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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발행일 | 2004년 04월 2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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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341쪽 | 494g | 크기확인중 |
ISBN13 | 9788937480423 |
ISBN10 | 8937480425 |
2024년 07월 16일 ~ 2024년 08월 09일
얼리리더를 위한 7월의 책 : 곰돌이 푸_마그넷 오프너 증정
2024년 07월 01일 ~ 2024년 07월 31일
상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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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일.
수필을 쓰면서 나만의 독특한 방식이나 색깔, 소리가 있는가, 자문하고 애간장 녹이며 질책한 게 무릇 기하인가. 이렇듯 중차대한 스타일을 단숨에 일축하는 말이 있다.
예술적 천재와 대가적 노련함을 가진다는 것은 아무도 다다를 수 없는 경지의 그림을 그리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마침내 그 작품에 화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는 그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는 것이다.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을 빨강’에 나오는 말이다.
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 이 한 마디를 던져 놓고 살인자는 살인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 완전범죄를 꿈꾼다.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는 것. 서명을 하지 않는다는 것. 스타일 없음의 철학. 이게 살인의 제1수칙이며 터키 전통 미술의 화두이고 이 책의 담론이다.
책은 역사 소설로 416년 전의 사건을 현재시재로 끌어다 놓는다. 살인사건을 다루는 박진감 넘친 글로 단편 소설처럼 촘촘히 읽히고 페이지마다 터키 미술사에 대한 지적 호기심이 빵빵하게 들어찼다.
스타일에 관한 의견은 다음과 같다.
그림은 답습이다. 수천, 수만 번 그림을 그려 비로소 손에 익히는 것이며 어느 곳 어느 때라도 자신을 내비치지 않는 것. 실수를 하지 않는 것. 따라서 스타일 이란 것은 자신을 드러내는 서명(sign)이며 실수를 긍정하는 것이다.
그럴까. 스타일이란 오랜 습관으로부터 오는 자기표현이다. 독창성, 자기 자신의 표현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다보면 후배들의 답습으로 새로운 스타일이 되며 전통으로 전범(典範)이 되고 새로운 화법(畵法)으로 발전하는 것 아니냐.
다음은 동서양이 충돌하는 이스탄불에서의 미술론이다.
첨탑(尖塔)에 올라 신(神)의 시선으로 사물과 인간과 역사를 그리는 게 터키 고유의 전통 화풍인데 비해 베네치아 그림은 화폭 중앙 신(神)만이 들어갈 자리에 건방진 인간이 들어서고 원근법을 사용해 사실적으로 그린다. 따라서 베네치아 식은 악마의 유혹에 빠지는 것이며 터기 전통에 이교도 화풍을 뒤섞어 순수성을 훼손하는 행위로 서양인들의 노예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보수에 대한 진보요 개방의 입장은 이렇다.
…절대로 순수한 것은 없다. 아름다운 작품이란 언제나 두 가지 화풍이 결합되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아랍의 섬세한 세밀화가 몽골과 중국의 화풍과 결합된 것은 비흐자드와 페르시아 그림의 훌륭함 덕분이며, 카마스프 샤의 가장 아름다운 그림은 페르시아 화풍과 터키의 감성이 혼합된 것이다. 서방도 동방도 모두 신의 것이다.
터키의 근대사는 역동적으로 갈등한다. 전통이냐, 개방이냐, 보수냐, 진보냐.
전통을 고집하는 화원장(畵院長) 오스만은 바늘로 눈을 찔러 장님이 되어 명예를 지키고 베네치아 화풍을 따른 젊은 화가들은 살인사건에 휘말린다.
작가 파묵은 다음과 같이 개방을 마뜩치 않아 한다.
‘독자들 가운데 서양보다는 동양의 독자들이 슬픔을 깊이 통감하며 이해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슬픔이란 물론 서양의 예술 및 문화의 강한 영향으로 우리들의 전통적인 시각 예술과 청각예술, 창작 기법은 물론 감성까지 잃어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안타까움입니다. 이 소설은 이러한 깊은 슬픔과 인간적인 고뇌를 소재로 하고 있으며, 나는 한국 독자들도 이러한 슬픔들을 가슴 속에 지니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작품 마지막부분에서 여주인공 셰큐레의 입을 빌려 이스탄불 최고의 미인으로서의 젊은 날의 자기 초상화 하나 서양화로 그리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며 둘째 아들 오르한에게 이루지 못한 소원 ― 행복이란 이름의 그림, 이루지 못한 또 다른 소원을 소설로 그리게 한다. 그 오르한이 그린게 이 소설이다.
작가 오르한은 에셔의 메비우스의 그림 연작을 다시 차용한다. 손을 그리는 손을 그려지는 손이 그리고, 그림 속에서 살아나는 악어가 다시 그림 속으로 녹아들어가며, 떨어진 폭포의 물이 다시 폭포 위를 흐르는 그림들. 2차원을 1차원으로 변형시키는 그림의 연작. 그의 또 다른 소설 ‘하얀 성’이 그렇고, ‘새로운 인생’이 이렇게 뒤 엉킨다.
뒤엉킴.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2권에서 작중인물들이 출판된 1권에 대하여 각자 논평을 가하고, 스페인 철학자 우나무노가 그의 소설 ‘안개’에서 소설 속 주인공이 작가를 찾아가 꼭 자기를 죽여야만 하느냐 따지고 소설속의 또 다른 인물이 소설책의 서문(序文)을 쓰기도 한다(이건 내가 나의 책 ‘아내가 늙어가고 있다’의 서문 ― ‘아내가 쓰는 작가론’에서 차용한 건데 읽는 사람 아무도 눈치를 채지 못하니 내가 너무 잘 쓴 건지 못 쓴 건지).
작가가 소설 속으로 들어가고, 소설 속 가상의 인물이 세상 밖으로 튀어나온 뒤죽박죽인 세상. 아름다운가?
아름다운 딸을 가진 왕이 있었다. 딸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이웃 나라 왕자가 청혼을 하면 전쟁을 선포할 만큼 딸의 아름다움을 독차지하려했다. 40개의 열쇠 40개의 문 속에 감금했다. 지루해진 딸의 아름다움이 흘러나와 거울에 비쳤고 거울 속 그림자는 문틈을 지나 열쇠 구멍을 통과하고 밤새워 세밀화를 그리는 도제 중 한명의 눈에 어떤 빛, 보이지 않는 연기처럼 띠여 참을 수 없는 열정으로 그리던 그림 한 구석에 그려지는 장면은 콜롬비아 소설가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 속의 죽어가는 아들의 붉을 피가 콸콸콸 쏟아져 대청마루를 지나 마당을 가로 지르고 창고의 벽을 따라 천장을 건너 뛰어 어머니를 찾아가는 구절을 생각나게 한다.
중남미 환상적인 소설. 작가. 카를로스 푸엔떼스, 이사벨 아엔테, 이탈로 칼비노. 마리오 바르카스 요사. ‘똥은 똥끼리 모인다.’ 깡패들 속어다. 파묵을 읽다보면 마르케스가 생각나고, 귄터 그라스, 프로벨르, 카프카, 밀란 쿤테라…. 글의 구성, 관용구, 비유, 필치가 비슷비슷해 보이는 거다. 그들끼리 모여 이 직유는 네가, 저 문구는 내가, 저런 은유는 쟤가 쓰기로 약속하는 등 모종의 밀회(密會)를 어디선가 수도 없이 반복하는 것은 아닌지.
세상 모든 그림을 3일 동안 보고 난 장인이 눈이 머는 장면이 있다.
색은 어둠에 서 온 것이다. 색을 보는 사람은 색의 원천인 어둠을 찾는 법이다. 기억이 신에게 도달한 곳에는 오직 절대적인 고요와 행복한 어둠 그리고 빈 페이지들의 영원함만 있을 뿐이다.
현대미학이다. 말레비치의 ‘흰 사각형 안의 검은 사각형’ 절대주의. 러시아 현대미술의 아방가드르 아이콘 아니겠는가. 현대 미학이란 게 꼭 현대만 있으란 법은 없지. 500년 전에 있었던 걸 그 때 못 알아본 것뿐일 수도 있고. 미학이란 게 철학 아닌가. 철학, 현대 철학자들 뜯어보면 칸트나 니체식의 명징한 자기 철학 있는 것도 아니다. 남의 철학, 생각, 이론, 조각조각 자기 철학으로 짜깁기한 것 아닌지. 하이데커, 데리다, 푸코, 들레즈, 보드리야르….
근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토록 많은 이론과 사유와 철학과 이념, 생각들이 수도 없이 쏟아져 나오고 중첩되어 다루어진 시대가 있는가. 요는 얼마나 많은 정보를 수집해 적시적소에 써 넣어 자기 이론화 하느냐가 문제일 뿐.
이 책만 해도 그렇다. 수많은 액자소설, 구문, 경구…. 페르시아에서 애급에서 시리아, 베네치안, 중앙아시아, 러시아, 중국, 몽고, 우즈베키스탄, 닿을 수 있는 곳이라면 지옥도 마다하지 않고 찾아가 미술, 철학, 소설, 시, 수필, 민담, 야화, 동화, 어느 것이나 막론하고 몽땅 그러모아 자기생각 기가 막히게 그려낸 것 아닌가.
…어떤 주제가 사랑이라면 그 그림은 사랑으로 그려져야 하네. 고통이라면 그림에서 그 고통이 묻어 나와야하지. 그렇지만 그 고통은 그림에 있는 사람들의 표정이나 눈물 때문이 아니라, 그림을 처음 본 순간 느껴지는 그림 내부의 조화에서 나와야 하네.
아직도 이르지 못한 지평이며 앞으로도 이른지 못할 나의 지평이다. 이미 오정순의 ‘그림자가 긴 편지’ ― 물감이 묻어나는 수필을 연모한 나날들을 다시 생각한다.
아우라. 내가 책을 읽을 때마다, 처음 읽을 때의 감격을 찾아 두, 세 번을 내리 읽어도 그 감동을 도대체 찾을 길 없었던 것은 이 아우라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이것 없음에 내가 재독을 금하는 이유이며 예술로서의 수필을 꺾지 못하는 까닭이다.
불같은 분노, 뇌성벽력과 같은 따귀의 갈김, 심장이 터져나가는 박동, 팔팔 끓는 냄비의 울림, 출발하는 증기기관차의 식닥거림…. 이런 게 없으면 절대 글을 쓰지 않는다. 쓸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작가인 내게 이런 느낌 없이 써 놓은 글이 있다면 독자에게 도대체 어떤 감동을 줄 수 있을까. 이게 파묵이 말하는 빨강 아니겠는가. 생(生)이고 기(氣)의 원천이며, 변화요, 죽음이며 세상 어느 곳에도 존재하는 신(神)의 색 ― 빨강.
스타일, 그리고 빨강을 찾아 나는 오늘도 좌충우돌 멈추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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