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리허
외국작가
문학가
1915년 11월 6일 타이완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사숙에서 배운 한문을 바탕으로, 중국 고전소설을 즐겨 읽었으며, 5·4신문학운동의 영향을 받아 소년 시절부터 백화(白話)로 글쓰기를 하기 시작했다.
1938년 같은 성씨를 가진 연상의 농장 여공과 사랑에 빠졌는데, 당시 타이완 하카 사회에서는 동성(同姓)끼리의 결혼을 금지하는 풍속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사회적 분위기와 집안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중국 대륙 둥베이(東北)의 선양(瀋陽)으로 도망갔다가 2년 뒤인 1940년에 타이완으로 잠깐 돌아와 중핑메이와 결혼한 뒤 선양으로 돌아갔다. 이러한 어려웠던 결혼 과정과 아내와의 추억은 <동성 결혼(同姓之婚)>, <도망>, <가난한 부부>(≪목어 소리?현대타이완소설선 2≫, 한걸음더, 2009 수록), <문(門)>과 같은 작품에 반영되었다.
1941년 아내와 어린 아들을 데리고 베이징으로 다시 거처를 옮겼는데, 석탄 소매업을 하면서 독서와 습작을 이어 나갔다. 1945년 그의 첫 번째 문집이자 생전에 출판된 유일한 소설집인 ≪협죽도≫가 베이징 마더쩡서점에서 출판되었다. 이 문집에는 중편소설 <협죽도> 외에도, 단편소설 <아지랑이(游絲)>, <새로운 탄생(新生)>, <억새풀(薄芒)>이 함께 수록되어 있었다.
중일전쟁이 종결된 뒤 타이완으로 영구 귀국했다. 1947년 폐병으로 3년 동안 치료를 받았는데, 결핵균이 위와 장에까지 침투해 죽을 고비를 넘겼고, 갈비뼈를 잘라 내는 큰 수술을 두 차례나 받았다. 이후 주로 휴양을 하며 지냈는데, 이 와중에도 창작에 힘써 그의 대다수 작품이 이 10년 동안 창작되었다. 다년간의 병치레로 인해 가산을 모두 팔아야 했으며, 최종적으로 땅 몇 마지기밖에 남지 않아, 생활이 극도로 빈곤해졌다. 게다가 척추결핵에 걸린 큰아들은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치료 시기를 놓쳐 곱사등이가 되었고, 건강했던 둘째 아들은 아홉 살의 나이에 갑작스럽게 병에 걸려 요절했다. 평생 시달렸던 병마와 어린 자식을 먼저 보내야 했던 고통스러운 경험은 <부활(復活)>, <삶과 죽음(生與死)>과 같은 작품 속에 반영되어, 중리허의 삶과 죽음에 대한 사색을 보여 주고 있다.
그의 많은 작품들은 타이완 사회의 주목을 받지 못해서, 장기간 발표와 출판의 기회를 얻을 수 없었다. 그의 유일한 장편소설 ≪리산농장≫이 1956년 ‘중화문예상금위원회(中華文藝?金委員會)’ 장편소설 부문에서 1등이 없는 2등 상을 받음으로써 사회에 알려지는 듯했다. 하지만 그해 상금위원회와 그 기관지 <문예창작(文藝創作)>이 잇달아 문을 닫고 정간되면서, 중리허의 작품은 원활하게 발표될 수 없었다. 1960년 8월 4일, 병상에서 중편소설 <비(雨)>를 수정하는 데 무리하다 지병이 도져 각혈을 하고 죽었다. 당시 나이 45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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