롱펠로
Henry Wadsworth Longfellow
외국작가
문학가
1807 ~ 1882
헨리 롱펠로(Henry W. Longfellow) 1807년 2월 27일, 당시에는 미국 매사추세츠 주의 일부였던 메인의 포틀랜드에서 변호사의 여덟 자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여섯 살 무렵 사립 초등학교에 들어갔는데, 매우 학구적이고 라틴어를 능숙하게 구사해 명성을 날리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그에게 많은 문학작품들을 소개해 줌으로써 독서와 배움에 대한 열정을 갖도록 독려했다. 열세 살 때 처음으로 시를 써서 지역신문에 발표를 했으며, 그 후로도 계속 시를 써서 신문이나 문학잡지에 기고했다. 열다섯 살 때, 아버지가 이사로 있던 새로 생긴 보든대학(Bowdoin College)에 입학해 그곳에서 너새니얼 호손을 만나 평생을 친구로 지내게 되었다. 1825년 대학을 졸업하고 이 대학의 현대어 담당 교수직을 맡게 되는 행운을 얻었다. 그의 현대어 교수직은 그가 유럽의 현대어를 더 공부한 다음에 맡는다는 조건이었기 때문에, 그는 1826년 유럽으로 건너가 스페인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독일어 등을 공부했다. 유럽 여행은 언어 공부가 주된 목적이었지만, 이 여행은 그에게 유럽의 문학, 특히 유럽의 낭만주의 문학을 많이 읽고 접할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1829년 유럽 여행에서 돌아와 1835년까지 보든대학에서 유럽의 현대어를 가르쳤다. 하버드대학의 현대어 교수였던 조지 티크너(George Ticknor)가 사임하게 되자 그 뒤를 이어 하버드에서 현대어 교수로 지명되었다. 1835년 그는 언어를 연마하기 위해 다시 유럽으로 갔다. 이 두 번째 유럽 여행에서 그는 독일에서 낭만주의 문학을 공부하기 위해 바친 얼마간을 제외하고는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지를 여행하며 자유로이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이 여행에서 어린 시절 친구였던 첫 번째 아내 메리 포터(Mary Storer Potter)가 유산으로 고통을 받다가 사망하는 불운을 당했다. 롱펠로는 유럽 여행에서 보스턴 재력가의 딸인 젊은 프랜시스 애플턴(Frances Elizabeth Appleton)을 만났고, 그녀와 결혼 후 그녀의 아버지로부터 결혼 선물로 받은 케임브리지의 브래틀 가(Brattle Street)에 있는 크레이기 하우스(Craigie House)에 정착했다. 두 번째 유럽 여행을 마치고 1836년에 미국으로 돌아온 롱펠로는 하버드대학의 프랑스어 및 스페인어 교수가 되었다. 이때부터 시인으로 명성을 얻기 시작해 케임브리지 지역 문학계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1839년에 괴테의 낭만주의 작품 『빌헬름 마이스터(Wilhelm Meister)』를 모방한 소설 『히페리온(Hyperion)』과 첫 시집 『밤의 목소리(Voices of the Night)』를 출간했다. 1841년에 두 번째 시집 『발라드와 기타 시(Ballads and Other Poems)』를, 1842년에는 『노예에 관한 시(Poems on Slavery)』를 출간해 대단한 인기를 얻었다. 18년간 하버드대학에서 강의하면서 설화 시 <에반젤린(Evangelin: A Tale of Acadia)>과 소설 『캐버너(Kavanagh)』를 썼지만, 가르치는 일이 시를 창작하는 데 부담이 된다고 생각해 1855년 교수직을 사임했다. 그 후 뉴잉글랜드의 과거에 대한 향수를 담은 『하이어워사의 노래(The Song of Hiawatha)』, 『마일스 스탠디시의 구애(The Courtship of Miles Standish)』, 『노변 여인숙 이야기(Tales of a Wayside Inn)』로 발라드 시인의 면모를 보여 주었다. 1861년 또 한 번의 불운을 겪게 된다. 집에 화재가 나서 부인이 불에 타 죽고, 그는 부인을 구하려다 심한 화상을 입게 되었다. 롱펠로의 두 번째 아내는 14년간의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한 끝에 마흔네 살의 나이로 삶을 마감한 것이다. 롱펠로는 이때 생긴 흉터를 감추기 위해 수염을 길렀다고 한다. 또한 아내를 잃은 견딜 수 없는 비탄과 슬픔을 달래기 위해, 단테의 『신곡』을 번역하는 데 전념했다. 그는 단테의 『신곡』을 번역해 미국인들에게 최초로 알린 사람이 되었다. 이 번역을 마친 후, 그는 세 번째로 영국으로 건너가 옥스퍼드대학과 케임브리지대학에서 학위도 받고 빅토리아 여왕을 알현하는 영광도 누렸다. 1882년 3월 24일 그가 죽은 후 영국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흉상이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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