있다. 그 때마다 드는 생각 중에 하나가 '아닌 것 같아도, 비틀즈는 상당한 고음이야'라는 허망한 느낌인데, 마지막 작품 '인 마이 라이프'의 남자는 자신만의 저음으로 존 레넌의 동명 노래를 근사하게 부를 줄 안다. 당연히 이 남자에게 여자들은 끌리게 되고, 삼각관계가 이루어지게 된다. 뭐 거기까지야 별 문제 있겠어? 했지만, 역시 은희경. 아내가 있는 남자의 바람이 잔잔하면, 이번엔 남편이 있는 아내의 허허로운 바람기가 살아 난다. 그렇게 엮이게 되는 여자들과 '인 마이 라이프'를 부르는 남자, 게다가 나중에 이 관계에 얼추 섞여버리고 마는, 남자를 좋아하는 여자의 남편.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기록하는 나래이터, 카페 '인 마이 라이프'의 여주인 혜린. 일곱편의 단편중에 가장 재미있었던 작품이다. 재미있었다는게 왠지 신파에는 정이 잘 붙는 내 취향에 딱이였다는 말이지, 소설의 문제로 접어 들면 또 모르겠다. 다른 사람들은 가장 처지는 작품중의 하나로로 취급할지도 모르겠다. 이 역시 은희경표라고 하면 은희경표라고 할 수 있는 그녀만의 스타일이 드러나는 작품이다.
다른 거 없다. 은희경의 작품은 일단 잘 읽혀서 좋다. 어차피 현재의 내 책읽기라는게 시간 떼우기고, 재미를 찾는 단순한 행위에 불과한 만큼, 잘 읽힌다는 것 그 한가지 만으로도 이 책은 권장할 만 하다. '그녀에겐 댄디즘이 너무 강해', '독하고, 자의식 강한 여자들....읽다 보면 느는건 냉소밖에 없어' 등의 핀잔은 나중 문제다. 다 알면서도 신간이 나오면 꼬박 꼬박 책을 챙겨 읽게 하는 그 무엇. 그게 은희경의 카리스마고 밉지 않은 주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