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한 것을 사랑하나요 : 2W Magazine Vol.23 | 2W매거진
지난 4월은 온종일 글쓰기 생각을 하며 보냈다. 어떤 글을 쓰겠다는 열의에 찬 생각이었다면 행복한 비명을 질렀겠지만, 주제가 정해진 글의 글감이 도통 떠오르지 않아 머리를 쥐어 뜯었다.
나에게 무용한 건 무엇일까? 세상에 무용한 것이 어디있나?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것을. 그런 생각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데 종아리가 저리기 시작했다. 비가 오려나? 하며 날씨를 확인하니 모레 비가 잡혀있다. 이놈의 몸뚱어리, 정확하기도 하지…
이번에는 몸이 유난히 자주 아팠다. 보통의 봄날씨 보다 추웠다, 온화했다 하는 기복이 심해서 그런가 싶다.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날씨가 저기압이 되면 신경통이 심해 고생하다 보니 흐리고 비오는 날은 기막히게 잘 알았다. 심하면 밤에 잠도 못자고 온몸이 퉁퉁 부울 정도로 심한 통증에 시달린다. 통증만 없으면 내 생은 완벽하게 행복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다가 불현듯 글감이 떠올랐다. 마감일을 하루 남기고 겨우 글을 완성해 투고했다.
어렵게 썼지만 부족해 보이는 점이 많아 이번달은 글이 실리지 않아도 실망하지 말자며 나를 다독였다. 2W 매거진의 필진들 필력이 워낙 출중해서 안돼도 어쩔 수 없다 생각했다. 이번에 글을 쓰며 고민한 것들이 나에게 많은 도움이 됐다. 글은 쓸수록 어렵다는 작가들의 말이 이해가 되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사람 욕심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었다. 말일이 되자 나도 모르게 메일을 끊임없이 확인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 내 글이 실렸다는 메일을 받았다.
[2W 매거진 23호]의 주제는 ‘무용한 것을 사랑하나요’다. 무용한 것, 쓸모 없는 것. 지나가듯 생각하면 많을 것 같은데 막상 진지하게 파고들면 무용한 것이 무용하지 않다는 결론이 난다. 이번호에 실린 대부분의 글도 ‘무용한 것이 무용하지 않다’는 주제로 통했다.
시도때도 없이 나를 괴롭게 하는 통증도 그랬다. 무용해야 마땅하지만 통증에 시달리며 얻은 것이 있으니 무용하다 말 할 수 없는 것이다.
5월 2일, 매거진 발행 소식을 듣자마자 매거진을 다운 받아 읽었다. 감사하게도 내가 미진하다고 생각한 부분이 잘 편집된 글이 실렸다. 이래서 편집자의 역할이 중요하구나. 글을 읽으며 다시 배웠다.
그녀의 이름은 최수진이었다. - 해일
나는 계속 쓰는 삶을 선택했다. 쓰는 일이 결국에는 사는 일이라는 생각을 한다. 사는 만큼 충실히 쓰고 싶다. 아무런 성취가 없는 일에 이렇게까지 매진할 수 있다는 게 진정으로 놀라울 때가 있다. 이제 글을 쓰는 일은 성취와 상관없이 나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 되었다. 성취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닌 것처럼 그냥 내가 쓸 수 있는 것을 쓰고 싶다. 수진이가 다시 나에게 글을 쓰냐고 물어온다면 나는 이제 대답할 수 있겠지. 쓸모없어서 가장 소중한 일을 나는 그냥, 계속하고 있다고.
감상)
쓰는 삶이 쓸모없지 않다는 걸 안다. 해일님의 추억 속 최수진의 필력은 어쩌면 해일님이 지향하는 필력이지 않았을까? 나도 뜻밖의 인물이 쓴 글을 보며 질투를 느낀적이 많다. 그 사람이 글을 잘 쓸 수 있지 그게 뭐라고 질투를 하는지. 처음에는 내가 너무 못됐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유명한 작가들의 에세이를 읽다가 대부분의 작가들이 자기가 지향하는 글을 쓰는 작가의 글을 발견하면 질투한다는 글을 보고 안도했다. 글을 잘쓰고 싶은 욕심을 갖고 있으니 유명한 작가의 반열에 오른 것일테다. 해일님은 글쓰기가 무용하다 생각하면서 ‘계속 쓰는 삶을 선택했다.’ 그것은 용기다. ‘아무런 성취가 없는 일에 이렇게까지 매진할 수 있다는’ 건 그것이 무용하지 않다는 반증일 것이다.
오리 우유의 무용함 - 글에다가
행복은 크고 멀리 있는 것도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라는 걸. 내가 잊지 않고 기억해뒀다가 써두는 그 사소한 것들 안에 숨어있다는 걸.
마음만 먹으면 언제 어디서든지 손에 쥘 수 있는 무용한 것들 안에 내가 그동안 외면하고 살았던 행복이란 것의 실체가 있다.
감상)
‘감정의 등고선이 존재한다면, 나는 감정의 기본 바탕이 낮은 선에 있는 사람이었다.’는 문장에서 한참 머물렀다. ‘감정의 등고선이 존재한다면, 나의 감정선은 굉장히 높으려나? 아니면 악산에 준하는 등고선 일지도..’ 나는 감정 기복이 심한 편이다. 금방 웃다가 누군가 울면 금방 같이 울어 버린다. 우울의 우물은 삼십대 중반까지만 팠다. 삼십대 후반 이후 우울해 봐야 인생에 도움이 안된다는 진리를 깨닫고, 우울이 찾아오면 이건 호르몬이 그러는 거야. 하고 넘어간다. 그랬더니 사는데 힘들 일이 없어졌다. 이것은 독서를 하고 글을 쓰며 생긴 현상이다. ‘행복은 크고 멀리 있는 것도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라는 걸.’ 나도 글을 쓰며 알았다. 사소한 걱정과 우울한 감정을 글로 쓰면서 생각을 정리하니 그런 것들이 별거 아니었다. 근심 없이 사는 게 행복한 일이다. 아마 글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지 않을까.
럭키한 무명씨 - 조하랑
김무명은 담배 피우러 나올 때마다 고양이를 찾았다. 눈에 띄게 핼쑥해지고 못생겨진 고양이가 자신의 처지 같다고 느꼈다. 쓸모 있는 일은 하나도 하지 않는 쓸모없는 놈, 돈을 버는 일보다 돈을 쓰는 일이 더 많은 놈. 그런 평가에 걸맞게 김무명이 좋아하는 것은 무용한 것들이었다. 음악을 듣는 것, 음악을 만드는 것,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 담배를 피우는 것, 그리고 지금은 저 못생긴 고양이를 바라보는 것.?
감상)
김무명과 럭키의 관계가 뭉클하다. 무용한 것은 무용한 것을 알아본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무용한 것일까? 쓸모없는 놈이란 평가를 받는 김무명씨는 어느 순간 길에 유기된 고양이 럭키에게는 유용한 사람이 될 것이다. 소설가를 꿈꾸고 있다는 작가의 말을 읽으며 어쩐지 이 소설 재밌더라 생각했다. 조하랑 작가님의 다른 소설이 궁금해진다.
무용한 것의 무용하지 않음 - 전명원
모든 것이 여전하다는 건, 좋은 일이다. 산과 들이, 집과 마을이 여전하다. 그 여전한 풍경들 속에 낚시꾼으로 선 나를 생각한다. 나 역시도 지난겨울을 넘기고 새봄을 맞았지만, 여전히 물가에 서 있다. 좋은 일이다. 좋은 하루다. 그러면 되었다. 무용한 것은 결코 무용하지 않다.?
감상)
누군가에게 무용해 보이는 낚시라는 취미는 그것을 즐기는 사람에게 쉬어갈 수 있는 시간을 알려준다. ‘무용한 것은 결코 무용하지 않다’고, 세상에 무용한 것은 없다. 그것이 나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에 따라 쓸모가 달라질 뿐이다.
김혜지의 안녕, 엄마2
엄마의 떡볶이는 맛이 없었다.
멀건 죽을 삼키면서 엄마와 연결된 내 삶에 대해 생각했다. 위장이 좋지 않아서 약을 달고 살았고, 최대한 자극적이지 않은 음식을 먹어야만 했던 우리의 삶. 결국 멀건 떡볶이는 엄마의 사랑이었는데 철없던 그때는 그저 맛없는 음식으로 치부해 버렸다. 싱겁다고, 맛이 없다고 투정 부릴 수 있는 엄마가 없다는 사실이 서러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엄마를 떠올리게 하는 그 맛은 이제는 허전함이고, 허무함이고 그리움이다.
감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엄마는 나와 연결된 첫 세상이었고, 그 세상을 떠나왔어도 나를 기다려주는 유일한 세상인데, 그 세상이 사라졌다는 건 내가 돌아갈 곳이 없다는 의미다. 그 허전함과 허무를 맞닥뜨리며 사무치는 그리움에 젖는 마음이 나에게도 전해져 눈시울이 붉어졌다.
곁을 지켜주는, 이별 - 조감성
가족이 아닌 타인인 내가 임종을 지키는 것. 이 무용함은 나만의 의식이다.?
평안히 가시라고 나직이 속삭이는 것,
함께 지낼 수 있어서 행복했다고 말씀드리는 것,
힘겨워하시면 차가워진 손을 가만히 잡아드리는 것,
어르신의 얼굴이나 의복이 지저분하지는 않은지 살펴드리는 것,?
임종 전 종사자들을 불러 어르신께 마지막 인사를 드리게 하는 것,?
그리고 숨이 사그라지는 순간까지 곁에 있어 주는 것,?
어르신이 홀로 떠나지 않도록 곁을 지켜주는 나만의 의식.
마지막 눈 감는 순간까지 어르신의 눈동자에 우리들의 얼굴이 담길 수 있기를. 가족은 아니지만, 가족 같은 우리가 곁을 지켰다는 것을 기억해 주셨으면 한다.?
그 바람 하나만으로도 나는 나만의 무용한 의식을 계속해서 치를 수 있을 것 같다.
감상)
죽음 곁을 지킨다는 건 어떤 마음일까?
인생의 마지막을 자주 지키는 건 흔한일이 아니다. 어르신의 마지막이 다가올 징조를 알아보고, 가족들에게 임종 준비를 알리며 어르신의 가족이 올때까지 임종을 지키는 의식을 치르는 작가의 마음이 전해진다. 누구나 죽음 앞에서 숙연해진다. 누군가의 죽음이 외롭지 않도록 지켜주는 사람. 작가의 무용한 의식을 채우는 기도문 같은 글을 읽어내려가며 눈물이 핑 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