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필영
국내작가
문학가
신필영은 1810년(순조 10) 음력 11월 초5일 경기도 지평현 옥현리의 종애(鍾崖)에서 낭암(朗巖) 신효선(申孝善, 1783∼1821)과 함종 어씨(咸從魚氏, 1779∼1853)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자는 치량(穉良)이고 호는 옥파(玉坡)·옥파거사(玉坡居士)·자이고객(自怡藁客)·이당옹(怡堂翁)·비원거사(賁園居士)·민재(敏齋) 등이다.
신필영은 황해북도 평산군(平山郡)을 본관으로 하고, 고려의 개국 공신의 일원인 장절공(壯節公) 신숭겸(申崇謙)을 시조로 하는 평산 신씨(平山申氏) 가문에서 태어났다. 부친 신효선을 일찍 여의고 외가인 함종 어씨 집안에서 수학했으며, 20세 무렵부터 홍길주(洪吉周, 1786∼1841)의 자제인 홍우건(洪祐健, 1811∼1866)과 교분을 맺고 홍석주(洪奭周, 1774∼1842)의 문하에 출입하며 풍산 홍씨(豊山洪氏) 집안의 자제들과 교유했다. 신필영은 당대 명문에 속하는 함종 어씨 집안과의 척분 및 풍산 홍씨 집안과의 각별한 교분을 통해 19세기의 유명 문인 학자들과 폭넓게 교유하면서 활발한 문학 활용을 벌였다.
신필영은 만년에 참봉에 제수되기 이전까지 포의(布衣)로 살며 주로 문학 활동에 치중해 방대한 양의 시 작품을 남겼다. 문(文)을 창작하는 것에는 별 뜻이 없었다고 언급한 것으로 보아 그는 평생 시 창작에 몰두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필영은 50세이던 1859년(철종 10)에 증광생원시에 장원으로 급제한 후, 54세 때인 1863년(철종 14) 7월에야 비로소 창릉참봉(昌陵參奉)에 제수되었다. 이후에 대과(大科)에 응시했으나 낙방하고, 참봉에 제수된 지 만 2년 만인 1865년(고종 2) 10월 12일에 유행성 감기로 인해 경기도 지평현 옥현리 주애(注崖)의 정침(正寢)에서 향년 56세로 타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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