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카파
Robert Capa
외국작가
예술/여행 저자
1913 ~ 1954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양복점을 운영하는 유태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1931년 좌익학생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헝가리에서 추방돼 베를린으로 건너간다. 1932년 베를린에 있는 사진 통신사 데포트(Dephot)에서 암실 보조원으로 일하던 중 재능을 인정받아 자잘한 취재를 맡기 시작한다. 12월, 망명 중인 러시아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의 코펜하겐 강연을 취재한다. 이때 찍은 사진들로 인해 정식 사진가로 인정 받는다. 1933년 히틀러가 정권을 잡자 베를린을 떠나 부다페스트를 거쳐 파리로 건너가 1934년 세 살 연상의 공산주의자 게르타(Gerta Pohorylle)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1936년 사진을 팔아 돈을 벌기 위해 '로버트 카파'라는 가공의 미국인 사진가 행세를 한다. 게르타는 엔드레가 찍은 사진을 성공한 사진가 로버트 카파가 찍은 것으로 위장해 언론사에 비싸게 판매한다. 그러다가 엔드레는 로버트 카파로, 게르타는 게르다 타로(Gerda Taro)로 완전히 이름을 바꾼다. 8월, 둘은 스페인으로 건너가 공화파 측에서 스페인내전을 취재하기 시작한다. 9월, 코르도바 전선의 참호에서 뛰쳐나온 공화파 알코이 민병대원 페데레코 갈시아(Federico Borrell Garc?a)가 머리에 총을 맞고 쓰러지는 순간을 담은 사진이 미국의 화보잡지 「라이프」에 소개되면서 카파의 이름이 전 세계적으로 알려진다.
1937년 7월, 그가 잠시 파리에 가 있는 동안 홀로 스페인에 남아 취재하던 게르다가 후퇴하던 공화파의 탱크에 치어 급작스런 죽음을 맞는다. 9월, 뉴욕을 방문한다. 1938년 중국에서 국민정부측의 선전영화 '4억의 민중' 촬영을 위하여 중국 한커우로 가 '4억의 민중' 촬영과 중일전쟁을 취재하였고, 1939년 스페인으로 돌아가 내전의 마지막을 취재한다. 9월, 2차대전이 발발하자 가족이 있던 미국 뉴욕으로 건너가 헤밍웨이, 카우보이, 미식축구 등 미국을 상징하는 것들을 다양하게 사진에 담는다. 1940년 멕시코 대통령 선거를 취재한다. 1942년 미국 잡지 「콜리어스」의 의뢰를 받고 영국으로 건너가 연합군의 다양한 활약상을 취재한다. 1943년 북아프리카 공략, 시칠리아 공략, 나폴리 해방을 거쳐 이탈리아 반도 전투를 취재한다. 1944년 6월,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종군기자로 참가한다. 이때 찍은 사진은 총 106장이었으나, 「라이프」 암실직원의 실수로 건조도중 필름의 감광유제가 녹아버려 대부분 소실되고 10장 정도만 남는다. 이 사진들은 '카파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Slightly out of focus)'라는 설명을 달고 「라이프」에 실린다. 8월, 연합군의 파리 수복을 취재한다. 1945년 미군 공수사단과 함께 낙하산을 타고 독일로 침투해 연합군의 라이프치히, 뉘른베르크, 베를린 함락을 보도한다. 6월, 파리에서 배우 잉그리드 버그만을 만난다. 둘은 이후 2년간 연인으로 지낸다.
1946년 미국 시민권자가 된다. 수개월간 할리우드에서 영화관련 일을 하지만, 결국 미국 영화산업에 회의를 느끼고 할리우드를 떠난다. 이후 2달간 터키에서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한다. 1947년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데이비드 세이무어 등과 함께 보도사진 통신사인 매그넘(MAGNUM)을 설립한다. 존 스타인벡과 함께 소련을 방문했으며, 1948~1950년 중동전쟁을 취재한다. 1950년 파리로 돌아온 이후 3년간 매그넘의 대표로 활동한다. 1953년 미국 정부에 의해 공산주의자라는 혐의를 쓰고 몇 달간 여권을 중지당했으며, 1953년에는 미 FBI의 감시를 받기도 한다. 1954년 한 일본 '마이니치 신문'의 초청을 받아 일본을 방문하던 중 「라이프」의 요청으로 베트남으로 건너가, '쓰디쓴 쌀'이라는 제목으로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 취재기를 쓰려 했으나, 5월 25일 오후 2시 55분, 프랑스 군의 행군을 취재하다 지뢰를 밟아 사망하였다.
우리나라에는 『카파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로 소개된 그의 책 『Sightly Out of Focus (1947)』는 종군기자를 꿈꾸었던 많은 젊은 사진작가들에게 바이블이 되었으며 그의 너무 이르고 극적인 죽음은 그를 종군기자의 신화로 만들었다. 이제 종군기자들은 그들의 생각을 세상에 전하기 위해서라면 어느 때라도 자신을 지배하려 드는 매스 미디어와 정부의 권력에 맞서 싸우려 들었다. 그것이 바로 카파이즘(Capaism)이다. 그의 동생 코넬 카파는 1966년 관심있는 사진을 위한 국제 기금(International Fund for Concerned Photography)'을 설립하였고, 1974년에는 카파의 사진을 보관할 목적으로 국제사진센터(International Center of Photography)을 설립하였다. 미국의 전쟁기자 집단인 해외 취재클럽(Overseas Press Club)은 '로버트 카파상'을 제정하여 "대담한 용기와 진취적 정신이 이뤄내는 최고의 외신 사진"을 촬영한 사진기자에게 시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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