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이 길었기에 리뷰글도 길어야만 할 것같은 압박감에 글쓰기를 하루하루 미뤘다. 그 사이에 책을 읽으며 느낀 감정의 갈래들을 어떻게 모아서 나의 느낌을 정리할지 고민하기도 했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비교적 구체적이던 나의 느낌들도, 기억이란 한계성있는 능력에 의해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 급기야는 인과과정으로서의 독서란 그저 지나고 나면 나에게 막연히 다가오는 한 줄 심상이어야만 한다는 나만의 단순한 독서관이자, 자세하면서도 정리된 리뷰쓰기를 거부하는 자신의 게으름과 무능함에 대한 자기합리화가 슬금 슬금 일어나게 되었고, 그제서야 이 긴 소설에 대한 리뷰쓰기를 시작할수 있게 되었다.
나에게 이 소설을 통해 가장 먼저 퍼뜩 떠오르면서도 오래도록 남는 심상은, 나 역시도 '신명'이라는 것이다. '나 역시도'라고 한 이유는 다른 사람들도 이미 이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을 신명이란 느낌에서 찾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조선 초중기 시대의 삶과 임꺽정의 활약등에서 느껴오는 신명보다 작가의 사실주의 표현방식에서 그것을 느꼈다. 옛날 옛적의 사건이나 삶 그 자체에서 보다 내가 그것을 경험하고 있는 것만 같은 소설의 생생함에 절로 신이 났었다. 가끔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보고나면 그 이야기가 영화로 다가오기보다 나와 일면식 없던 어떤 사람의 일상에 카메라를 들이대고 나서 발췌해낸 장면장면들을 편집해둔 것 아닌가하는 느낌을 받는다. 즉 난 영화가 아니라 남이 어떻게 사는지 그저 한번 보게 된것이다. 홍명희 선생의 임꺽정도, 역사소설이라기보다 그 시대의 누군가의 삶, 대화를 그대로 녹취해와 활자로 기록한게 아닐까 할 정도로 생생했다. 먼 옛날의 일인데, 그 시대의 누군가는 진짜로 그렇게 얘기했을 것만 같았다. 심지어는 홍명희 선생은 초인이라 시간을 초월해 다닐수 있었고, 이 이야기는 선생이 조선초로 넘어가서 직접 보고 적어온 이야기가 아닐까하는 엉뚱한 생각도 들기도했다. 특별히 작가의 주관이 개입된 지문도 없고, 정겨운 옛고어들이 넘실대는 대사들은 그 자체로 생생하다. 문학이 아무리 사실주의를 표방한다고해도, 문학속에서 묘사된 현실은 그럼에도 문학적이란 느낌을 벗을 수 없는데 이소설은 문학이 아닌 기록이라 생각되어질 정도다. 이 작품이 이미 사실주의의 백미로 인정받는 작품이긴 하지만, 여타 사실주의적 표현방식으로 유명한 세계문학과도 다른 느낌이다. 아무래도 우리의 작품이고 우리의 옛것을 다뤄서일것이다. 이렇게 더 정겹고 더 애틋하며 더 많이 와 닿는다.
표현 방식 외에 임꺽정의 삶 그 자체는 나에게 큰 감흥을 주지 못한다. 역사 속에선 의적으로알려져있고, 그 점이 내가 임꺽정이란 소설을 읽게한 동기이기도 하였지만, 이 책을 본후 임꺽정의 인간적 면모에 감동을 찾을 수도 없거니와 오히려 실망과 충격을 받게 되었다. 이 소설속의 임꺽정은 의적이라기보다 도적이 되기전까진 조선이란 유교신분사회에 반감을 가진 천민이었다가, 도적이 된후 갑자기 얻게 된 자기만의 천하-화적굴에서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는 권력 중독자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도적이 되기 전까지의 신분에선 신분의 한계가 있는 현실에 절망하면서도 폭력이 아닌 정신으로서 신분의 한계를 적극적으로 극복하는 면모는 보기 힘들고, 도적이 되어선 그토록 비난했었던 신분사회의 폐단을 오히려 화적굴에서 자신이 몸소 재현하고있다. 주인공인 임꺽정이 각자에게 어떤 의미의 인물로 되새겨지는가는 이미 독자 자신이 지닌 가치관에 따라 틀려지기 때문이지만, 나 개인적으로는 자신이 비판하고 거부하던 것을, 자신이 그것을 실행할땐 합리화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때문에 임꺽정이 더 싫었는지도 모르겠다.
홍명희 선생은 일제 시대의 문화 압제에 반기를 들어 우리것을 더 찾고 당시 자신이 추구하던 문학관인 프롤레타리아 문학관을 더 피력하기 위하여 이 작품을 썼다고 한다. 따라서 어떤 비평가는 임꺽정 집단을 치러오는 관군의 무리를 일제압제무리에 비유하기도했지만, 그 의견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일단 한 나라안에서 국가기강을 바로잡기위한 대도적소탕을 어떻게 자국의 이익을 위해 다른 나라를 무력으로 침력하는 행위와 비교할수 있을까? 당시의 탐관오리들이 널렸고 가혹한 신분제도가 사회의 기저층을 착취함으로써 이뤄진 것이라해도, 임꺽정이 탐관오리들을 특별히 표적하여 괴롭힌 것도아니고, 노략질 행위에서는 새로운 사회를 꿈꾼다는 어떤 대의조차도 발견되지도 않는데 말이다. 임꺽정이 주인공이라서 관군의 도적소탕에 더 긍정적인 의미가 부여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임꺽정의 삶이나 적당활동이 정당하게 평가받을 무언가가 있는 것도아니다. 벽초 홍명희 선생이 임꺽정을 의적으로 묘사한 것에 반기를 들고 임꺽정은 의적이 아님을 강조하는 책도 있는 것을 본적이 있다. 이 작품을 통해 임꺽정이 어떤 인물인가라고 느끼는 것은 소설을 읽는 각자의 몫일 것이다. 난 그가 현대 사회에서 재현되더서 마주치게 되더라도 정말 재수없는 인간이라 생각 될 정도로 거부감을 느꼈다. 현대에선 직접적, 물리적 폭력이 아닌 정신의 폭력을 휘두르는 Mental 임꺽정을 많이 마주친다. 권력이나 지식을 무기로 담론의 울타리를 치고, 그들만의 담론은 어느새 시류로 확장되어진다. 어느새 그들과 같지 않음은 포기해야할 일차 과제이고, 그들과 다르게 가진 무언가는 타파해야할 일차 공격대상이된다.
개인적으론 홍명희 선생이 말한 본격적인 임꺽정전인 화적편보다도, 1 봉단편 2 피장편 3 양반편까지를 가장 흥미롭고 신나게 읽었다. 이 세편에선 실록을 통해 알려진 사실의 역사와 임꺽정 주변인물이 교묘하게 교차하면서 역사적 사실에 허구적 인과성을 부여한다. 그래서 임꺽정전의 1,2,3편은 어느새 민중속에 역사적 사명감이 투철하던 무명씨가 틈틈히 기록한 야사와도 같이 느껴지기도한다. 긴 소설이니 만큼 다양한 등장인물이 나오는데, 감동을 주는 인물은 임꺽정이 아닌 임꺽정의 주변 인물, 혹은 그가 만난 사람들이다. 신분의 한계를 자기자신의 수련을 통한 물질과 정신세계의 초월로 극복하는 임꺽정의 스승 양주팔이라던가, 곧은 절개를 버리지 않았던 조정암 선생, 장기도 잘두고 걸음도 잘걷는 황천왕동이, 피리부는 귀인이자 기인 단천령 등등이 더 오래 도록 기억에 남는다.
수묵화같이 담박한 옛 선비들의 삶이, 그리고 질그릇 같이 투박하나 풋풋한 민초들의 삶의 모습은 현재 우리의 생활과 동떨어져 보이나, 물질 세계를 넘어선 한국인 만의 얼이란 것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 인 듯하다. 조선시대와 2000년대 대한민국이란 차이 외에는 그들은 역시 우리의 조상이었고, 우리는 그들의 후손임을 증명하는 어떤 정신의 줄기가 보인다. 한 나무안에서도 뿌리와 가지는 모양이 틀리지만, 결국 한 나무의 일부일뿐인 것 처럼 말이다. 이 작품은 말미를 목전에 두고, 미완으로 끝난 대작이라 다 읽고도 후련한 마음보다 아쉬운 마음이 앞선다. 읽는 내내 임꺽정과 그 적당들이 하는짓이 하도 마음에 안들어 구월산서 관군에게 최후를 맞이하는 장면을 꼭 보고싶었는데 말이다. 조만간 홍명희 선생이 월북하여 마무리지은 원고가 어딘가에서 발견되었다는 문학계의 빅 뉴스가 꼭 나왔으면 하는 바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