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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 2005년 05월 0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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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125쪽 | 178g | 125*200*20mm |
ISBN13 | 9788936422455 |
ISBN10 | 8936422456 |
창비시선 500번 기념『이건 다만 사랑의 습관』,『한 사람의 노래가 온 거리에 노래를』출간
2024년 03월 27일 ~ 2025년 04월 04일
2024년 09월 09일 ~ 2024년 10월 10일
뉴욕타임즈 21세기 최고의 책 100대 도서 『파친코』, 『채식주의자』 선정
2024년 07월 15일 ~ 2024년 10월 18일
문학 PD가 보내는 백 번째 편지 : 100호 기념 기획전
2024년 09월 20일 ~ 2024년 11월 30일
소진시
2024년 10월 01일 ~ 2024년 10월 31일
상시
3명의 예스24 회원이 평가한 평균별점
부산 출신 시인이다. 23세에 시인으로 등단하여 70이 넘도록 시를 계속 써오신 분이다. 평생 시인으로 사신 분에게 시란 무엇인가. 몇 년 전 ‘한용운 문학 캠프’에서 하신 말씀을 간단히 정리해 보았다.
1. 시인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눈은 늘 구경꾼이 되고 발은 늘 나그네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사물을 세심하게 보는 현미경 같은 눈과 멀리 느껴보는 망원경 같은 눈을 가질 수 있다.
시를 쓰려면 사물을 눈여겨 보아야 한다. 그 속에서 새로움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나그네가 된 발은 낯선 곳을 찾아 새로운 곳을 발견하게 된다. 시인은 일상 속에서도 일상 너머를 보아야 한다. 그 속에서도 상식적인 감각을 버려야 한다. 시를 쓰려면 보는 법을 배우고 알아야 한다. 그래야 구체적인 이미지를 잘 드러내고 시적 여운과 바람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말은 침묵에 근접할 때 사람의 가슴에 와닿는다. 그래서 시의 완성이란 더 뺄 것이 없을 때 완성된다. 무엇을 쓰느냐 보다 어떻게 쓰느냐가 중요하다. 시인은 언어에 끌려다니지 말고 언어를 주재해야 한다. 시인은 스스로 유배를 내리고 황무지를 찾아가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세상에서 가장 먼 길이 머리에서 가슴까지 가는 길이며 세상에서 가장 먼 여행이 나에게로 귀향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시인의 길이 아닐까 한다. 문학을 삶의 중심에 두고 사는 사람들은 새로운 삶을 위해 언제나 질문하는 자세를 가진다. 문학은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하고 변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신은 늘 만행해야 한다. 만행이란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여러 곳을 자유롭게 수행하는 것이다. 시인도 만행하는 수도자의 자질을 닮아야 한다.
시의 완성은 더 보탤 것이 없을 때가 아니라 더 뺄 것이 없을 때 이루어진다. 언어의 깊이도, 삶의 무게도, 말의 새로움도, 현실의 절박함도, 생활에 대한 성찰도 없이 허영내가 물씬 진동하는 시는 아무리 기교가 현란해도 좋은 시가 될 수 없다. 시인에게 필요한 것은 무한한 상상력이다. 상상력은 재능을 불러온다. 시인에게 세상에 대한 끌림과 떨림, 울림을 이끌어내는 상상력이 있어야 한다.
2. 시란 결핍에서 온다.
태양 반대쪽에 놓인 물방울과 빛의 산란으로 무지개가 뜨는 것처럼 시는 결핍이라는 자양분을 빨아들여 꽃을 피운다.
이 말은 슬픔에 의지하되 슬픔의 소유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왜냐 하면 시인은 슬픔을 최소 조건으로 삼아야 하기 때문이다. 글쓰기는 일상의 고통과 스트레스를 극복하고 마음의 상처 치유하는 좋은 길이다. 시를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시를 살아내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괴로움 없이, 절박함 없이 시의 해답은 없다. 나는 시를 쓰면서 자발적 소외와 지독한 고독을 자청했다. 고독할 때 가장 강하고 가장 순수하다. 시를 쓸 때 고독을 자양분으로 삼고 정신은 고독을 공기처럼 필요로 한다. 고독을 잃으면 시의 고갈이 온다. 고갈이 오면 시의 위기, 죽음이 온다. 그러지 않기 위해 많이 생각하고,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지워 버려라. 시의 위기, 죽음은 새로운 시를 탄생케 하는 최고의 질료이다.
빛이란 이따금 어둠을 지불해야만 볼 수 있고 웃음이란 울음을 지불해야만 터질 수 있다.
나는 배낭을 메고 전라도, 경상도, 강원도를 떠돌았다. 깨달은 것은 자연과 인간은 두 개가 아닌 불이의 세계라는 것과 등차 없는 무등의 경지이며 세상과 개인을 변화시키는 유일한 희망, 보편적 진실이라는 걸 깨달았다 바다와 하늘 같이 경계 없는 것들이 우리를 자연스럽게 해준다는 것을 알고 나서 어둡고도 상처의 긴 터널을 뚫고 나올 수 있었다. 헤맨다고 방황하는 것은 아니며 멍들었다고 다 썩는 것은 아니다.
3. 시란 무엇인가.
시란 언어로 짓는 사원이다.
나에게 시란 삶의 의미이고 치유이며 유일한 힘이고 방책이다. 나에게 왜 시를 쓰냐고 물으면 잘 살기 위해서라고 대답한다. 잘 산다는 것은 시로서 나를 살린다는 뜻이다. 시는 절로 나를 새롭게 하고 시는 절로 나를 밝게 하며 시는 절로 나를 철들게 한다. 시는 삶의 질을 높이는 가치다. 삶의 질이란 사람이 사람답게 살게 하고 아름답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삶이다. 시는 사치가 아니라 가치다.
내가 가장 어렵고 죽을 만큼 힘들었을 때 나를 살린 것이 시였다. 나를 배신하지 않고 정성을 들인 만큼 나를 살려주었다. 시는 내 삶에서 놓아줄 수 없는 운명이다.
시를 주도하는 힘은 자신을 인정하는 데서 있다고 생각하며 시쓰기의 어려움을 극복한다. 우리 앞에 벽이 있는 것은 나아가다가 잠깐 생각하라고 있는 것이다. 인디언들이 말을 달리다가 한번씩 뒤를 돌아보는 것은 자기가 달려온 길에 후회가 없도록 하기 위함이다. 앞으로 나아가다가도 잠깐 뒤를 돌아보아야 한다. 인간의 장점은 실패했다고 해서 포기하는 것도 아니고, 헤맨다고 해서 길을 잃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후회와 반성을 되풀이한다. 글도 삶도 매일매일 일구는 것이다. 삶에서 많은 말을 하고 많은 말로 글을 쓰지만 말이 소중한 것을 잊고 산다. 말은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이 될 수 있다. 말은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소통 능력이다. 이것이 언어의 힘이다. 한자로 보면 시詩는 언어로 짓는 사원이다. 사원은 구도자가 용맹정진하는 곳이다. 시인도 구도자의 자세로 정진하라는 말이다. 시는 내 목숨에 대한 반성문이다. 그동안에 내 궤적을 뒤돌아보면 내 시는 내 목숨에 대한 반성문이다. 나는 앞으로도 삶에 대해 끝없이 질문을 계속하고 상처를 꽃으로 피우기 위해 시를 써나갈 것이다.
-----------------------<시 읽기>------------------
파지 - 천양희
그 옛날 추사(秋史)는
불광(不光)이라는 두 글자를 쓰기 위해
버린 파지가 벽장에 가득했다는데
시 한 자 쓰기 위해
파지 몇장 겨우 버리면서
힘들어 못 쓰겠가고 중얼거린다
파지를 버릴 때마다
찢어지는 건 가슴이다
찢긴 오기가
버려진 파지를 버티게 한다
파지의 폐허를 나는 난민처럼 지나왔다
고지에 오르듯 원고지에 매달리다
어느 땐 파지를 팔지로 잘못 읽는다
파지는 나날이 내게서 멀어져간다
내 손은 시마(詩魔)를 잡기보다
시류와 쉽게 손잡는 것은 아닐까
파지의 늪을 헤매다가
기진맥진하면 걸어나온다
누구도 저 길 돌아가지 못하리라
- 『너무 많은 입』, 2023
--> 이 시에서 시인으로서의 삶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시 쓰는 일은 고통이고 고독이고 스스로 유배를 내리고 황무지를 떠도는 일이다. 시인이 가장 경계하는 일은 시류(時流)에 편승하는 일이다. 그것은 사유하지 않는 삶이며 질문하지 않는 삶이다. 시인은 일상에서 살고 있지만 일상 너머에 있는 것을 보려 하고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롭게 보려고 하고 삶의 가치를 찾아내려고 해야 한다. 힘든 일이지만 시인은 포기하지 않는다. 파지의 늪에서 헤매며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길을 묵묵히 인내하며 걸어나가는 삶이 시인의 사명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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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일생 - 천양희
부판이라는 벌레가 있는데 이 벌레는 짐 지고
다니는 것을 좋아한다는데 무엇이든 등에 지려고 한다는데 무거운
짐 때문에 더 이상 걸을 수 없을 때 짐을 내려주면 다시 일어나
또다른 짐을 진다는데 짐 지고 높이 올라가는 것을 좋아한다는데
평생 짐만 지고 올라간다는데 올라가다 떨어져 죽는다는데
히스테리아 시베리아나라는 병이 있는데 이 병은 시베리아
농부들이 걸리는 병이라는 데 날마다 똑같은 일을 반복하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때 곡괭이를 팽개치고 지평선을 향해
서쪽으로 서쪽으로 걸어간다는데 걸어가다 어느 순간 걸음을
뚝, 멈춘다는데 걸음을 멈춘 순간 밭고랑에 쓰러져 죽는다는데
오르다 말고 걸어가다 마는 어떤 인생
- 『너무 많은 입』, 2023
--> 누구에게나 짊어져야 할 삶의 무게가 있다. 등에 짊어져야 할 짐이나 매일 똑같은 일들이 우리를 짓누른다. 결국 우리를 죽게 만드는 것들이다. 화자는 벌레나 시베리아 농부들의 비극적인 인생을 보여주면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우리 또한 맹목적으로 무언가를 향해 나아가기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 삶을 돌아볼 줄 모르고 파국으로 치닫게 되는 줄도 모르고 앞만 보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러므로 경계를 해야 한다고 화자는 말하고 있다. ‘사유의 결여’는 악이다.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저항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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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봉 - 천양희
높은 산에 오를 준비를 할 때마다 장비를 챙기면서
운다고 고백한 산사람이 있었다 14번이나 최고봉에 오른 그가
무서워서 운다고? 그 말을 듣는 순간 산 때문이 아니라
두려움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무서운 비밀을 안 것처럼
나도 무서웠다 산 오를 생각만 하면 너무 무서워서 싼 짐을
풀지만 금방 울면서 다시 짐을 싼다고 한다 언젠가 우리도
울면서 짐을 싼 적이 있다 그에게 산이란 가야 할 곳이므로
울면서도 떠나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산이란 가야 할 곳이므로
울면서도 떠나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무서워 울면서도
가야 할 길이 있는 것이다
능선에 서서
산봉우리 오래 올려다보았다
그곳이 너무 멀었다
- 『너무 많은 입』, 2023
--> 화자는 산사람의 고백을 통해 인생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말하고 있다. 산이란 올라가야 할 곳이다. 누구도 산에 올라야 한다는 의무를 준 사람은 없다. 본인 스스로 의무로 인식한다. 산사람은 14번이나 올랐다고 한다. 이젠 제법 능숙하여 쉽게 오를 법 한데도 무섭다고 한다. 그에게 산이란 운명일지도 모른다. 무섭다고 쉽게 포기할 수 없기에 울면서도 짐을 싼다. 마찬가지로 누구에게나 울면서도 가야할 길이 있다. 누가 그렇게 하라고 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태어났으니 살아가야 하듯이 그 길을 가야 한다고 스스로 의무로 인식한다. 그 끝이 멀더라도. 울면서도 나아가는 일이 우리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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