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야기는 김포시 월곶면 고막리 주민 2백 여명이 조상대대로 살아온 내 고장을 지켜내기 위해 김포한우영농조합과 6년간에 걸쳐 싸운 법정대기록이다. 문수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고막리는 옛 모습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는 청정마을이다. 그동안 개발이 되지 않은 것과, 산과 바다가 맞닿아 공기는 청정하고 마을 주민들 대부분이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는 이곳은 “건강장수마을”로 지정되기도 했다.
이런 동네에 개발의 삽질이 시작되자 주민들이 맑은 공기를 지키려 투쟁하면서 법정싸움이 이어지게 되었다. 6년여(만 5년)동안 행정재판(2건) 형사재판(2건), 민사재판(3건)이 계속되면서 온 동네의 재산이 거의 다 가압류(65명, 125필지)되는 초유의 일이 벌어진 이 사건은 대한민국 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이십일 세기 농민들의 투쟁으로 기록된다. 사건은 2005년 한우영농조합이 법원에 김포시청을 상대로 낸 ‘허가취소의 취소’ 행정재판에서 시청이 패하면서 사건이 야기된다. 시청 측이 패소에 대해 즉각 대응하는 대신 축산단지 조성 개발 허가를 내줌으로서 조합측이 2005년 가을에 고막리 산 50-2번지에 위치한 울창한 소나무 숲에 나무를 자르고 축산단지를 조성하면서 농민들의 저항이 시작되었다.
고막리 산 50-2번지 축산단지 조성 예정 지역은 이곳 주민들이 농수 및 생활용수(일부 지하식수)로 사용하고 있는 고막리 저수지의 상류계곡에 위치하고 있고, 그 계곡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은 저수지로 들어가게 돼 있으므로 어떤 형태로든 저수지에 환경 피해가 불가피한 일이다. 고읍동이라 불리웠던 고막리는 김포 평야를 가로지르는 미약한 산세를 만회하려는 듯 용틀임을 하는 문수산이 있어 포근하면서도 힘이 있고, 곁에는 조강리 포구, 근처 한강유역에는 철새도래지가 있고, 특히 군부대가 많아 개발에 제한을 받은 터라 이곳은 맑은 공기를 자랑하는 동네다. 마을 주민들은 2004년 한우영농조합이 고막리 산50번지 일대 3만여 평의 땅을 사들여 개발신청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 그 해 김포시장에게 축산단지 반대 진정서를 제출하고 담당 공무원에게 질의 응답 등 개발 저지를 수차례 했음에도 단지 조성이 이뤄지자 고막리 주민들은 스스로 나서기로 결의했다.
주민들은 고막리 189번지 내에 있는 밭에 임시 비닐하우스를 짓고 ‘축산단지 조성 반대 대책위원회’를 만들었다. 주민들은 매일 그곳에 모여 대책회의를 하면서 단지개발 저지에 나선다. 주민들은 민원청구를 위한 서명명부를 작성하기 위해 김포시내에 전단지를 뿌리고 현수막을 걸어 이 사실을 시민에게 알리기 시작했으며 3일만에 2,378명이 서명하는 등 호응은 뜨거웠다. 김포시민들은 서명뿐만 아니라 응원의 격려금을 냈고, 많은 사람들이 힘을 내라며 음료수등 먹을거리를 비닐하우스에 보내주기도 했다.
이에 마을 사람들은 용기를 내면서 반대저지를 위한 실력행사에 박차를 가했다. 주민들은 변호사를 선임하고 2005년 12월 11일 부천지원에 “건축공사 중지 가처분 신청”을 제소했으며, 이에 단지측은 “공사방해금지 가처분 신청”을 내면서 주민들과 단지측의 법정싸움은 본격화된다. 애초에 시청이 진 재판임으로 이 싸움은 결코 녹녹치 않을 것임을 알고 있는 주민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기로 결정했다.
sbs“물은 생명이다”와 kbs "시청자칼럼“에 고막리 사건을 방영해줄 것을 요청하고 신문사에도 보도를 의뢰하는 한편, 김포 유정복 국회의원은 물론 김포 시장 및 관련 장관(환경부장관, 농림부 장관)에게도 환경피해 질의서를 내는 등 민원제기와 탄원서를 보냈다. 또 주민들은 축산단지를 조성하려는 한우영농조합 대표가 그 전에 브루셀라에 병든 소를 매장한 현장 사진을 확보하고 고막리에도 그 피해가 전파될 수 있음을 알리는데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주민들이 “건축공사 중지 가처분” 행정재판에 패소하고 조합측이 낸 형사재판에서 주민들이 교통방해죄로 벌금형을 받으면서 사건은 장기화에 접어 들었다. 그런 동안 소송을 반대하면서 대책위에서 이탈하는 주민들이 생기고 단지 측에 동조하는 사람이 있게 되면서 오순도순 정겹게 이웃사촌으로 살아오던 주민들 간에도 갈등이 발생한다.
이에 축산단지 조성반대 대책위원장이 교체되면서 일사분란하게 싸우던 주민들 간에 분열의 조짐이 보였다. 이런 주민들 간의 갈등은 단지 측과의 싸움보다 더 힘든 장애가 되었으며, 재판이 끝난 후에 분동으로 마을이 두 개로 쪼개지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주민들과 단지측의 싸움은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으로도 비유될 수 있다. 돈이 많은 단지 측이 쟁쟁한 변호사를 선임해 초장에 주민들을 기 죽일 때 고막리에 몇 년전에 이사온 김선희 씨는 대책위 총무에서 위원장이 되면서 모든 진행을 진두지휘했다.
그는 국방부 행정직에서 정년퇴임하고 맑은 공기를 찾아 고막리에 둥지를 튼 외지인이다. 그는 기관지가 나빠 공기 맑은 동네를 몇 년간 찾다가 마침내 고막리를 선택했으므로 토박이 이상으로 그곳을 아끼고 사랑하는 분이다. 그는 마지막 열정으로 그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기로 결심하고 법정투쟁에 앞장섰다.
재판이 시작되면서 단지측은 행정, 형사 재판 4건을 내리 승소한다. 이 참에 끝장을 내고 싶은 단지측은 마을사람을 기죽이고 협박하기 위해 1억 손해배상 가처분 청구를 하면서 주민 19명의 재산을 가압류 시킨다. 그들의 속셈은 적중했다. ‘시청에서 진 재판을 우리가 절대로 이길 수 없다’는 말이 주민들 간에 돌면서 마을의 갈등은 본격화 된다. 이런 갈등에서 온 분열은 단지 측이 노리는 바였다. 그래야 재판을 빨리 끝내고 단지를 조성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끝까지 투쟁했던 사람들은 단지 측과의 투쟁보다 주민들 간의 분열이 더 힘들었음을 고백하기도 했다.
또한, 주민들은 가압류를 풀기 위해 1억 공탁금을 만드는데 힘을 합쳤다. 마을의 원로(노인회원)들은 마을회관 부지 일부를 팔고, 고막리 저수지를 담보로 대출을 받아 1억 공탁금을 마련해 가압류를 해제했다. 이렇게 해 우리나라에서 저수지가 담보로 잡히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단지 측이 항소하고 다시 이기면서 단지측은 2차로 가압류를 하면서, 주민대표인 이장을 걸어 2천만원의 손해배상청구까지 해왔다. 그렇게 재판이 계속되면서 주민들은 변호사 비용을 만들 수 없는 처지에 이르면서 난관에 부딪친다. 그 때 주민들은 이 사건을 통해서 약자 편에서 무료로 상담해주고 변호도 해주는 “법률구조공단”이라는 곳이 있음을 알게 된다. 대책위 사람들은 법률구조공단을 찾아가 호소했다. 그리고 법률구조공단은 주민들에게 용기를 주고 희망을 안겨주었다. 주민들은 이곳에서 만난 고진웅 변호사를 잊지 못한다.
그는 기진맥진한 주민들에게 위로를 주면서 소송을 이기게 해 그들에게 희망을 준 진정한 법조인이다. 고 변호사는 떼를 지어 찾아오는 주민들을 늘 반기면서 ‘걱정하지 마세요. 밥 많이 드시고 잠 푹 주무시다 보면 다 잘 될 것입니다.’라고 위로해주었다. 고막리 주민들은 그런 고 변호사를 자신들의 정신과 의사라고 말했다. 이후 법률구조공단의 변호로 이기기 힘들다는 민사재판을 이기면서 주민들은 끝까지 싸울 수 있었다. 법률구조공단은 이 땅에서 서민과 약자를 위해 일하는 진정한 대변자로 대한민국 최고의 법 제도로 고막리에서 그 위상을 정립했다고 볼 수 있다. 고막리 주민들은 1심에서 패소한 손해배상청구를 항소해 2심에서 승소하게 된다.
이렇게 양측이 고소, 항소, 상고를 하는 지리한 기간에 주민들 간의 갈등이 시작되면서 주민들 중에는 단지 측에 동조하는 사람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분쟁이 장기화되면 상대측보다 안에서의 갈등으로 패배할 수 있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 경우가 되어간 것이다. 그러나 1억 손해배상 청구에 주민들이 승소하면서 다시금 기운을 챙기는 와중에 단지측은 3차로 이번에는 37억이라는 어마어마한 액수의 손해배상 청구를 해왔다. 단지측이 이렇게 엄청난 액수를 건 것은 그동안 감언이설로 자신들의 뜻에 동조해 합의이행각서를 써준 사람들이 있고, 주민들의 갈등을 이용해 일찌감치 재판을 종결지으려는 의도에서였다
이렇게 해서 고막리 사람들 65명의 재산 125필지가 4차에 걸쳐 5년간 가압류되는 사건을 기록하면서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운 법정다툼의 새 기록을 세우게 된다. 37억의 손해 배상 청구금액이 고법 항소 시 10억으로 변경되었다. 이후 고소, 항소, 상고하면서 고막리에서는 인간사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희로애락이 생겨났다. 소송이 길어지면서 재판에 따른 비용은 만만치 않았다.
주민들은 그 경비를 만들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주민들은 사건이 시작되면서 가구당 한 달에 1만원의 회비를 냈다. 그러나 그 돈으로는 부천, 인천, 서울의 법률구조공단이나 법정 출두에 가는 교통비조차 부족했다. 그들은 재판이 진행 중일 때는 평균 일주일에 두 번은 부천이나, 인천, 서울을 가야했다. 주민들은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 의논하다가 고막리에 있는 밭 3천여평에 콩(서리태)을 심어 그 경비를 충당하기에 이른다.
주민들은 콩밭을 함께 일구고 갈고, 추수하면서 가족이 되어갔다. 콩밭 경작의 중심이 되는 열 가구의 이십여명은 이웃사촌의 정을 쌓아가면서 희로애락을 함께 하게 된다. 그것은 재판이 아니라면 절대 알 수 없었던 또 하나의 사랑이다. 콩밭 팀은 비닐하우스를 그들만의 패밀리 하우스라 부르며 함께 일하고,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움직이면서 고통 속에서도 기쁨과 보람을 찾을 수 있었다. 그들은 그 속에서 물질보다 마음이 왜 더 중요한지를 알게 됐고, 이웃을 왜 사촌이라고 했는지를 비로소 실감했다. 주민들은 2010년 11월 3일 대법원에서 승소판결을 받아 최종 승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