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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 2008년 10월 2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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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320쪽 | 398g | 148*210*30mm |
ISBN13 | 9788936433673 |
ISBN10 | 8936433679 |
2024년 09월 09일 ~ 2024년 12월 31일
2024년 10월 04일 ~ 2024년 11월 30일
뉴욕타임즈 21세기 최고의 책 100대 도서 『파친코』, 『채식주의자』 선정
2024년 07월 15일 ~ 2024년 11월 08일
문학 PD가 보내는 백 번째 편지 : 100호 기념 기획전
2024년 09월 20일 ~ 2024년 11월 30일
소진시
2024년 11월 01일 ~ 2024년 11월 30일
상시
811명의 예스24 회원이 평가한 평균별점
느리긴 하지만 그동안 선물받거나, 추천받은 책이 쌓여서 천천히 읽어가고 있는 중이다. 내년 취업으로 마음을 굳혔다지만 미리 경험 해 두는것도 좋을 것 같아서 최근에는 공채에 넣을 자소서를 쓰느라 정신없는 나날들ㅠㅠ...그래도 잠깐 짬이 난 사이에 오랫동안 소홀했던 감상이나 써볼 까 한다. 이번에 남기려는 작품은, 얼마 전 W은행 자소서에 언급했던 신경숙 작가님의 '엄마를 부탁해'이다.
엄마를 잃어버린 지 일주일째다.
시작과 동시에 작품은 강한 긴장감을 조성한다. 생일을 맞기 위해 남편과 함께 자식들이 살고 있는 서울로 올라오던 어머니가 서울역에서 실종된다. 책 도입부부터 자식들은 어머니를 찾는 전단을 올리느라 분주하다. 워낙 처음부터 정신없이 짆애되고 있어서 하마터면 모르고 지나칠 뻔했다. 첫 번째 장의 시각의 주체이기도 한 큰 딸을 지칭하는 사실이 '너'라는 것을. 아무래도 화자는 큰 딸이 아닌 다른 누구인 모양이다.
이런 양상은 큰 딸의 시각을 다루고 있는 첫 장을 지나 장남의 이야기를 보여주는 둘째 장에서도, 남편의 이야기를 보여주는 셋째 장에서도 이어진다. '그'로 지칭되는 장남을 거쳐 '당신'으로 지칭되는 남편의 이야기까지. 세 개의 장이 진행되는 동안 다양한 모습의 어머니를 볼 수 있었다. 금방 짜증을 내는 성격 때문에 어머니와 자주 부딪히는 딸과는 달리, 큰 아들을 대할 때의 어머니는 아들을 굉장히 믿고 신뢰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남편의 이야기에서는 자식들 앞에서는 보여주지 않던 약한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세 가지 이야기를 보는 내내 공통적으로, 어머니의 '희생'을 느낄 수 있었다.
마지막 장에서, 드디어 작품 속 화자가 누구였는지가 밝혀진다. 바로 자식들이 애타게 찾고 있는 어머니였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다. 자식들과 남편을 눈 앞에 두고 있는 것 처럼 말하면서도 말 한 번 걸지 않는다. 그저 어머니를 잃은지 9개월 째에 접어든 자식들의 일상을 지켜보며, 혹은 자식들이 성장하며 거쳐갔던 장소들을 돌아보며 혼잣말을 할 뿐이다. 앞에서 본 어머니의 모습은 희생하는 모습 뿐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미안하다고, 계속해서 미안하다고 사과만 하고 있다.
사실 여기까지는 책을 읽으면서도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조금씩 드러나는 어머니의 과거 이야기를 읽어가며 가장 충격을 받았던 것은, 어머니 내면에 자리잡은 '욕망' 때문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어머니의 마음 속에서도 욕망이 자라는 것이 당연하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던 나에 대한 충격이었다. 어머니 역시 한 사람의 인간인데 왜 그동안 어머니의 희생을 당연하게 받아 들이고만 있었던 건지.
소재가 소재인 만큼 어머니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외동딸인 만큼 어디가서 이기적이다, 버릇 없이 컸다는 말을 듣지 않게 하기 위해 엄마는 어릴 적부터 나를 엄하게 키우셨다. 남들은 아직 자식들을 끼고 다닐 나이인데도 독립심을 길러주기 위해 심부름도, 집보기도 어린 나이부터 시키셨다. 그래서 사실 중학생때 까지는 엄마를 굉장히 무서워하고, 싸움도 잦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엄마와 내 관계가 변했던건 고등학생 때였다. 엄마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이라며 동의하셨다. 3년동안 기숙사에 살면서, 힘든 시기인데도 기댈 곳이 없어 엄마를 그리워했던 일이 많았다. 그 때문인지 대학생이 된 이후로는 엄마와 마치 친구처럼 편한 사이가 되었다. 엄마 역시 3년동안 딸을 떠나보내면서 여러가지, 나로서는 알지 못할 감정을 많이 느끼셨던건지 대학생이 된 후로는 옛날에 비해 많이 유해지셨다. 최근에는 아빠 몰래 둘이 술 한잔씩 하며 수다를 떨 정도이니, 더 이상 친해질 수가 있을까.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난 뒤로 자꾸만 엄마 생각이 났다. 어린 나를 위해 다니던 회사도 그만둔 엄마, 학원에 가두어놓기 싫어서 친구들과의 모임도 포기하고 직접 공부까지 해가며 나를 가르치던 엄마의 모습 등이. 그리고 얼마 전, 술을 마시면서 어렸던 나에게는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하나둘씩 꺼내는 엄마의 모습이 자꾸만 잊히지가 않는다. 당시에는 그냥 엄마가 힘들었던 모양이다, 라며 가볍게 넘겼는데 이 이야기를 꺼내기까지 얼마나 마음속에 묵혀두었을까 하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다. 마치 '엄마를 부탁해'의 어머니처럼.
엄마는 알고 있었을까. 나에게도 일평생 엄마가 필요했다는 것을.
평생을 어머니로 살아왔던 그녀는, 소설의 마지막에서야 비로소 딸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 큰 딸이 본 피에타 상처럼, 자신의 어머니에게 지친 발을 맡기면서 드디어 쉴 수 있는 장소를 찾은 것이다. 그동안 짊어지고 있던 모든 짐은 내려놓은 채로.
아직도 책을 덮었을 때의 여운이 생생하다. 내가 그동안 당연하게 생각하며 편하게 지내오는 동안, 엄마는 얼마나 많은 것을 희생했는지를 생각하며 한참을 펑펑 울었다. 새벽에 읽는 바람에 다음날 눈이 아주 퉁퉁 부어올랐지만ㅠㅠ
왜 이것을 좀더 일찍 깨닫지 못했는지, 그동안 엄마에게 많은 것을 받아오면서 한번도 엄마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못했는지 그저 답답할 뿐이다.
얼마 전 집에 가면서 엄마에게 이 책을 전해주고 왔다. 지난번에 읽고있을 때 관심을 보이셨던게 너무 신경이 쓰여서. 아마 딸의 입장만 경험해 본 나와는 달리, 엄마는 이 소설에서 더 넓은 무언가를 느끼실 수 있지 않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슬픔이라는 감정으로부터 한 걸음 비켜난 채 살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엄마의 자궁을 박차고 나와 첫 울음을 터트리는 순간 자기 앞에 놓여진 삶이라는 기구한 행로를 걸어가게끔 운명지어져 있다. 슬픔을 애써 외면하며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살고 있지만 인간이라는 존재는 본연적으로 슬픔을 함의한다. 신경숙은 언제나 그 본연의 슬픔이라는 것에 정면으로 마주한다. 독자에게 매번 큰 생채기를 남기면서도 그 슬픔의 내면을 깊게 후비 파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삶에 대해서, 사랑에 대해서, 혹은 죽음에 대해서 진지하게 마주하면서 파토스를 극대화시키는 것이 신경숙 소설의 일관된 특징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엄마에 대해서 그가 가진 모든 역량을 쏟아 부어 뼈 저리는 슬픔 속으로 독자를 안내한다.
신경숙의 신작 <엄마를 부탁해>는 제목에서 짐작 할 수 있듯이 가족과 엄마의 존재 의미에 대한 물음에서 시작한다. 가족이 직접적인 소재로 다루어지는 소설들이 다 그러하듯 이 소설 또한 그 집필 의도가 분명하다. 소설은 가족 간의 끈끈한 정이라든가 가족 공동체의 회복에 대한 염원, 가족의 소중함에 대한 인식을 바탕에 깔고 있다. 그러나 '엄마를 부탁해'는 이러한 상투적인 주제를 엄마의 실종이라는 꽤 참신한 발상으로 풀어나간다는 점에서 뚜렷한 개성을 보여준다.
소설의 첫 문장은 '엄마를 잃어버린 지 일주일째다'로 시작된다. 가족의 실종이라는 중대한 사건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툭 내던지며 읽는 이를 쉽게 도발하는 이 첫 문장은 앞으로 밝혀지게 될 사건의 전모를 알게 되면 더 큰 쓰라림으로 다가온다. 보통 잃어버렸다는 말은 자신의 소유이던 것이 없어졌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이를테면 '지갑을 잃어버렸다'거나 ‘차표를 잃어버렸다’와 같이. 그런데 엄마를 잃어버렸다니. 아니 그 전에 엄마는 과연 소유할 수 있는 존재인가.
어느 날 서울역에서 어이없이 실종된 엄마를 찾기 위해 가족 모두가 고군분투하는 내용이 소설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전부이다. 가족들은 엄마가 실종된 뒤에 긴급 대책 회의를 갖고 전단지, 신문 광고 등을 동원해 엄마 찾기에 나선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가족들은 엄마에 대해 자신들이 알고 있는 정보가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 깨닫게 될 뿐이다. 자신을 위해서는 그럴싸한 사진 한 장 남겨놓지 않았던 엄마와 마찬가지로 가족들 중 누구도 엄마의 존재를 선명하게 떠올리지 못한다. 엄마가 실종되리라는 최악의 상황을 예비해 놓고 사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만 이들 가족의 비철저성은 엄마의 미약한 존재감과 맞물려 울화통이 터질 만큼 잔인하게 느껴진다.
가족들의 보잘 것 없는 기억에 의존한 엄마의 모습이 어떠한지는 목격자들의 증언에 의해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전단지를 통해 연락해 온 목격자들의 한결같은 증언에 따르면 엄마는 소를 닮은 눈을 가졌고 파란색 슬리퍼를 신고 있었으며 슬리퍼로 인해 발가락에 뼈가 드러날 정도로 깊게 팬 상처를 가지고 있다. 작가는 도심을 홀로 헤매고 있을 초라하고 가엾은 노파의 모습을 이토록이나 핍진하게 묘사하며 외면할 수 없는 진실에 마주하도록 만든다. 물론 목격자들의 말은 사실이라기보다 가족들의 간절함이 빚어낸 환상에 가깝다. 전단지 속의 엄마 사진은 소의 눈빛을 읽어내는 것이 가능할 정도로 최근의 얼굴이 아니었으며 실종 당시 엄마는 파란 슬리퍼가 아닌 베이지색 샌들을 신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족들은 그것이 사실이 아닐망정 뼈아픈 진실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소처럼 우직하게 일만 하고, 자신의 상처는 돌보지 않으면서 가족을 위해 무엇이든 희생하는 존재. 그것이 엄마라 불리는 이의 모습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엄마를 부탁해>는 엄마의 존재에 대한 깨달음을 후회라는 감정을 통해 보여준다. 엄마가 실종되는 날에도 북경을 여행하고 있었던 첫째 딸은 결혼을 하지 않고 밖으로만 나돌며 엄마 속을 썩이던 과거를 후회한다. 촉망받던 어린시절부터 엄마의 기대를 한 몸에 안고 살아왔던 장남은 생활이 빡빡하다는 이유로 어머니가 간절히 바라던 검사의 꿈을 버린 것을 후회한다. 아내의 손길이 없이는 아무 것도 혼자 하지 못하는 남편은 아내가 아프다는 사실을 모른 척 하며 습관처럼 성큼 앞서 걷느라 아내를 인파 속에서 놓쳐버린 그 날을 후회한다. 이들의 뒤늦은 고해성사는 각 장으로 병치되어 드러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이들이 후회하는 것들은 용서받을 수 없는 패륜까지는 아니다. 어느 누구라도 가지고 있는 무신경함과 자그마한 이기심의 발로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들은 이들 가족의 모습에서 자신의 모습이 겹쳐짐을 깨닫게 된다.
가족들이 털어 놓는 후회의 감정보다 더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그들이 과연 엄마를 얼마나 이해하고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엄마가 사라진 뒤 각자의 기억 속에서 떠오르는 엄마의 모습은 한결같이 가족의 굴레 안에서만 규정되어 있다. 그들은 엄마 또한 누군가의 소중한 딸이라는 사실을 잊고 산다. 엄마에게도 가슴을 설레게 하는 누군가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또한 엄마가 가족의 굴레에서 놓여나고 싶어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짐작하지 못한다. 결국 엄마가 가족들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 왔다는 것만 기억할 뿐, 엄마가 어떤 삶을 살아 왔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결국 앞서 말했던 엄마는 소유할 수 있는 대상인가 하는 문제로 되돌아간다. 엄마의 존재를 가족의 굴레 속에 한정시키는 것은 엄마의 일생을 별개의 것으로 인식하지 못한 것에서 비롯된다. 소설에는 장남이 여동생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는 장면이 있다. 엄마의 일생을 고통과 희생으로만 기억하는 건 우리 생각인지도 모른다고. 또 그것이 오히려 엄마의 일생을 보잘것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일일 수도 있다고. 이러한 깨달음이야말로 엄마에 대한 참된 이해의 시작이다. 엄마의 삶의 모습들을 '희생'이라고 규정짓는 것 자체가 이미 잘못된 것임을, 엄마는 우리가 소유했다가 잃어버릴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님을 보여주면서 작가는 후회라는 감정보다 참된 이해가 더욱 중요하다고 말한다.
소설은 모두 4개의 장과 한 개의 에필로그로 이루어져 있다. 1~3장에는 엄마의 실종에 따른 남겨진 가족 구성원들의 후회의 목소리가 차례차례 나타난다. 큰딸, 장남, 남편이 각 장의 주인공이 되어 기억 속의 엄마의 모습을 끄집어낸다. 그런데 1장과 3장에서 서술자는 인물을 지칭하는 대명사로 '그'를 대신해 '너'와 '당신'을 사용하여 변화를 주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효과는 소설을 읽어가는 동안 충분히 체감할 수 있다. '그'라는 3인칭 대명사는 소설 속 인물만을 지칭하지만, '너'나 '당신' 같은 2인칭 대명사는 소설 속 인물과 더불어 독자까지 겨냥하는 효과를 가진다. 2인칭의 사용은 냉엄한 질책과도 같은 효과를 내면서 인물뿐 아니라 독자까지도 참회의 장으로 끌어내린다. 이러한 서술방식의 변화는 단순히 일인칭 시점을 통해 감정을 직접 노출시키는 것보다 더 강한 울림을 준다.
마지막 4장에서는 그동안 소재를 알 수 없었던 ‘엄마’가 일인칭 화자가 되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엄마의 목소리로 엄마의 삶에 대해 듣는 순간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강한 충격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다. 엄마의 삶은 가족들이 기억하는 것과는 많은 점에서 달랐다. 엄마로서 뿐만 아니라 딸로서, 여자로서 자신만의 삶을 오롯이 살아 냈던 한 여성의 삶에 대해서 그 누가 완벽하게 이해한다고 할 수 있었을까. 가족들의 기억 속에 각인된 엄마의 모습은 엄마의 삶 전체에 있어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욱신거리고 고단한 육신으로부터 벗어나 새 안에 깃든 가볍고 투명한 존재가 되었을 때야 비로소 자유롭게 비상하는 엄마의 모습은 자식들에게 짐 지워진 무거운 죄책감을 덜어낸다. 비록 비극으로 종결된 사건이지만 이를 통해 자그마한 위안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때로는 평범한 단어 하나가 화려한 수식에 기댄 유창한 문장보다 더 가슴을 울린다. <엄마를 부탁해>는 장편소설답지 않게 단조로운 구성으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으며 명쾌하고 화려한 수사도 없지만 흠뻑 빠져들지 않을 수 없는 강렬한 매력이 있다. 이 소설은 정서의 과잉 분출을 애써 억제하고 있는 느낌이지만 작품 전체에 절절한 그리움과 애달픔의 정서가 묻어나온다. 이는 작품이 획득하고 있는 정서적 보편성 때문일 것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엄마들은 어느 정도는 소설 속 '엄마'와 닮아 있다. 엄마를 회상하며 지난날을 후회하는 자식들의 모습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런 보통의 삶 속에서 하나의 파문을 일으키며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은 리얼리티를 확보하며 충분히 독자의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소설 속에 녹아 있는 삶의 진실 속에 아직 늦지 않았다고 말하는 작가의 목소리가 짙게 배어나온다.
신경숙만의 문체가 있다. 신경숙만의 향기가 있다. 신경숙만의 우위優位가 있다. 이러한 그녀만의 '문체'와 '향기'와 '우위'는 결국 하나의 문장으로 귀결된다. 역시 신경숙이다, 라는 명료한 한 문장으로 말이다. 1985년 등단한 이후 그녀가 쏟아낸 수많은 텍스트들은 앞서 언급한 공식을 절대 벗어나지 않는다. 그만큼 소설가 신경숙은 자신만의 선연한 브랜드를 갖고 있는 안정적 창조가다.
궁중 무희의 신분으로 프랑스 외교관을 사랑한 실존 여인 '리진'의 삶을 그린 소설 『리진』으로 그녀의 문학적 역량을 포효했던 신경숙은 불과 1년여만에 전혀 새로운 소재를 담은 장편 한 권을 선보였다. 그녀는 신작 『엄마를 부탁해』를 통해 시대와 문화를 막론하고 인류가 존재하는 모든 시공간에서 가장 뜨거운 단어로 인간에게 각인되어 있는 '엄마'라는 존재를 텍스트 위에 감동적으로 녹여냈다.
소설은 총 네 개의 장과 하나의 에필로그로 구성된다. 각 장마다 시선의 흐름을 주도하는 화자가 교체되며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각 장의 화자는 '너', '그', '당신'으로 바귀면서 '엄마'의 존재성을 입체화한다. 작가는 딸을 '너'로, 아들을 '그'로, 남편을 '당신'으로 설정했다. '나'라는 친숙한 일인칭 주어를 거부한 채 내가 아닌 타인을 지칭하는 인칭대명사를 차용한 작가의 고집은 '엄마'와 독자 사이의 거리감을 좁히고 있다.
작가에 의해 의도된 '엄마'와 독자 사이의 거리감 좁힘은 종내 소설 속 엄마를 독자 '나'의 엄마로 치환시킨다. 곧 소설 속 '너', '그', 당신'은 곧 현실의 '나'가 된다. '네' 회상이 나의 회상이 되고, '그'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 되며, '당신'의 부끄러움이 나의 부끄러움이 된다. 어쩌면 작가는 작중인물의 호칭을 가공 실명이 아닌 일반 인칭대명사를 사용함으로써 독자 일갈을 향한 문장의 절제미와 합리성을 의도화했는지도 모른다.
네번째 장 엄마의 회상씬이 인상깊다. 소설 속에서 유일하게 일인칭 화자로 시선을 주도하는 넷째 장은 엄마 자신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통합된 전지적 시각의 이야기다. 시간과 공간의 구속을 벗어난 엄마는 시선을 자유로이 이동하며 자신의 독백을 주도한다. 그 독백에는 엄마로서 살아야만 하는 십자가를 내포한다. 하지만 그것에만 함몰되진 않는다. 여자로서의 비밀과 방황도 함께 있다. 즉 세상 모든 '엄마'가 발현해내는 '신성神聖'과 한 여인으로서 감춰야만 했던 내밀한 '인성人性'을 공존시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신성과 인성의 교차 합일을 통해 '엄마' 속에 내재한 신의 속성을 이끌어낸다.
무엇보다 이 소설의 백미는 마지막 장면에 있다. 엄마를 잃어버린 지 구개월째다, 로 시작하는 에필로그 <장미 묵주>는 소설의 완성도를 오롯하게 만든 텍스트 연금술의 극치다. 소설을 시작한 '너' 큰딸의 시선은 엄마를 잃어버린 먼 훗날의 시점으로 회귀하여 소설을 끝맺음한다. 미켈란젤로의 명조각상 피에타상 앞에서 "엄마를, 엄마를 부탁해─"라며 애원하는 큰딸 '너'의 마지막 명장면은 세상의 모든 슬픔을 두 손으로 보듬는 모성에 대한 고개숙임이자 찬탄이리라.
대중음악가 이적은 이 소설을 "세상 모든 자식들의 원죄에 대한 이야기"라고 프리뷰했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평에 동의할 수 없다. 이 소설은 모성을 빚진 자식들의 원론적 죄값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러한 단선적 조망은 신경숙 자신의 모든 문학적 역량을 쏟아부어 창조한 경외스런 텍스트에 대한 지엽적 감상의 오류이자 모독이다. 감히 평하건대, 소설 『엄마를 부탁해』는 '엄마'라는 존재로 대변되는 인류 유일무이한 아가페적 사랑에 대한 오마주이자, 온전하면서도 온전치 못한 인간으로서의 '엄마'를 단층 해부한 'CT촬영'이다.
매우 깊은 문학적 감동을 선사한 작가에게 경의를 표한다. 문장 곳곳에 작정하고 쓴 흔적이 역력하다. 고결한 주제를 뛰어난 연금술로 완벽하게 창조해낸 텍스트에 별 다섯개는 한없이 적게만 느껴진다. 한국 문단에 신경숙이 있어 행복하다.
http://blog.naver.com/gilsamo
Written bY David
엄마도 여자다
친구의 예쁜 마음이 담긴 빨간 카드와 함께 날아온 책! 저자 사인까지 있는 것을 보며 가슴에 꼭 안았던 책이다. 제목을 보자 엄마가 떠오르고 표지의 달리 그림을 보자 괜히 쓸쓸함이 전해져 나도 모르게 가슴으로 엄마를 부르게 된 책.
엄마 없는 사람이 있을까? 물론 현재 엄마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다른 사연들을 가지고 있겠지. 돌아가신 엄마를 그리워하는 사람, 살아 계서도 자주만나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사람, 친구처럼 가깝게 지내는 사람, 원수처럼 관계가 나쁘지만 그래도 엄마에 대한 애틋함을 지닌 사람, 엄마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가슴 아픈 사연을 지닌 사람. 참 많은 사람들이 엄마를 생각하겠지. 그 가운데 만족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만족하지 못한다면 지금 이 순간부터 엄마도 여자임을 기억하자.
친구, 자식, 남편, 동료를 대하듯 따뜻하게 대한 적이 얼마나 되나 생각해보고, 그들에게 쏟는 관심만큼이라도 가져보자. 내가 하고 싶은 것처럼 ‘엄마도 원한다’ 라는 생각도 하자. 가족의 그림자처럼 존재하며 늘 그들을 위한 삶이 당연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조차 모르는 무심함도 버리자. 나도 엄마임을 명심하자. 세월은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후회하지 않도록 지금 이 순간 마음을 전하며 살자.
솔직히 난 엄마와 그렇게 다정한 시간을 함께한 기억이 없다. 야단맞은 기억도, 매를 맞은 기억도, 칭찬을 받은 기억도, 속상했던 기억도 없다. 오히려 그런 것을 아버지에게 많이 받았다. 어린 시절 엄만 늘 일하는 사람으로 다가왔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을 하심에도 늘 일에 얽매여있는 느낌을 어린 나이에도 느꼈다. 일 때문에 엄마와 나 사이의 거리는 좁혀질 사이도 없이 고등학교를 진학하면서 더욱 멀어졌던 것 같다. 엄마와 떨어져 지냄으로써 느끼는 그리움이나 고생하시는 엄마를 생각하며 느끼는 안타까움과는 별개로 틈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인지 난 작품 속 화자처럼 엄마에게 화를 낸 적은 없다. 화를 낸다는 건 어찌 보면 친하니까 가능한 것 아닌가.
1장에서 화자가 자신에게 ‘너’라 말하며 엄마와 가족에 관해 이야기할 때 뭔가에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그 ‘너’가 바로 나였으니…. ‘모녀관계는 서로 아주 잘 알거나 타인보다도 더 모르거나 둘 중 하나다.’라는 작가의 말이 어찌나 가슴을 찌르던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엄마를 친구나 동료처럼 알아가면서 이해하면서 살아야할 존재로 여겨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냥 엄만 엄마일 뿐이었다. 내가 힘들 때, 슬플 때, 속상할 때 언제나 그 자리에 계셔주기만 하면 되는 존재로 여겼다. 그런데도 슬플 땐 왜 그렇게 엄마가 생각나고 엄마가 생각나면 눈물은 왜 그렇게 주체할 수 없이 흐르는지 그 근원이 무엇인지 아직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엄마를 내 문제 해결에 도움을 주는 대화의 상대로 여긴 것도 아니다. 어쩌면 문제를 해결해주기엔 아는 게 없다고 여긴 것인지도 모르겠다. 엄만 멀리서 존재하며 내가 찾을 때 그냥 소리 없이 있어주는 그림자와 같은 존재, 그러나 없으면 괜히 화가 나고, 미워할 것 같은 존재였다.
사회생활, 결혼, 출산으로 이어지는 행복한 시간을 보내다보니 어느새 엄만 내 관심 밖이었다. 그때가 나에게 가장 여유롭고, 자유로운 행복한 시간이었기에…. 경제적 독립과 동시에 내가 세상의 중심인 것처럼 살았으니….
그런 나를 질책하듯 아무런 준비도 못했는데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아버지나이 62, 엄마 61, 내 나이 30에. 10여 년 동안 병으로 고생하신 것을 알았으면서도 죽음에 대해 한 번도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늘 그렇게 우리와 함께하실 거라 여겼던 것이다. 참으로 어리석은, 이기적인 사람이 바로 나였음을 인정해야 했다. 아버지의 죽음은 모든 가족을 가깝게 만들었다. 혼자계시는 엄마 때문에 자식들이 자주 시골을 찾게 되고 엄마와 이야기하는 일이 조금씩 많아진 가운데 가족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되었다. 큰언니의 제안으로 엄마를 위한 여행을 계획했다. 병으로 인한 아버지의 잔소리와 농사일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엄마를 위한 여행!
그 과정에서 우린 엄마를 조금씩 알게 되었다. 예를 들면 여행준비를 하기 위해 백화점에 가면서 난 엄마도 같이 가자고 했다. ‘엄마는 그런데 싫어하시지, 다리도 아프시고, 복잡한데’ 언니들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엄만 ‘아니다 나도 같이 갈란다’ 하셨다. 그때의 언니들의 반응을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나온다. 다들 깜짝 놀란 표정, 우리 엄마 웃기셔, 엄마도 정말 갈 거야, 다양한 반응에 난 미소만 짓고 있었다. 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엄마도 그런 곳에 가셔서 구경하시는 걸 좋아하신다는 걸. 친구들 모임에서 친정 부모님을 모시고 나들이 갈 때가 있었는데 그때도 그런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루 전에 집에 오신 엄마에게 정말로 그냥, 나 혼자 나가기 멋쩍어서 ‘쇼핑센터에 구경 가실래요’ 라고 했는데 엄마가 정말 좋아하셨다. 그리고 처음으로 엄마 옷을 고르게 되었는데 나와 똑같이 원색을 좋아하셨고 노랑을 좋아하신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언니들 역시 나보다 많은 것을 안다고 하지만 놓친 부분인 것이다. 아마 언니들도 나와 똑같이 엄마를 여자로 생각하기보다 그냥 엄마로 여겼을 것이다.
여행할 때도 딸들이 얼마나 놀라고, 엄마를 경이롭게 생각했는지 우리 엄만 모를 것이다. 열다섯 시간 넘게 비행기를 탔음에도 힘들다 말하지 않으셨고, 항상 우리보다 앞서고, 피곤하다, 다리 아프다는 말씀 한 번도 하지 않고 열흘을 다니셨다. 음식은 어떤가. 한 번도 가리지 않고 늘 즐기셨으며, 버스를 타거나 휴식시간이 있을 때마다 재치 있는 말씀(순수함에서 오는 재치)으로 함께한 모두를 웃게 만드셨다. 우린 놀람의 연속이었고 엄마와의 시간을 행복으로 가득 채웠었다. 처음이 어려웠지 그 후 동남아, 일본 여행을 1년에 한 번씩 하게 되었다. 그 때마다 나에게 주어진 게 처음 여행처럼 엄마와 짝이 되어 늘 함께하고 , 엄마와 잠자기였다. 그런 가운데 엄마의 말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그동안 ‘싫다, 됐다, 괜찮다’라고 하신 말씀이 그 말 그대로가 아님을 알았다. 항상 누군가를 위해 살아오셨던 엄마가 딸에게 대우를 받는 게 어색해서 그러신 것이다. 작품 속 어머니가 막내에겐 당당하지만 아들들과 큰딸에게 늘 미안하다는 말을 하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 엄마 역시 정말 어려웠던 시대에 일곱 명의 자식들에게 맘껏 못해주신 것을 늘 미안해하시며 사셨기에 홀로 사시면서도 자식들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 하셨고, 행여 자식들 걱정할까봐 표현하지 못한 게 어디 한둘이겠는가. 또한 여행할 때마다 잘 드시고, 항상 일찍 일어나 준비하신 것도 딸들을 위한 배려였음을 알게 되었다.
엄마 역시 행복한 시간이었음을 우리 모두 느꼈다. 여행하는 동안에도 피부로 느꼈지만 시골집 벽에 쫘~악 펼쳐진 사진을 통해 엄마의 그런 마음을 다시 보게 되었다. 또한 동네에 얼마나 자랑을 하셨는지 우린 동네에 가면 늘 칭찬을 받느라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추억하며 자랑 좋아하는 엄마도 천생 여자였다.
여행 후 엄마와 자연스럽게 팔짱끼기, 목욕탕 가기 등 시간이 있을 때마다 예전에 해보지 못한 일을 하며 가까워졌다 여겼는데 어느새 무심한 딸로 돌아와 있었던 것이다. 여섯 딸들 중에 경제적으로 어려워진 사람이 생기다보니 매년 한 번씩 가자는 여행을 미루게 되었다. 그 속엔 나도 존재했다. 아니 내가 가장 방해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엄마와 가까워졌다 싶었는데 내 삶에 지치다보니 엄만 여행 전의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챙겨야할 사람의 우선순위를 정한다면 엄만 몇 번째인지도 모르겠다. 살아계신 동안이라도 정말 잘해드리고 아버지 때처럼 후회하지 않을 거라 다짐했던 나는 어디로 가고 다음으로 미루고 있었는지…
늘 ‘괜찮다’하시는 엄마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나, 어쩌면 내가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외면한 것인지도…. 작품 속 화자들처럼…. ‘모녀관계는 서로 아주 잘 알거나 타인보다도 더 모르거나 둘 중 하나다.’라는 작가의 말이 이런 의미는 아닐까?
작품 속 화자들의 무심한 행동에서 나를 발견하고 다시 엄마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칠십을 넘긴지 몇 해지만 엄만 특별히 약을 드시진 않는다. 관절이 좋지 않아 고생하시는 것 외엔 여전히 정정하시고 깔끔하시다. 어쩜 이것도 모르겠다. 화자와 가족들이 무심코 넘긴 것처럼 우리도 그리 믿고 행동하는 지도. 시골에 혼자 사시는 엄마를 찾는 횟수가 점점 줄어들고 전화하는 횟수도 줄어들자 아주 가끔은 엄마가 전화하신다. ‘나다’로 시작해서 이것저것 가져가라는 꼭 필요한 말씀만 아주 짧게 하고 끝나는 전화. 그러니 어찌 다 안다 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난 늦지 않았다 여기며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역시나 짧은 통화였다. 안부, 식사 잘 챙겨 드시기, 혹 아프시면 바로 연락해야 좋은 거라는 몇 마디 말을 마치고 끊게 되는 전화였다. 짧았지만 엄마 목소리 들으니 좋았다.
큰언니가 늘 말하는 소원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보리라 다짐도 했다. 엄마 더 늙기 전에, 다리 더 아프기 전에 국내 여행을 다녀오자는 것. 어쩌면 엄마가 더 기다리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 때 기회 봐서 엄마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있는지 꼭 물어보리라. 나에게만 살짝 귀띔해주라고 말해야겠다. 그 질문에 그동안 드러내지 않았던 여인의 모습을 또 보여줄지도 모르겠다.
인상 깊은 구절
p 25 모녀관계는 서로 아주 잘 알거나 타인보다도 더 모르거나 둘 중 하나다.
p 27 엄마라는 말에는 친근감만이 아니라 나 좀 돌봐줘,라는 호소가 배어 있다. 혼만 내지 말고 머리를 쓰다듬어줘, 옳고 그름을 떠나 내 편이 되어줘,라는.
p 91 그의 엄마가 난생처음 타보는 기차였다. ... 한겨울인데도 파란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가을 추수 때 낫을 잘못 써서 엄지 쪽 발등을 다쳤는데 아물지 않아 앞이 터진 신발을 찾다보니 슬리퍼였다 했다.
p143 내가 자식이 몇인디 오늘 같은 날 꽃 한송이 안 달고 댕기믄 사람들이 뭐라겄어요? 그래서 사왔네.
p198 지헌아? ..... 부탁헌다 ..... 니 엄마..... 엄마를 말이다. ... 당신이 붙잡고 있는 수화기 줄을 타고 딸의 눈물이 흐르는 것 같았다. 당신의 얼굴도 눈물범벅이 되었다.
p217 .... 내가 처음 써본 글자이기도 한 네 이름표를 가슴에 달아주고 학교 운동장까지도 내가 데리고 갔재. .... 그렇게 할 수 있어서 행복했고나.
p235 이젠 지나가버렸다고 생각하는 일들이 사실은 모두 여기에 스며들어 있다는데, 느끼지 못할 뿐 옛날 일은 지금 일과 지금 일은 앞의 일과 또 거꾸로 앞의 일은 예날 일과 다 섞여 있다는데 이제 이어갈 수 없네.
p272 엄마의 일생을 고통과 희생으로만 기억하는 건 우리 생각, 엄마를 슬프게만 기억하는 건 우리 죄의식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오히려 엄마의 일생을 보잘것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일일 수도 있다.
책을 읽자마자 리뷰를 남기는 평소의 습관과는 달리, 마지막 책장을 덮은 후 나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쓱쓱 닦고 오랜만에 엄마와 목욕탕에 다녀왔다. 탕 속에 둥둥 떠서 이야기도 나누었고 엄마의 너른 등을 두 손으로 힘차게 밀어드렸으며 보통 때는 엄마가 하시던 수건 빨래도 오늘은 내가 했다. 다녀와서는 같이 저녁 준비를 했고 그토록 싫어하던 설거지도 자진해서 끝냈다. 그리고 지금은. 일찍 잠자리에 드신 엄마에게 이불을 덮어드렸다.
목욕탕에 함께 가는 것, 같이 저녁 준비를 하는 것, 설거지를 하는 것. 모두 내가 하기 싫어하는 일들이었다. 시원하게 몸 좀 풀었으면 좋겠다는 엄마와 목욕탕에 가기보다는 뒹굴거리며 책을 읽는 것을 더 좋아했고 저녁 준비는 당연히 엄마의 할 일이라고 여겼으며 설거지는 힘든 하루를 끝마치고 온 내가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 외의 많은 집안일을 나는 엄마의 딸이면서도 모른 척 눈감아버리는 때가 많았다. 그런데 오늘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책은 읽어서 무엇 하는가'. 그러지 않겠다고 다짐했으면서도 나는 또다시 소중한 사람을 방치하고 있었다는 씁쓸함을 느껴야 했다.
-한 인간에 대한 기억은 어디까지일까. 엄마에 대한 기억은?(p19)-
생신을 맞이하기 위해 부모님이 서울로 오시던 중 아버지가 지하철에서 엄마를 잃어버렸다. 한 평생을 늘 엄마보다 앞서 걸었던 아버지. 그 날도 그는 여느 때처럼 엄마보다 앞서 걸었고 엄마가 지하철에 타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서울역에서 두 정거장이나 지나온 다음이었다. 엄마의 자식들은, 엄마를 '잊고' 지냈던 그들은 그제서야 한데 모여 엄마를 찾아 헤맨다.
엄마는 잃어버림을 당하기 전에 이미 남편에게, 자식들에게 잊혀지고 있었다. 늘 같은 자리에 존재하고 있을 것이라는 너무나 당연한 믿음으로 우리는 엄마에게 얼마나 많은 상처를 남기고 있을지. 엄마조차 모르고 지나가버린 뇌졸증이었기에 자식들은 당연히 눈치채지 못했고, 자신의 아픔에 빠져있었던 아버지는 엄마에게 치매가 시작되고 있다는 사실을 애써 모른 척 했다. 엄마가 만들어 준 떡을 3년간 냉장고에 방치해 둔 '너'는, 그녀를 다시는 추운 방에 누이지 않겠다고 다짐한 형철이는, 나 죽으면 먹으면서 생각하라고 챙겨준 감나무를 귀찮게만 여겼던 막내는 엄마의 자랑스런 자식들이었지만 품안을 떠나버린 그 때 타인보다 못한 존재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엄마의 부재가 뼈저리게 느껴지는 그제서야 남편과 자식들은 엄마에 대한 추억이 새록새록 샘솟는 것을 느낀다. 엄마가 해주던 밥, 엄마가 일하던 모습, 서울에 자리잡은 큰 아들에게 여동생을 데려다주며 연신 미안하다 미안하다 속삭이던 목소리,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올 때마다 바리바리 싸들고 오던 호박덩이와 온갖 나물들. 엄마는 그런 존재였다. 애써 부탁하지 않아도, 간청하지 않아도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처럼 어느 새 눈을 들어 바라보면 그 자리에 우뚝 서 있는 사람.
나에게도 엄마는 그런 사람이었다. 엄마는 내 기억 속에서 처음부터 엄마로 자리잡았고, 엄마 이외의 다른 무엇이 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생각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저 문구에서처럼 나는 엄마에 대해 제대로 된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엄마에게도 소녀시절이 있었고, 찾고 싶은 친구가 있을 정도로 즐거웠던 학창시절이 있었으며 아빠를 만나 달콤하게 연애했던 아름다운 순간이 존재했었음을 나는 여전히 '잊고' 산다. 나는 엄마의 하나밖에 없는 딸이면서도 내 욕심과 가족의 이기심 안에서 가장 큰 고생과 희생의 대가를 치르는 사람이 엄마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억지로 잊으려 했었음을 고백한다.
'엄마'라는 단어는 소리내어 말하는 것만으로도 사람의 가슴을 찢어놓고 코끝을 찡하게 만든다. 읽고 싶어 손에 들인 책이었지만 첫 페이지를 펼치기가 쉽지 않았다. '엄마-라는 단어만으로도 충분하잖아. 그러니 슬픈 이야기는 그만. -이라고 생각했지만, 과연 이것이 슬픈 이야기인가, 작품 속 엄마의 모습을 그려보며 다시 생각해본다. '엄마'라는, 어쩌면 문학 작품 안에서 가장 많이 등장했을 그 사람을 소재로 이렇게 가슴 먹먹하게 목구멍에 가시가 걸린 것 같은 기분이 들게 만드는 작가에게 경의를 표한다.
하지만 한 가지 명백한 것은 나는 누군가에게, 혹은 전지전능한 신에게라도 '엄마를 부탁한다'는 말은 절대로 하고 싶지 않다. 내게 엄마를 부탁해주기를 바란다. 엄마가 내게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는 내가 엄마를 세상이 허락하는 날까지 돌볼 수 있기를 기원한다.
장면 하나.
초등학교 3학년 때 학생 수가 많아서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누어 수업을 들었었다. 오전반 수업을 들었던 날. 수업을 마치고 나오니 비가 주룩주룩 오고 있었다. 우산을 챙겨온 친구들이 반, 나처럼 우산이 없는 아이들이 반. 몇몇은 엄마가 우산을 들고 올 거라고 책상에 앉아 있었고, 몇몇은 우산을 쓰고 교실을 나가버렸다. 나는 어떻게 하지, 고민을 하다가 우산을 갖고 온 친구에게 우산을 씌워달라고 얘기를 했고, 아예 친구집에 놀러가기로 했다. 친구집에서 잠시 노는 중에 비가 그쳐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엄마가 없었다. 아버지에게 여쭤보니, 우산을 안 들고 간 딸래미 우산 씌워주려고 학교에 마중갔다고 하셨다. 이런... 한참 기다렸을 엄마에게 미안해서 얼른 학교로 돌아가는 길에서 우산 두개를 손에 쥐고 걸어오시는 엄마를 만났다. 비오는 중에 교문에서 나를 기다리셨을 엄마는 그것보다, 내가 비도 오는데 어디로 사라졌는지 걱정했다며 오히려 나를 안아주셨다. 엄마는 바빠서 우산을 들고 나를 기다릴 보통 엄마가 아니라고 생각했었는데, 엄마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었다.
장면 둘.
엄마의 자궁에 혹이 몇 개나 있다고 했다. 그 중에 한 두개는 크기가 꽤 커서 그냥 놔두면 나중에 위험해질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 혹만 제거하기에는 무리가 따르므로 자궁 전체를 들어내야 한다고 했다. 20살도 더 넘은 자식들이 둘이나 있으니 이제 더 이상 아이를 가질 일도 없고, 위험해질 거라면 그냥 그러자고 했다. 그래서 엄마는 수술을 하셨다. 내가 아주 어릴 적 엄마가 맹장 수술로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고, 그 때 엄마 병실에 가서 엄마를 보고 마냥 좋아서 엄마에게 '엄마~~~'하며 달려들었다가 엄마가 배가 아파했던 일이 있긴 하지만, 너무 어릴 적이라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이제 다 커서 엄마가 수술실에 들어가고, 회복되어 다시 나오는 4시간동안, 아버지랑 둘이서 얼마나 가슴 졸이고 있었는지 모른다.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에 엄마가 '혹시 엄마 못 나오면 어떻게 할래..'라고 하셨던 말씀, 평소랑 달리 안절부절 못 하는 것이 딸에게도 확연히 보이는 아버지의 모습, 수술환자 가족 대기실, 수술현황이 나오는 티비화면 등 모든 것이 낯설었다.. 다행히 엄마는 무사히 수술을 마치고 나오셨고, 그 날 밤은 엄마 옆에서 자기로 했다. 아버지는 집에 들어가시라고 해도 기어이 로비에 의자 붙여놓고 주무셨다. 그리고 그 다음날, 낮에 긴장한 탓인지 낯선 병실에서도 잠을 푹 자고 일어났더니, 새벽에 내내 엄마가 구토를 하고 아파하셨고, 그걸 아버지가 다 챙겨주셨다고 한다. 나는 간이침대에서 잘 자고 있는 중에. 엄마에게 미안했다. 그런데다 하루 하루 시간이 지나니 엄마도 점점 나아지고 병실에 다른 환자분들과도 친해지시고 하니, 병원에 있기 싫었다. 약품냄새가 진동하고, 아픈 사람들이 잔뜩 있는 병원은 건강한 나까지도 아플 것 같았다. 그리고 더 솔직히 말하면 사귀기 시작한지 이제 한달 가량 되는 남자친구와 놀고 싶었다. 엄마에게는 공부한다고 핑계를 대고 남자친구와 만나서 데이트도 하고, 하필 대학 축제기간이라 주막에서 술도 많이 마셨다. 고향이 강원도인 엄마에게는 문병오는 지인들도 거의 없었는데, 가게를 닫을 수 없는 아버지는 어쩔 수 없고, 내가 옆에서 챙겨드리고 말동무를 해드렸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엄마는 참 외로웠다고 한다.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는, 이렇게 엄마에게 미안한 아픈 추억들을 꺼내게 해주었다. 박소녀라는 이쁜 이름을 가진 만69세의 엄마를 잃어버렸다. 복잡한 지하철 서울역에서 아버지와 함께 지하철을 탔어야 했는데, 손을 놓치고 말았고, 그렇게 엄마는 서울역에 혼자 놓여 있게 되었다. 자식들은 엄마를 찾기 위해 전단지를 붙이고,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엄마는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엄마 비슷한 사람을 본 것 같다고 제보하는 전화를 하는 사람들이 엄마를 본 곳은 큰 아들이 젊을 때 처음 서울에 와서 머물렀던 직장이나, 집이 있는 동네였다.
큰딸, 장남, 남편의 입장에서 엄마의 실종에 관해서, 오랫동안 묵혀두었던 엄마에 대한 감정들을 풀어내고 있다. 처음에는 '너'라고 지칭되는 독특한 인칭대명사에 익숙하지 않아 이야기를 읽는데 집중이 잘 안 되었다. 하지만 '엄마'라는 대상에 대해 누구나 품고 있을 감정들을 톡톡 건드려주는 글들을 읽으면서 그런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특히나 '아버지'가 시골집에서 돌아오지 않는 아내를 찾을 때는 참고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신비하게도 느껴지는 엄마의 시선으로 그려진 4장을 읽을 땐 주체할 수가 없었다.
엄마의 이름, '박소녀'에서 알 수 있듯이, 엄마는 날 때부터 엄마가 아니었다. 엄마도 나처럼 외할머니의 이쁜 딸일 때가 있었고, 나처럼 꿈많고 수줍어하는 아가씨 시절이 있었고, 아버지와 갓 결혼했을 땐 새댁이 되기도 했었다. 그러다 오빠를 낳고, 나를 낳고 '누구 엄마'가 되었다. 하지만 나한테는 내가 날 때부터 엄마는 엄마였으니까. 엄마는 엄마다워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뿌리박혀 있는 것이다.
못 배운 것이 한이 되어, 자식들에게는 이런 삶을 대물림하지 말아야지, 악착같이 고생하며 일하고 더운 밥 먹이고, 공부시키고, 모든 엄마가 다 그런다. 소설 속 엄마처럼, 나의 엄마도 까막눈이다. 소설 속 엄마는 한글에 까막눈이지만, 우리 엄마는 영어에 까막눈이다. 요즘 티비를 틀고 잠시만 보고 있으면 어디 영어가 안 나오는 곳이 어디 있는가. 오락프로그램을 보면서 같이 즐겁게 웃다가도 화면에 나오는 'perfect'라거나 'sexy' 라거나 하는 짧은 영어 단어를 보면 한숨이 나온다. 엄마는 모르잖아. 엄마한테는 저 글자들이 어떻게 보일까. 왜 우리나라 방송은 한글을 안 쓰고 쓸데없이 영어를 쓰고 있는거야!!
큰아들이 검사가 되기를 그토록 바랐던 엄마는 검사가 되지 못한 아들에게 동생들을 떠맡기고는 그 때부터 자식에게 고개를 들지 못한다. 아들은 아들 나름대로 빨리 성공해서 엄마를 편하게 모시고 싶은데, 아직 동사무소 숙직실의 차가운 바닥에 엄마를 눕게 해서 너무나 미안해한다. 엄마와 자식은, 그렇게 서로에게 함부로 대하기도 하고, 또 미안해하기도 하는 어쩔 수 없는 운명인가보다. 엄마의 뱃속에서 엄마의 피와 양분을 뺏어먹고, 세상에 나와서는 엄마의 젖을 나오지 않을 때까지도 끝까지 깨물어 뜯는 아이와, 내 피와 살을 나눠가진 내 새끼를 바라보는 엄마. 아,, 엄마는, 엄마라는 존재는 아무리 말하고 말해도 고마움과 미안함을 다 표현할 수가 없다.
소설 속 엄마와 우리 엄마가 번갈아 가며 나를 괴롭혔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소설 속 자식들이 엄마에게 가한 상처들과 내가 엄마한테 멋모르고 주었을 상처들이 나를 괴롭혔다. 책을 읽을 때도 그 엄마와 이 엄마가 헷갈리더니, 서평을 쓸 때도 끝까지 헷갈린다. 우리 엄마에게 이 책을 드리면, 엄마는 외할머니를 생각하시겠지.
엄마가 나이가 들고, 내가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친구처럼 편해지고 더 아끼게 되지만, 그만큼 조금씩 약해지는 엄마를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우리 엄마는, 비가 와도 우산 안 챙겨간 딸을 걱정할 게 아니라, 이정도 오는 비라면 뛰어오면 된다 라고 생각했다고 비에 젖은 딸에게 수건 한 장 건네는 그런 강한 엄마이길 바란다. 어릴 적 비오는 날, 내가 엄마를 기다리지 않고 친구집에 놀러갔던 것은 우리 엄마는 그런 엄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끝까지 약해지지 말고, 내가 기댈 수 있는 엄마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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