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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 2017년 07월 0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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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형 | 양장 도서 제본방식 안내 |
쪽수, 무게, 크기 | 192쪽 | 292g | 124*188*20mm |
ISBN13 | 9791196075170 |
ISBN10 | 11960751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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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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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나는 참 많은 말들과 사람들과 시간들을 믿었다.
믿음이 깨지지 않은 말도 있었고 믿음이 더 두터워진 사람도 여럿이었으며 생각처럼 다가온 시간들도 있었다. 물론 그보다 더 많은 경우에서 내 믿음은 해지고 무너지고 깨어졌다.
딛는 마음, 마음마다 폐허 같았다.
p. 65
산다는 일이 이렇게 무너지고 깨어지는 일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사람들을 만나며 관계를 맺고, 믿음을 쌓고, 정을 주고... 그러다가 결국 홀로 내동댕이 쳐졌을 때,
나는 많이 아팠던 것 같다.
많이 울었던 것 같다.
많이 슬펐던 것도 같고, 많이 억울했던 것도 같다.
내 진심은 어쩌다가 이렇게 내동댕이 쳐졌는지, 그동안의 마음들은 다 어디로 흩어져 사라져버렸는지,
해어지고 무너지고 깨어져버린 믿음과 인연 앞에서 나는 그렇게 속수 무책으로 울고 있었다.
밟으면 먼지로 흩어져 버릴 것만 같은 메마른 폐허 앞에서.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깨어지는 것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사건보다는 사소한 마음의 결이 어긋난 데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더 많다.
p. 45
여자는 뇌졸중 후유증을 앓고 있는 듯 보였다.
몸의 절반은 봄 같았고 남은 절반은 겨울 같았다.
시인의 언어는 다르다.
매번 시인이 쓴 산문집을 읽을 때마다 같은 생각을 한다.
시인의 시선은, 말은, 결이 다르다.
보드랍고 연약하고 깨어지기 쉬워 보이지만, 단단하고 끈질기고 오래 남는다.
시인이 건네는 언어들은 어쩌면 하나같이 다 가슴으로 들어와 옹이처럼 남는 건지.
그가 남긴 흔적조차 아름답다.
그가 한마디를 건넬 때마다 나는 가슴이 씀벅 거린다.
어쩐지 슬픔이 묻어 있는 것 같은 처연한 담담함이 좋다.
통곡을 하지 않는다고 슬프지 않은 것은 아니다.
울지 않는다고 괜찮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들은 모두 울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다들, 괜찮지 않으니까.
삶이 우리를 괜찮게 내버려 두지 않으니까.
박준 시인은 사인마저 다정하구나 싶어서 설핏 웃음이 났다.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이라고 해놓고선
기어코 우리에게 울자고 한다.
아무것도 달라지는 게 없더라도, 그래도 참지 말고 울자고 한다.
우리들이 참고 있는 것을, 그저 버티고 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의 친필은 눈물을 닮은 것도 같다.
어쩐지 글씨에서도 눈물이 묻어나는 것만 같다.
책 속에 담긴 글들도 그렇다.
짠 내가 난다. 눈물 맛 같은. 조금은 서글픈 것도 같은.
묘하게 물기가 묻어나는 것 같은 그의 말들은 축축하게 얼룩을 남기고 사라졌다.
한번 물기를 머금은 곳은 물기가 마르고 난 뒤에도 물의 기억을 간직한 채 남겨진다.
마른 얼룩을 더듬으면 그가 건넸던 말들이 흔적으로 남아있다.
말은 사람의 입에서 태어났다가 사람의 귀에서 죽는다.
하지만 어떤 말들은 죽지 않고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살아남는다.
p. 19
그의 말들이 내 마음속으로 들어와 상처가 아닌 무늬로 남겨진 것처럼
나의 말들도 누군가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상처가 아닌 무늬로 남겨지기를 기도해 본다.
귀에서 소멸해버리는 말들이 쓸쓸한 것 같다가도,
태어나자마자 죽음을 맞이하는 말들은 차라리 다행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의 가슴으로 비집고 들어가 내내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그의 가슴을 헤집으며 살아남는 말들을 생각해보면 너무 무서우니까.
내 입에서 태어난 말들이 창이 되고 칼날이 되었다고 생각하면 너무 끔찍하니까.
내가 뱉은 날카로운 말들은, 모두 귀에서 사멸당했기를 간절히 바라게 된다.
시를 짓는 일이 유서를 쓰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아마 이것은 이미 사라졌거나 사라지고 있는 것들이 이 세상에 너무 많기 때문일 것이고 이 숱한 사라짐의 기록이 내가 쓰는 작품 속으로 곧잘 들어오기 때문일 것이다.
사라지는 것들의 유언을 받아 적는다는 점에서 나의 시는 창작보다는 취재나 대필에 가깝다.
p. 181
하지만 그 유서들의 내용 또한 핏발 서린 분노와 원망보다는 고마움과 미안함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많았다. 어쩌면 유서는 세상에서 가장 평온한 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타인에 대한 용서와 화해를 넘어 자신이 스스로의 죽음을 위로하고 애도하는 것이므로.
…… 중략 ……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
그중 절반 이상이 자살을 했고 상당수가 유서 한 장 남기지 않은 채 세상을 등졌다.
그들이 유서조차 남기지 못한, 그래서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분노와 슬픔과 죄책감에 빠지게 만든 세상에서 우리는 잘도 살아간다.
사람이 사람을 잃은 세상, 노동이 노동을 잃은 세상, 법이 법을 잃고 강이 맑음을 잃은 세상에서, 도처가 죽음으로 가득하지만 애도와 슬픔에까지 정치성을 들이대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p. 183
고등학교 3학년, 수학능력시험을 하루 앞둔 날 아버지는 평소 잘 들어오지 않는 내 방에 들어왔다. 그러고는 나에게 시험을 치르지 말라고 했다. 내일 시험을 보면 대학에 갈 것이고 대학을 졸업하면 취직을 할 것이고 그러다 보면 결혼을 하고 아이도 낳을 공산이 큰데 얼핏 생각하면 그렇게 사는 것이 정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너무 불행하고 고된 일이라고 했다. 더욱이 가족이 생기면 그 불행이 개인을 넘어 사랑하는 사람에게까지 번져나가므로 여기에서 그 불행의 끈을 자르자고 했다. 절을 알아봐 줄 테니 출가를 하는 것도 생각해보라고 덧붙였다.
당시 나는 그길로 신경질을 내며 아버지에게 나가라고 말했다.
하지만 노동과 삶에 지친 날이면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눈빛에서 설핏 가난을 느낄 때면 나는 그때 아버지의 말을 생각한다.
p. 141
내가 고등학생인 자식의 입장에서 아버지의 말을 들었다면 나 또한 신경질을 부리며 화를 냈을 테다.
아버지의 삶을 나에게 투영시키지 말라고, 더 나은 희망을 이야기해주진 못할망정 왜 내 미래에까지 재를 뿌리냐고, 나는 절대 그렇게 살지 않을 거라고, 내 삶에 관여하지 말라고.
분명히 화를 내고 분노했을거다.
하지만,
어쩌다 나는 속절없이 어른이 되어,
어쩌다 보니 부모의 마음을 이해하는 나이가 되어가고 있다.
아버지의 삶이 얼마나 고단했을지, 희망의 불씨가 보이지 않는 팍팍한 삶을 살아내느라 얼마나 지쳤을지, 그 절망들을 내 자식이 똑같이 겪는다는 상상만으로도 얼마나 끔찍했을지,
이제는 아버지의 마음이 보여서 더 슬프다.
절망을 말해야 하는 부모의 마음은 도대체 얼마나 더 처참한 지경일까.
가난이 대물림되는 시대는 지나갔다고 말하겠지만, 여전히 우리는 가난하다.
돈이 없어 가난했던 시대를 지나, 마음도 정신도 가난한 시대를 살고 있다.
세상은 자꾸만 가난해지고, 아이들은 자꾸만 무럭무럭 자란다.
우리 아이들에게 이토록 가난한 시대를 물려줘야 하다니.
시인의 아버지 손을 부여잡고 뚝뚝 눈물을 흘리고 싶어진다.
산다는 일이
그렇게 아픈 손을 부여잡고 뚝뚝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는 일은 아닐지.
나는 그곳에서 배달 음식 같은 것으로 끼니를 해결하며 철 지난 사랑이나 함부로 대했던 지난 시간 같은 것에 기웃거린다. 마음처럼 되지 않았던 과거의 일들과 마음만으로는 될 수 없을 미래의 일들을 생각한다. 독선의 끝에는 더욱 날 선 독선이 기다리고 있음을 목격한다.
p. 50
일상의 공간은 어디로든 떠날 수 있는 출발점이 되어주고 여행의 시간은 그간 우리가 지나온 익숙함 들을 가장 눈부신 것으로 되돌려놓는다. 떠나야 돌아올 수 있다.
p. 110
"고독과 외로움은 다른 감정 같아. 외로움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생기는 것일 텐데, 예를 들면 타인이 나를 알아주지 않을 때 드는 감정이 외로움일 거야. 반면에 고독은 자신과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것 같아. 내가 나 자신을 알아주지 않을 때 우리는 고독해지지. 누구를 만나게 되면 외롭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독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야. 고독은 내가 나를 만나야 겨우 사라지는 것이겠지. 그러다 다시 금세 고독해지기도 하면서."
p. 51
"사는 게 낯설지? 또 힘들지? 다행스러운 것이 있다면 나이가 든다는 사실이야. 나이가 든다고 해서 삶이 나를 가만두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스스로를 못살게 굴거나 심하게 다그치는 일은 잘 하지 않게 돼."
p. 63
시인의 지인인 선배나 선생님들의 말들이 시인의 가슴에 살아있다가 책 속으로 걸어들어 왔다.
덕분에 나도 이렇게 좋은 말들을 얻어듣는다.
그 말들이 죽지 않고 살아 숨 쉬고 있어서, 또 다른 공간, 또 다른 사람에게 의미가 되고 깨달음이 되었다.
이런 말들을 건네주는 지인이 있다는 게 얼마나 부럽던지.
나는 또 누군가에게 이런 말들을 건넬 줄 아는 지인이긴 했던 건지.
새삼 부끄럽다.
누군가의 장례를 치르고 돌아와 맞은 아침.
'그래도 어느 깊은 숲에서 잘 자란 나무 한 그루와 한 시절 함께했던 사람들의 슬픔 속에 우리들의 끝이 놓인다는 사실'을 다행스러워하던 시인에게 그 아침은 아프기만 하다.
그럴 수밖에.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는 이별을 하고 돌아와 부은 눈으로 잠들었다 깬 아침이 누구라도 서글프지 않으랴.
그 아침에 먹는 밥 한 숟갈의 울컥함과 안도를 나는 생생히 기억한다.
서글프게도 그 어떤 순간보다도 생생히 살아있음을 느끼는 아이러니한 아침.
우리는 그렇게 살아남았다.
구깃한 우리의 삶을 닮은 시인의 이야기들은 때론 서럽고, 때론 다정하고, 가끔 눈물이 난다.
조용히 조금씩, 손끝으로 더듬듯이 읽었다.
나의 마음의 온도와 가장 가까운 글을 읽었다.
마음이 고단할 때마다, 괜히 울컥 눈물이 날 것만 같은 날에, 다시 꺼내 읽어야겠다.
내 마음을 다독여준 그대,
고마워요. 정말.
같이 울어요,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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